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 *
“기별이 왔더냐.”
“예, 전하.”
상선이 다급히 작게 접힌 종이를 언에게 내밀었다.
빠르게 종이를 펼쳐 내용을 읽은 언이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다행이구나. 일이 어긋나지 않았어. 내일쯤이면 규연과 이경의 소식 모두 공표될 수 있겠구나.”
거사는 무척이나 복잡했고, 그랬기에 첫 단추가 참 중요했다. 규연과 이경은 이 단추를 아주 잘 끼웠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전하.”
“그래. 정말 다행이야. 혹시 다치지는 않을지 걱정했건만.”
언은 마음 졸였던 순간을 떠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규연을 떠나보낸 지 고작 하루건만, 벌써부터 규연이 그리웠다. 품에 안겨 올 때마다 느껴지던 온기도, 부드러운 감촉도, 청아한 목소리도, 보고 있으면 사르르 녹아내리는 해사한 미소도, 되찾고 싶었다.
“……전하.”
“말하거라. 듣고 있으니.”
“지금도 늦지 않으셨습니다.”
상선의 이야기에 언의 눈이 뜨였다.
“마마께 말씀하셨던 그대로 바꿀 수 있지 않사옵니까. 충분히 그리하셔도 됩니다.”
상선은 요 근래처럼 행복해하는 언을 본 적 없었다.
상선이 세자를 모시던 시절 기억하던, 총명하던 셋째 대군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맑은 눈으로 규연을 바라보며 눈을 맞추고 이내 활짝 웃는데,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연인이 죽음으로 갈라져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무엇보다도, 상선 본인 역시 언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고 말이 끝난 것이 아니던가. 나는 떠나가야 해. 숨이 붙어 있는 한, 휼에게 짐일세.”
그러나 언의 뜻은 단호했다. 그는 완강하게 상선의 말을 거부했다.
“전하, 영의정 대감이 들었사옵니다.”
상선이 무어라 더 말하려 할 때, 영의정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미 정해진 것은 더 이상 논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합세. 할 것이 참 많지 않은가. 당장 지금만 해도 그렇고 말이야.”
언의 말에 결국 상선이 입을 꾹 닫은 채 허리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들라 하라.”
언은 영의정을 들이라 명령했다.
하나씩 그림이 채워지고 있으니, 언도 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했다.
영의정의 끝을 가져오는 건, 누가 뭐라 해도 언의 몫이었다.
* * *
“어찌 그리 낯빛이 어두운가?”
“소신의 집안에서 폐서인이 나왔으니 어찌 낯빛이 밝을 수 있겠나이까, 전하. 참으로 면구스러워 차마 낯을 들고 다닐 수 없사옵니다. 너무도 송구합니다, 전하.”
영의정은 누구보다도 처세에 능한 자였다. 지금은 한껏 몸을 숙여야 할 때라는 것을 잘 알아 그에 맞춰 행동했다.
보통 상대는 아니라며 속으로 혀를 찬 언은 차분하게 떡밥을 던졌다.
“자네의 잘못이 아니지. 중전이 그리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그 말이 딱이지요. 참으로 낯부끄럽사옵니다.”
태연하게 규연을 욕하는 영의정의 모습에 언의 주먹에 또 힘이 들어갔지만, 지금은 흥분할 때가 아님을 알기에 애써 화를 다스렸다.
“중전이 폐비되면서 백성들이 나를 더 욕한다지. 내가 하늘이 버린 폭군이라 지어미마저 나를 버린 것이라고 말이야.”
언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꾸며 낸 말이 아니라, 실제로 저자에서 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규연이 빠르게 폐비된 뒤, 안 그래도 흑의적의 활동에 따라 언에게서 등을 돌린 백성들이 저마다 소리 높여 언을 욕했다. 하늘 같은 나라님의 권위는 땅 아래로 처박힌 지 오래였다.
“그자들이 뭐라 하든 내 알 바 아니었는데 말일세. 요즘 영 꿈자리가 사나워. 자꾸만 누가 날 죽이는데, 그 얼굴이 매일매일 달라.”
“…….”
“아무래도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많아 어디 살이라도 닿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단 말이지.”
“…….”
“해서 연회를 좀 벌여야겠네. 아, 궁의 문을 열고 쌀도 주고, 고기도 뜯게 해 주고, 기생들의 화려한 가무도 보여 주면 마음이 좀 풀어지지 않겠는가?”
이보다 더 멍청할 수 없다 싶을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였다. 언은 일부러 헛소리를 지껄이며 영의정을 끌어들였다.
“한데 들어 보니 나만큼이나 자네도 욕을 먹고 있다더군? 어떨 땐 나보다 더 말이야.”
“소신이 부족한 탓입니다, 전하.”
“그래서 말인데, 자네를 위한 연회로 꾸미면 어떻겠는가?”
언이 툭 던진 말에 영의정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중전의 일로 상심이 클 것 아닌가. 하니 내가 이를 위로하는 뜻에서 연회를 열어 주겠네. 자네를 위한 연회 말이야. 거기서 돈도 풀고, 음식도 풀고, 뭐든 풀어 보게. 하면 민심이 좀 나아질 것이 아닌가?”
언이 툭 미끼를 던지자 영의정이 유심히 이를 살폈다.
언의 말대로 요즘 민심이 보통 흉흉한 게 아니었다. 영의정이 인적이 드문 시간을 골라 가마를 탈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소신의 이름으로 연회를 열면 더 큰 응분을 살 뿐이지요, 전하. 백성들이 얼마나 괘씸해하겠습니까.’
영의정은 속으로 언의 제안을 비웃었다. 그러다 찬찬히 상황을 곱씹었다.
‘내가 살 길은 주상과 다르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인데……. 민심이 이리 흉흉해지고 있다면……. 내 손에서 내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왕의 씨를 품어 줄 수 있는 규연은 사라졌고, 폭군으로 만든 언을 영의정의 꼭두각시로 삼으려던 계획 역시 흑의적 때문에 실패했다.
그렇다면 굳이 언을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상평이 있다. 정 안 되면 더 먼 방계로 나아가도 되고.’
왕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피를 이어받은 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연회를 이용해서 주상을 내친다면? 내가 직접 주상을 벌한다면? 그림이 달라지지.’
온갖 폐단을 언에게만 뒤집어씌우면, 왕을 향한 충정을 지키기 위해 차마 뜻을 거스르지 못하다가 뒤늦게나마 백성들을 위해 일을 벌였다고 꾸미며 영의정이 직접 언을 끌어내리면, 분명 효과가 있을 터였다.
영의정이 그가 쥔 권력을 더 견고하게 지키려면, 언과 그의 연관성을 끊어 내야 했다.
‘그래. 성대하게 열어 보는 눈을 늘린 다음, 그 자리에서 죽이면 되겠어.’
영의정은 그럴듯한 계획에 만족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그리 마음 써 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소신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언은 계산을 마치고 넙죽 받아들인 영의정을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영의정이 한 수 앞을 볼 때, 언은 두 수 앞을 봤다. 연회를 제안한 것도, 일부러 영의정을 앞세운 것도, 모두 영의정의 움직임을 예상해 던진 미끼였다.
‘나를 죽이려 하겠지. 그래야 흔들리지 않고 살아남을 테니.’
주상이니 영상이니 하는 놈들이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 보자며 성난 백성들이 궁 안으로 들어왔을 때, 세기의 폭군이라는 언을 영의정이 직접 베어 내면 분명 상황이 달라질 터였다.
그러나 언은 영의정이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게 둘 마음이 없었다.
‘그래. 열심히 내 심장에 칼을 꽂을 준비를 하거라.’
영의정이 언을 죽이겠다며 반역을 꾸미는 순간.
‘휼이 너를 베러 궐의 문을 넘을 테니.’
언을 죽이려는 영의정, 그런 영의정을 처단하기 위해 흑의적을 대동해 궁 안으로 들어오는 휼.
언이 그리는 그림은 이것이었다.
폐단을 도려내는 영웅은, 반드시 휼이 되어야 했다.
* * *
“별장께서 오늘은 찾아오지 못하신다 하셨습니다.”
“원체 바쁠 테니까. 지금껏 별일 없었고, 다른 병사들도 있으니 괜찮을 게야.”
“예, 마마.”
규연은 보성사에 우거진 수풀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작은 절에서의 시간은 느린 듯 빠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언을 향한 그리움이 짙어져서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다시 언을 마주하고,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마마. 곧 비가 쏟아질 듯한데, 어디 가십니까?”
“이 앞에 잠깐만. 바로 앞 숲길에 잠깐 다녀올게.”
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면, 규연은 일부러 깊숙한 숲길을 걸었다. 풀 내음을 맡고, 새소리를 듣다 보면 그래도 훨씬 나았다.
“……어?”
그런데 생각을 정리하려 숲길로 나아간 순간,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반가운 얼굴이 규연의 시야에 들어찼다.
“상평 대군?”
규연이 휼을 부르자 그가 바로 고개를 돌려 규연을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 휼의 차분하던 얼굴에 균열이 생기며 놀란 기색이 깃들었다.
“안 본 새에 그새 자라신 것 같습니다. 이제 장성한 사내 티가 납니다, 대군. 아, 이제는 내가 이리 하대하면 안 되지요. 송구합니다, 대감.”
규연은 반가움 어린 얼굴로 휼에게 다가갔다. 휼만 여전히 경악한 채로 규연을 바라봤다.
언은 휼이 모든 것을 알고 있노라 이야기했다. 그가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결말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규연은 이곳에 나타난 휼을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되레 더 반가웠다. 혹시 규연에게 언의 전언이라도 전하러 온 것이 아닌지 괜히 기대됐다.
“혹 전하께서 보내셨습니까? 전하께서는 잘 지내시는지요? 곧 뵙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데도 마음이 쓰여 괴롭습니다.”
규연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자 휼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 참으로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대감께서 함께 계획을 바꾸어 주신 덕에 전하께서 쉬이 뜻을 무르실 수 있었으니까요. 전하께서 다시 살 수 있게 되어 제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릅니다.”
“…….”
“대감께서는 잘 해내실 겁니다. 원체 따뜻하신 분이니까요. 전하께서는 본인이 도려낸 상처 위로 대감께서 튼튼한 새살을 돋울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계십니다.”
내내 의아해하던 휼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도려내다니. 새살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 대감께는 다 이야기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반가움에 신나게 말을 잇던 규연도, 그저 당혹스러워하기만 하던 휼도,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졌다.
“대감께서 분명히 다 아신다고…….”
“전하께서 무언가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까? 하면, 제가 보았던 그 폭군의 모습은 거짓이에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양쪽 모두 대답을 원하건만, 당혹스러움이 잔뜩 묻은 질문만 연신 쏟아졌다.
그 순간, 규연은 깨달았다.
언의 약조가 거짓이었음을.
그가 죽고자 하는 계획은,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