소설리스트

59화 (59/68)

59화

* * *

휼의 은신처에서 보성사로 향하던 이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휼은 규연을 만나자마자 돌아가 이경과 윤성을 불렀다.

〈나는 이제 자네들을 어찌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무슨 말씀이신지요, 대감?〉

〈전하께서 그리 강경하게 죽겠노라 하셨어도 말렸어야지. 적어도 전하를 말릴 수 없었다면 내게 사실대로라도 말했어야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휼이 감춰진 진실을 알아차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그리지 못했다.

이경은 물론이고 윤성조차도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내가 그리 오해하여 형님을 죽이면! 그리 미워하다가 죽이면! 내 죄가 덜어지는가? 죄스러운 마음만 갖지 않으면 다 괜찮은 것이라고 믿는다는 게 말이 돼?〉

〈대감. 소신이…….〉

〈어찌! 형님께서는 어찌 그리 잔인하시단 말인가!〉

휼은 불같이 화를 내며 괴로워했다. 언이 가면을 쓰고 고통스러워하면서 휼을 위한 땅을 일구었다는 사실이,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언을 미워하다가 죽일 뻔했다는 아찔함이, 휼을 너무도 고통스럽게 했다.

이경은 괴로워하는 휼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언을 막지 못한 것도 이경과 윤성의 죄였고, 차마 언의 무게를 휼에게 얹힐 수 없어 입을 다물어 버린 것 역시 둘의 죄였다.

하지만 가장 큰 죄는, 지금 이경의 눈앞에 있었다.

“……마마.”

규연이 보성사 입구에서 이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경.”

규연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다가와 이경을 불렀다. 어찌나 울었는지 눈가가 붉고 벌써부터 부어 버렸는데, 이경을 보자 다시 눈물이 고여 또 흘러내렸다.

“전하를 만날 수 있게 해 줘요.”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뚝뚝 묻어났다. 규연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이경에게 매달렸다.

“제발. 내 이리 간청합니다. 만나야 해요. 전하를 꼭 뵈어야 합니다.”

휼이 떠난 뒤로, 규연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너무 많은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 규연을 덮쳤다.

그리도 약조했으면서, 몇 번이고 맹세했으면서도 규연을 떠나려 하는 언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운데, 어떻게 해서든 언이 죽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간절함이 밀려와 그 원망마저도 뒤편으로 밀려났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언이었다. 언을 만나서 그를 설득해야 했다.

살려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야 했다.

“지금 궁으로 들어가시는 건 무립니다, 마마. 전하께서 밖으로 나오시기도 힘든 상황이고요.”

“그래도 만나야 합니다. 제발. 이경 내가 이리 부탁해요. 제발……. 제발 만나게만 해 줘요.”

규연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울고 있었고, 이를 보는 이경의 가슴은 끝도 없이 해어졌다.

이경 역시 규연이 언을 설득해 주길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지금 언과 만날 방도가 없었다.

이전에 규연이 부탁했던 것처럼 전하께서 잘 계시는지 확인하는 일이야 궁을 오가는 사람을 통해 이야기만 들으면 해결될 일이지만, 언을 직접 만나는 건 달랐다.

위험했다. 규연에게도, 언에게도.

‘전하께서 절대 만나려 하지 않으시겠지.’

무엇보다도 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규연과의 만남을 거부할 터였다.

“이경, 나는…….”

이경이 착잡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자 규연이 다 잠겨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가 없으면 죽습니다.”

너무나도 은애하는 여인이 다른 사내를 향한 연정을 고백하며 그가 없으면 죽는다는 말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이경이 상상한 것보다 곱절로 괴로웠다.

“최대한 닿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마마.”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견디면서도 곁을 지킬 만큼 연모하기에, 이경은 규연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 * *

“방금 누가 서찰을 보냈다고 했느냐?”

“경아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서혜가 낚아채듯 서찰을 가져갔다. 경아는 정체를 숨겨야 할 때 이경이 종종 쓰던 이름 중 하나였다.

서혜는 서둘러 서찰을 펼치고는 빠르게 읽었다.

혹시 이경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닌지, 혹시 어디서 일이 어그러진 건 아닌지, 그래서 이경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닌지, 손이 덜덜 떨렸다.

“아…….”

그러나 이경이 보내 온 편지에는 언과 규연의 이야기만 가득했다.

규연이 언이 무엇을 그리려 하는지 알아챘고, 심지어는 상평 대군마저 알게 된 상황이니, 언과 규연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냐 묻는 내용이었다.

서혜는 읽고 있던 서찰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향이 엇갈린 사랑이 얼마나 괴로운지 매일매일 깨닫고 있었지만, 깨닫는 방식이 날로 다채로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헛웃음이 다 나는군.”

서혜는 이 상황이 참 우습다며 피식 웃고는 서찰을 촛불에 가져다 댔다. 누군가 봐서는 안 되는 편지였다. 태워야 했다.

흔적을 없앤 뒤, 서혜는 멍하니 앉아 허공을 바라봤다.

‘결국은 다 알게 되었구나. 결국은.’

규연이 제정신으로 버티고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오라버니가 내게 이런 기별을 넣었겠지.’

아마 누구보다 간절하게 언을 살리려 하고 있을 테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테니, 이경이 위험을 무릅쓰고 서혜에게 연락했을 터였다.

‘당신도 마음이 넝마가 되었겠지.’

서혜는 이경을 떠올렸다. 규연이 언을 살리겠다며 발버둥 치는 곁을 지키는 과정이 괴롭지 않을 리 없었다. 은애하는 여인이 다른 사내를 연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참으로 지독한 일이니까.

한숨을 푹 내쉰 서혜는 밖에 있을 상궁을 불렀다.

“이 상궁, 밖에 있는가?”

“예, 자가.”

이경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규연의 청을 들어준 것처럼, 서혜 역시 이경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은 끝도 없이 해어지고, 이경의 마음이 닿지 않음을 알기에 입이 쓰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연모라는 감정은, 틈만 나면 사람을 이토록 우습게 만들었다.

“전하께 기별을 넣을 것이 있으니 먹과 종이를 가져오게.”

“예, 자가.”

규연이 만나고자 한다고 솔직히 이야기하면 절대 만나 줄 리 없는 언이었다. 그래서 서혜는 다르게 일을 만들려 했다.

‘부디 말리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마. 지금 상황에서 전하를 설득할 수 있는 건 마마뿐이니까요.’

원래 그렸던 그림대로 일을 진행하겠다는 언의 의지가 워낙 강했다. 누구의 설득도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규연만은, 언에게 전부와도 같은 규연만은 언을 바꿔 놓을지도 몰랐다.

언이 연모하는 여인이니까. 언 역시 규연 앞에서는 냉철해지지 못할 테니까.

* * *

‘거사가 이틀 앞인데 어찌.’

언은 심각한 얼굴로 서혜가 일러 준 장소로 향했다.

서혜는 이판에게서 심상치 않은 낌새가 보인다며 직접 살펴야 할 것 같다고 기별을 넣었다.

결행일이 코앞이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해서는 안 됐고, 발생한다면 막아야 했다.

언은 흑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쉬지 않고 나아갔다.

막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기 전에 도착해 어둠이 사라지기 전에 떠나 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판 쪽에서 따로 움직이고 있다면……. 혹시 내가 파악하지 못한 영의정의 병력이 더 있는 건가?’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물음이 차올랐다.

언이 미끼가 되어 영의정을 낚으면, 그를 깨부수는 게 휼의 역할이었다.

병력 간의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의정도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고, 휼도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으니, 궁을 장악하기 위해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끼리 서로를 공격할 터였다.

그러니 많은 병사를 가진 자가 유리했다. 만약 영의정 쪽에 언이 파악하지 못한 병사들이 추가로 붙는다면, 일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이곳입니다, 전하.”

심각한 표정으로 발을 옮기고 있을 때, 흑이 멈춰 서서 작은 초가를 가리켰다.

“……여기라고?”

“예, 전하. 지도상으로는 분명 이곳입니다.”

흑은 길눈이 좋았다. 한 번도 잃거나 헤맨 적 없었다. 주변 지형이 험해 알아보기 어려운 것도 아니니, 흑의 말대로 눈앞의 초가가 서혜가 일러 준 목적지일 터였다.

“무언가 이상한데.”

그런데 이판이 일을 꾸미는 장소라기에는 너무 초라했고, 주위의 인적도 드물었다.

언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검 자루를 쥐고는 초가의 대문을 넘었다.

“뒤에서 따르거라.”

“예, 전하.”

흑을 뒤로 보낸 언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돌처럼 굳어 버렸다.

이판이 심상치 않다는 서혜의 말은 거짓이었다.

“전하.”

언을 기다리고 있던, 가까스로 눈물을 참아내고 있던, 규연이 방 안에 있었다.

돌담 아래에서 입을 맞춘 순간이 서로를 눈에 담는 마지막이 되리라 확신했건만.

언은 다시 규연에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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