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68)

58화

* * *

“그러니까 전하께서……. 아니 그러니까 형님이…….”

휼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언의 계획이 무엇인지 살짝 흘려 버린 탓에 아무것도 아닌 척 꾸며 낼 수가 없었다.

결국 규연은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고, 휼은 언의 가면을 알고 무너졌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는 형님은 절대 이러실 분이 아니니까. 유약하게 약에 취하실 분도 아니고, 그리 백성들을 저버리실 분도 아니고, 영상에게 저항 없이 휘둘리실 분도 아니고요.”

휼이 알고 있는 본래의 언은 폭군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누구보다도 자신할 수 있었다.

맏형과 둘째 형이 어릴 때부터 정치에 깊이 닿아 바쁘게 살았다 보니, 어린 휼에게 남은 건 언뿐이었다.

언은 언제나 다정하게 휼을 챙겼고, 많은 것들을 알려 줬고, 부족했던 정을 채워 줬다.

그래서 꼭 다른 사람처럼 변한 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더 괴로웠다.

휘하의 부하들이 절대 찾아가시면 안 된다고 말렸는데도 무작정 알현을 청하며 제발 정신 차리고 선정을 베풀어 달라고 읍소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언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사랑하는 형님을 내치고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이 버거워서.

“정말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까?”

“일언반구도 없으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전하께서 완전한 폭군인 줄 알고 있었으니 말 다 했지요.”

규연은 규연대로 마음이 무너졌다. 휼이 자신을 죽여야 함을 아니, 그와 잘 합의해서 계획을 바꿨다고 이야기했다.

휼이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니 그를 통해 끝을 바꿨노라고. 분명 그렇게 이야기했고, 절대 규연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그런데 휼에게 조금도 계획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이는 언의 마음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제가 느낄 죄책감을 덜어 내려 하시는 것이겠지요. 조금의 연민이라도 남아 있다면, 전하께서 가면을 쓰고 부정과 싸워 오셨음을 깨닫고 나면, 제가 전하를 온전히 내칠 수 없을 테니까.”

휼은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상황을 알게 될수록 가슴이 미어졌다.

“마마. 하나만 더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해지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내치지도 않을 것이니, 한 가지만 확인해 주세요.”

멍하니 굳어 있는 규연에게 휼이 물었다.

“혹시 흑의적도 전하의 작품입니까? 그들을 꾸린 사람도 전하세요?”

잠시 망설였던 규연은 맞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흑의적은 휼의 아래에 들어가 그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주인이 없던 것처럼 행동하다가 휼에게 찾아가 충성을 맹세하고, 휼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언과 이경으로부터 들었다.

“하…….”

진실이 드러나자 휼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직도 이경과 윤성이 자신에게 찾아왔던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흑의적이 나를 위해 싸우겠다?〉

〈왕위를 노리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소신들은 새봄을 원하고, 이 봄을 이끄실 수 있는 분께 충성하기로 했습니다. 하니 거두어 주십시오. 흑의적의 영광을 대감께 돌리겠습니다.〉

윤성은 무척 비장하게 뜻을 전했다. 꽤 긴 고민이 이어졌으나 휼은 그들의 뜻을 승낙했다. 언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으려는 입장에서 흑의적의 존재는 어마어마한 이득이었다.

백성들의 신임을 얻고 있는 자들이 휼의 뒤에 서면, 자연스레 민심이 휼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전부 노리셨구나. 오로지 나를 위해 전부 넘겨 놓으려 하셨어.’

속속들이 드러나는 상황에 휼이 허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마?”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는지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휼의 앞에 마주 보고 있는 규연의 볼을 타고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살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무엇이든 해 드릴 터이니 제발 전하를 살려 달라 청하면.”

낮게 가라앉은, 눈물 젖은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가득 묻어났다.

“제발 전하를 살려 주세요, 대감. 제발. 제발 죽이지 말아 주세요.”

마지막 칼을 휘두르는 건 휼의 몫이었다. 언이 죽겠노라 마음먹었어도 휼의 칼이 내려치지 않으면 언은 살 수 있었다.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 것이고,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모든 내어 드릴 테니 제발……. 제발 전하를 제 곁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대감.”

규연은 뜨거운 눈물길이 새겨진 얼굴로 몇 번이고 청하고 또 청했다.

살려야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언을 살려야 했다.

* * *

“잠들지 못하시리라 생각은 했는데, 이리 애련지에 나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언이 멍하니 연못의 꽃봉오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서혜가 다가왔다.

“그러는 성빈은 어찌 잠들지 못하고 나와 있더냐.”

“전하께 비할 바는 아니지만, 신첩도 심란하기 그지없지 않겠사옵니까.”

궁인들을 모두 뒤로 물린 뒤였다. 서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언의 곁에서 연꽃을 바라봤다.

“눈밭의 눈송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으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하지 않았다.”

눈밭의 눈송이들은 요새의 흑의적을 뜻하는 암호였다. 언은 그를 위해 싸워 온 부하들을 떠올리며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야속해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사람이 아니라 휼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들이다. 어쩌면 내게 그리 야속함을 느끼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서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언은 다가올 새봄만을 위해 움직였다. 그 봄을 위해 살을 깎아 내고 있는 자신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도 건네고 싶을 테고, 그가 일궈 온 땅을 돌아보고 싶을 법도 한데, 언은 오로지 휼의 앞날만을 생각하며 그에게 해가 될 수 있는 행동은 일절 삼갔다.

흑의적은 본래 언을 위해 일하던 자들이었고, 언을 향한 깊은 충심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들에게 언의 모습이 자꾸 보이면, 새 주인에게 정을 붙이기 힘들 터였다.

“서혜야.”

궁에 들어온 이후로는 듣지 못한 이름에 서혜가 조금 놀라며 언을 바라봤다.

“내 너를 보며 참 많이 미안했다. 나를 위해 일하다가 네 아비가 죽었으니 그게 참으로 죄스러웠고, 영의정에게 복수하겠다며 일을 달라 청했을 때 이를 거절하지 않았던 것 역시 죄스러웠어.”

흑의적의 부하들에게는 전할 수 없었지만, 서혜에게는 마지막 인사를 전할 여유가 있었다.

언은 서혜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너를 세작으로 만들지 말걸. 네가 아무리 우겼어도 복수의 도구로 쓰지 말걸. 늘 그리 후회했다. 이판의 집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다. 이 궁에서도 마찬가지고.”

“…….”

“미안하구나. 진심으로.”

미안한 게 참 많은 여인이었다. 흑의적으로 들어와 복수의 불꽃을 태우는 서혜를 보았을 때, 언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복수의 짐마저 얹어 준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전하께 충성하며 영의정과 싸우다 떠나간 건 아비의 선택이었고, 복수를 위해 써 달라며 간청했던 것 역시 저의 뜻이었습니다.”

“…….”

“전하께서 미안해하실 이유도, 죄스러워하실 이유도 없습니다.”

서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만일 전하께서 그날 저를 거두지 않으셨다면, 저는 그대로 죽었을 겁니다. 견디지 못하고요.”

“…….”

“가족을 다 잃은 제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제게 역할이 주어질 것이니 이를 잘 해내야 한다는 의지와 저를 보듬어 주었던 흑의적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죄스러워하지 말라고, 서혜는 언의 눈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언은 그런 서혜를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청해도 되겠느냐.”

“말씀하십시오, 전하.”

“내가 떠나고 나면, 규연이 많이 힘들어할 게다. 무척 고통스러워하겠지.”

아파하는 규연을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운 듯, 언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버틸 수 있게 도와주렴. 부탁하마. 규연과 네가 돈독한 사이가 아닌 것도 알고, 이리 청하는 것 역시 네게 짐을 지우는 것임을 알지만…….”

“…….”

“이경이 애쓰는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게다. 그 부분을 채워 주련. 여인의 마음은 여인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니.”

언은 그가 떠난 뒤에 남을 규연이 너무도 걱정됐다. 거사를 앞두고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잠깐이라도 잠들면 그때마다 눈물짓는 규연이 꿈에 나왔다.

서럽게 울면서 가지 말라고 붙잡는데, 그리 울먹이는 규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졌다.

“아직 늦지 않으셨습니다, 전하.”

서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바꾸실 수 있지 않습니까. 대군 대감께 부담이 갈 수 있다는 것 압니다만, 하면 전하께서 떠나가신 것처럼 꾸며 흑의적 사람들로부터 진실을 감추시면 될 일입니다.”

“감춰질 것이라 생각하느냐?”

언의 물음에 서혜는 차마 답하지 못했다.

“다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남으면, 누군가는 알게 돼.”

비밀로 유지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언의 존재는 온전히 가려질 수 없었다.

“하나 전하. 별장도, 저도, 절대 마마의 상실을 채우거나 달랠 수 없을 겁니다. 전하께서는 마마께서 버티시리라 생각하지만 제가 볼 땐…….”

“버티게 된다. 살게 돼. 그러니 무너지지 않게 지켜 주었으면 한다.”

언은 단호하게 서혜의 말을 잘라 냈다.

‘결국은 버텨 내고, 또 결국은 살게 되시겠지요. 하나 전하. 결코 전하께서 살아 계실 때로 돌아가실 수는 없을 겁니다. 그 구멍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것이에요.’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서혜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운명이, 참으로도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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