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 *
강화도는 그리 멀지 않았다. 장식 없는 가마에 올라탄 규연은 한나절이 막 지났을 즈음, 유배지인 초가에 도착했다.
규연을 감시하도록 명받은 병사 둘이 심각한 얼굴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규연은 그들을 지나쳐 초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병사 중 한 명이 따라 들어와 앞으로 이곳에서 어찌 지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초가의 대문을 넘을 수 없었고, 음식이나 여러 물건은 병사들을 통해서만 수급받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아주 작은 감옥이었다.
“태도가 어찌 저리 방자한지.”
“쉿. 듣겠구나.”
“들으라 하십시오, 속이 터져 그렇습니다.”
“더 이상 내가 중전이 아니지 않더냐. 폐서인이 되었는데 어찌 상냥히 대하겠어.”
규연의 말에 정 상궁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 상궁은 아직도 지금 벌어진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규연이 이경과 사통했다는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규연의 눈이자 손과 발이었던 자가 정 상궁이었다. 규연이 어떤 마음으로 언을 대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사랑을 청했는지, 그래서 마침내 마음이 닿았을 때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잘 알았다.
그런데 이경과 사통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규연은 조금도 부인하지 않았고, 상대인 이경 역시 조용히 벌을 따랐다.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지만, 정 상궁은 그녀가 모르는 이면의 이야기가 있노라 짐작했다.
“마마.”
“안 그래도 일러 주려 했네. 한데 아무래도…….”
규연이 밖을 향해 눈짓한 뒤 종이와 먹을 가리켰다. 듣는 귀가 있으니 필담을 나눠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 상궁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고 낡은 상 위에 화선지를 깔고 벼루에 먹을 갈았다.
규연은 붓을 잡고 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적었다.
언이 무엇을 하려 하는지, 이를 위해 규연은 어찌 되어야 했는지, 왜 이런 식의 폐비가 최선이었는지, 규연이 다가올 밤에 무엇을 꾸밀 건지, 그 시간에 맞춰 누가 찾아올 것인지.
종이가 몇 장씩 쓰이고, 먹을 다 쓸 정도로 많은 양의 글자가 빼곡히 적혔다.
“세상에…….”
차분하게 글을 읽은 정 상궁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너무 많아 이것만으로도 어지러운데, 규연과 이경이 각각 유배지에서 자결한 것처럼 꾸며 내고, 이곳을 탈출해 보성사로 갈 것이라는 계획이 너무도 위험천만해 보여 간담이 서늘해졌다.
“마마. 하면…….”
소리 내 물으려던 정 상궁이 아차 하고 입을 가리고는 붓을 들어 조그마한 글씨를 적어 규연에게 물었다.
하면 시체는 어찌한답니까? 죽었다 믿게 하려면 흔적이 필요할 것이 아닙니까?
흑의적이 처리할 게다. 이미 이 근처에 와 있을 게야. 그리하기로 했어.
치밀하게 짜인 계획에 정 상궁의 입이 떡 벌어졌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그건 보성사에 가서 이야기하지. 필담으로 채 전하기 어려우니까.
예, 마마. 그리 알겠습니다.
전해야 할 내용이 아직도 너무 많았다. 필담으로 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장 종이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규연은 유서처럼 꾸며 낼 편지가 필요했고, 이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종이를 아껴야 했다.
슬슬 준비하면 돼. 밤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예, 마마.
언은 규연이 낡은 초가에서 하룻밤도 머물지 않기를 바랐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겨 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당장 오늘 밤에 이경이 이곳을 찾기로 약조했다.
규연은 크게 숨을 고르며 상 위에 새 종이를 올렸다.
곧 해가 질 터이니, 슬슬 유서를 적어야 할 때였다.
* * *
내 너를 벗으로 둘 수 있어 참으로 영광이었다. 네가 없었으면 이곳까지 오지 못했겠지.
규연이 갇힌 초가로 다가갈수록 언이 건넨 서찰의 내용이 한 문장씩 되살아났다.
규연보다 일찍 강화도에 도착한 이경은 기민하게 주위를 살피며 탈출구를 찾아낸 뒤, 그의 흔적을 지워 줄 흑의적의 동료들과 연락을 마쳤다.
그러고는 초가의 방 안으로 들어와 서혜가 전해 주었던 언의 서찰을 꺼내 읽었다.
덤덤한 편지이리라 생각했다. 휼을 부탁하고, 규연을 부탁하고, 함께 고생해 온 흑의적의 동지들을 부탁하는, 그런 내용이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언이 보낸 서찰에는 이경을 향한 내용이 훨씬 많았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대군에게 다가와 환히 웃었던 날을 아직 기억한다며 시작된 편지는 기어코 이경을 울렸다.
이경은 지금이라도 달려가 언의 바짓단을 붙잡고 늘어지며 청하고 싶었다.
제발 죽지 마시라고. 제발 죽음을 꿈꾸지 마시라고.
전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여인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바꾸시라고. 절대 뒤이어 왕위에 오를 상평 대군에게 부담이 가지 않게 할 테니, 제발 숨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이경은 몇 번이고 읍소하고 싶었다.
“하…….”
긴 한숨을 내쉰 그는 이내 생각을 덜어 내고는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지금은 언에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규연을 무사히 보성사로 데려가야 했다.
귀한 여인이다. 부디 지켜 주렴.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그 여인이 아파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더 많이 웃을 수 있도록. 혹여나 나를 따라오려 하지 않도록. 부디 지켜 주길, 간절히 부탁하마.
언은 꼭 규연을 지켜 달라고 몇 번이고 청했다. 언의 청이 없더라도 제 목숨 바쳐 규연을 지킬 이경이었다.
그는 규연의 초가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도록 걸음을 서둘렀다.
“나리.”
“그래. 왔구나.”
초가로 다가가니 사건을 꾸미기 위해 도착한 흑의적 동료 둘이 이경을 맞았다.
이경은 고갯짓하며 인사를 건네고는 바로 초가 주위를 살폈다.
밤이 깊은 시간이었다. 다행히 초가를 지키는 경비가 삼엄하지 않았다.
이경은 병사들의 눈을 피해 초가 뒤쪽으로 다가간 뒤, 조심스럽게 초가의 창문을 두드렸다.
“이경?”
숨죽인 것도 잠시, 규연이 이경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예, 마마. 소신입니다.”
이경임이 확인되자 규연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별일 없어 다행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걱정 많이 했어요.”
“마마께서도 무탈하시어 다행입니다.”
소복을 입고 있는 규연의 얼굴을 보니 긴장이 풀렸다. 혹여나 다치진 않았을지, 유배지에서 일이 생기진 않았을지 무척이나 걱정했던 참이었다.
“서둘러 가시지요. 빨리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좋습니다.”
“그냥 이리 나가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예. 수습을 위해 찾아온 자들이 이미 있습니다.”
뒤를 걱정했던 규연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경이 내미는 손을 꽉 잡았다.
그의 도움을 받아 규연이 먼저 초가 밖으로 나오고, 이내 정 상궁도 그 뒤를 따랐다.
“말 두 필로만 움직여야 해 소신이 직접 모셔야 합니다. 괜찮으신지요.”
“네. 괜찮아요. 어서 서둘러 가지요.”
규연이 말 위에 오르고, 그 뒤에 이경이 올라탔다.
꼭 품에 안은 듯한 자세에서 전해지는 규연의 온기와 체향에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이랴!”
이경은 한숨을 삼키며 규연을 데리고 보성사로 향했다.
아무렇지 않게 이리 함께 말을 탈 수 있는 사이면 참 좋았을 것이라고. 혼담이 어그러지던 그때, 그리되어서는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어야 했다고.
부질없는 후회를 거듭하면서.
* * *
“보성사입니다, 마마.”
“아…….”
바짝 긴장한 채로 보성사를 향해 달려온 규연은 익숙한 풍경이 보이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굽이진 산길을 지나 작은 절이 나오니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혹시 이곳으로 달려오는 길에 추격자가 따라붙진 않을지, 유배지를 지키던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일이 어그러졌다는 소식이 들리지는 않을지, 계속해서 가슴 졸이며 달려 온 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부인. 쉬어 가실 곳이 필요하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말에서 내리니 보성사의 주지가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규연을 맞았다.
막 동이 트기 직전, 어스름이 내려앉은 이른 시간이건만 주지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원하시는 만큼, 편히 쉬어 가십시오.”
주지는 규연을 ‘부인’이라 불렀고, 다른 것은 일절 묻지 않았다. 매번 아버지의 기일에 찾아와 탑을 도는 여인임을 알 텐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공간을 내주었다.
“혹시 주지 스님과 무슨 연이 있어 이곳을 고른 것인가요? 그게 아니면…….”
“요새에 스님과 잘 아는 자가 하나 있습니다. 집안에 일이 있어 잠시 피하셔야 하는 부인이 계시니 부디 모셔달라고 청했다 했고요.”
“아…….”
규연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부하들이 계속해서 주위를 지킬 겁니다. 영의정이든, 누구든, 혹여 일을 꾸미려 하면 반드시 알 수 있을 터이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소신 역시 마마를 호위할 것이고요.”
이경이 규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규연은 누구보다도 이경을 믿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마마.”
“혹……. 일이 치러지기 전까지 전하께 연락할 방법은 없을까요?”
언이 걱정되어 미치겠다는 듯, 그새 그리워져 괴롭다는 듯, 걱정을 가득 담은 채 언을 그리는 모습을 보니 이경의 가슴이 아렸다.
“송구합니다, 마마. 지금 궁에 기별을 넣는 건 위험합니다.”
“역시…… 그렇겠죠.”
풀 죽은 한숨을 내쉬었던 규연은 이내 낯빛을 가다듬고는 다시 물었다.
“혹시 궁을 오가는 동료가 있다면 전하께서 어찌 지내시는지만 살펴 내게 알려 줄 수 있습니까? 전하께서 오실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기 힘들어서요.”
아마 언은 오지 않으리라고. 그가 다시 규연을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리 진실을 전할 수 없는 이경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마마. 궁을 오가는 자를 찾아 물어 두겠습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이경.”
그저 언의 소식 하나 가져온다는 말이건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해사하게 웃는 규연을 보며, 이경은 밀려드는 죄책감에 젖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과연 언이 떠났을 때 규연이 버틸 수 있을까.
이경은 차마 그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