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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55/68)

55화

* * *

규연이 예상했던 대로, 폐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이리 쉽게 진행될 수 있는 일인가 회의가 들 정도로 빨랐다.

영의정이 제 질녀를 벌해 달라며 상소를 올리고, 그의 수족들이 함께 읍소하고, 언이 이에 맞춰 교지를 내렸다.

순식간이었다. 그토록 애쓰며 지켜 왔던 중전이라는 자리가 규연에게서 멀어진 것은.

이경 역시 의금부의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다. 그에게도 유배형이 내려졌다.

평소 꼿꼿한 이경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자들이 하나같이 목소리를 높이며 더 크게 죄를 벌하셔야 한다며 떠들었지만, 언이 확실하게 막아냈다.

그간 언을 지킨 공이 있으니 이를 감안해 유배형에 처하겠다는 뜻을 접지 않았다. 평소라면 영의정이 반기를 들며 고신이라도 하셔야 한다고 헛소리를 지껄였겠지만, 규연과 엮인 문제인 만큼 무작정 몸을 수그리고 있어야 하는지라 가만히 입을 닫았다.

“누가 보면 유배 가는 자가 아니라 소풍 가는 자인 줄 알겠습니다.”

“……자가?”

이경이 이송을 기다리고 있을 때, 서혜가 감옥으로 찾아왔다.

조용히 앉아 있던 이경이 화들짝 놀라며 창살 앞으로 다가왔다.

“이리 오시면 안 됩니다. 혹여 누가 보면 어쩌시려고…….”

“볼 이가 없는 시간에 맞춰 왔습니다. 그리 호들갑 떨지 마세요. 그게 더 눈에 띕니다.”

검은 쓰개치마를 푹 눌러쓰고 온 서혜는 흰 저고리와 바지만 입은 채 지푸라기 위에 서 있는 이경을 빤히 바라봤다.

저절로 한숨이 났다. 충정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리 움직일 수 있는지 생각이 많아졌다.

“어찌 오셨습니까?”

이경은 곧바로 서혜가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그러나 서혜는 즉시 답하지 않았다. 그저 이경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빤히 그를 바라봤다.

사통의 혐의를 쓰고 곧 강화도로 유배를 떠날 자라고는 조금도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해 보였다.

아마 서혜의 눈에만 보일, 묘한 기대감마저 느껴져 그녀가 헛웃음을 짓게 했다.

“갑자기 왜 웃으시는지요?”

“마마를 지키러 가시는 일이 그리도 즐겁습니까?”

허를 찔린 이경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서혜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차라리 아닌 척이라도 하지. 전혀 답이 따라오지 않는 외사랑을 하는 주제에 솔직하게 연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미어졌다.

홀로 사랑하기 바쁜 자를 또 홀로 사랑하고 있으니, 이 무슨 우스운 일인가 싶었다.

“전하께서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서혜가 오늘 이경을 찾은 건, 다름 아닌 언의 심부름 때문이었다. 별일이 없다면 언 역시 거사를 치르기 전까지는 이경을 만날 수 없었다.

그날도 언을 베어야 하는 적으로서 서로를 마주할 테니, 온전한 마음을 전할 길이 없었다.

“직접 오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제가 가져왔습니다. 유배지에서 읽으라 하시더군요. 읽고 태우시라고요.”

“아…….”

이경은 손에 쥐여진 종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 안에 넣었다.

“자가.”

“예.”

“혹, 마마께서는 어찌하고 계십니까?”

또 규연만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경을 보니 괜히 심술이 났다. 심란해 엉엉 울고 있다고 쏘아붙이고는 떠나 버릴까 하는 못된 마음이 스쳤다.

그러나 찰나였다. 서혜는 그리 못나게 굴 수 있는 성정이 아니었고, 이경에게 그리 상처를 줄 수 없는 여인이기도 했다.

“별다른 모습은 보이지 않고 계십니다. 평온하시더군요. 아마 그 너머를 그리고 계시니 그러시겠지요.”

“……아직 눈치채지 못하신 듯하지요?”

서혜가 조금은 착잡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규연은 언의 죽음이 지워졌다고 믿고 있었고, 거사 후의 미래를 그려 내고 있었다.

“괜찮으실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겨우 닿은 마음이 영영 멀어지는 것인데. 지독히도 괴로우실 겁니다. 어쩌면…….”

어쩌면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가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말은 꾹 삼켰다.

괜히 전해 이경의 마음까지 미어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별장은 오늘 밤에 이송될 테고, 마마께서는 내일 아침 강화도로 보내지실 겁니다. 하니 그리 알고 시간을 맞추세요.”

“알겠습니다.”

맡은 바 임무를 다한 서혜가 다시 침소로 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자가.”

그러자 이경의 목소리가 서혜를 붙잡았다.

“어찌 부르십니까?”

그저 한마디 불러 준 것만으로도 살짝 가슴이 뛰어 버려서, 그런 자신이 참 바보 같아서 서혜도 모르게 평소보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경은 전혀 괘념치 않고 말을 이었다.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셔야 합니다. 금방 뵐 테지만. 그래도요.”

서혜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규연만 바라보는 게 야속해서 마음을 끊어 내려 하면, 미워해 보려 하면, 항상 이렇게 별것 아닌 것으로 서혜를 흔들었다.

‘이런 것에도 흔들리는 내 탓이겠지.’

씁쓸하게 결론지으며, 서혜가 창살 앞으로 다시 가까이 다가갔다.

“오라버니.”

궁에 들어오고 나서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옛 호칭에 이경이 놀란 눈으로 서혜를 바라봤다.

“다시 만났을 때는 꼭 전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라버니도 다치지 말고 무탈하게 돌아오세요.”

서혜는 부디 이경에게 아무런 화가 따르지 않기를 빌면서 감옥을 빠져나갔다.

* * *

“마마…….”

소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규연이 나타나자 시뻘겋게 눈이 부어오른 궁녀들이 눈물을 쏟아 냈다.

“이미 많이들 운 것 같은데 어찌하여 또 우느냐. 내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어찌 이래.”

규연이 어린 궁녀들을 달래 보려 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규연은 그녀를 모시는 궁인들에게 언제나 자애로웠고, 틈만 나면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 주며 마음을 썼다. 그 따듯한 성정을 알기에 사통이니 뭐니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흘러넘쳐도 중궁전의 궁인들은 누구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내내 고생하다 떠나가는 상전을 한없이 가여워했다.

“무탈하시옵소서, 마마. 소인들이 치성이라도 올릴 터이니 꼭……. 꼭 무탈하셔야 합니다.”

규연은 그리하겠다며 약조하고는 침방을 찬찬히 둘러봤다.

처음 이곳에 들어와 잠을 청했던 밤이 아직도 선연했다. 넓은 방이 어찌나 스산하고 무서웠는지,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그랬던 공간에 규연의 향이 배고, 규연의 시간이 스미고, 규연의 말이 새겨졌다.

결코 쉽지 않은 궁 생활이었고, 돌이켜 보면 고통스러운 순간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이리 떠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생각하니 마음이 헛헛했다.

규연은 활짝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화계를 빤히 바라봤다.

속이 답답해 미칠 것 같을 때면, 색색의 꽃으로 가득 찬 화계가 규연을 달래 주었다. 조금이나마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 있는,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공간이었다.

‘우리가 떠날 곳에도 저렇게 화단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전하. 꼭이요.’

화계를 보니 언이 떠올라 들리지 않을 말을 자꾸만 건네게 됐다.

“마마.”

다른 어떤 이보다 눈이 퉁퉁 부은 정 상궁이 조심스럽게 규연을 불렀다. 이제 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 상궁은 시녀상궁으로서 져야 할 책임으로 인해 규연과 함께 유배지로 떠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듣는 귀가 많아 궁에서 온전한 이야기를 전할 수 없는 탓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강화도에 도착해서는 필히 일러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미안해한 규연은 정 상궁의 손을 꽉 잡았다.

수많은 말보다 한 번의 온기가 더 많은 감정을 전했다.

“가자꾸나. 이제 떠날 때가 되었으니.”

규연은 찬찬히 통명전의 마당으로 나아갔다.

언의 교지를 들고 있는 관원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죄인, 폐서인 한씨는 무릎을 꿇고 전하의 교지를 받으시오!”

폐서인 한씨라는 말이 규연의 가슴에 박혔다.

규연은 차분하게 마당 위에 펼쳐진 자리에 올라 무릎을 꿇었다.

죄목이 줄줄이 읊어지고, 해서 중전 한씨를 폐비해 폐서인으로 삼겠다는 내용이 우렁찬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따라 나온 궁녀들은 계속 울었고, 무릎을 꿇고 앉은 규연은 계속해서 언을 떠올렸다.

이제 이 궁을 벗어나면 적어도 열흘은 언을 볼 수 없었다. 그저 마음 졸이며 거사가 성공하고, 언이 무사히 규연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폐서인 한씨는 전하께서 계신 곳을 향해 사배하시오!”

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언이 있는 방향을 향해 네 번 절을 올렸다.

한 번 한 번 절을 올릴 때마다 그리운 마음이 묻어났다.

‘무탈하게 일을 마치고 꼭 돌아오십시오, 전하. 반드시 약조를 지키셔야 합니다.’

규연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부디 언이 약조를 어기지 않기를. 부디 그가 무탈하게 돌아와 규연을 끌어안아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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