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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68)

54화

* * *

“제정신이십니까? 제정신이시냔 말입니다!”

영의정은 곧바로 중궁전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정 상궁을 내치듯 밀어 내며 침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규연의 평화를 깨부수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숙부님.”

“전하께서 폐비 교지를 내리신다 합니다. 마마께요.”

긴장한 채로 소식을 기다렸던 규연이 조금 떨리는 손으로 책을 덮었다.

언에게 충분히 이야기를 들었고, 이후에 어떤 그림이 그려질 것인지도 다 알건만, ‘폐비’라는 글자가 자꾸만 규연을 흔들었다.

“전하께서 그리 노발대발하시는 것을 보니 이미 마마께도 퍼붓고 가셨겠지요.”

규연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허공만을 바라봤다.

“별장은 어찌 되었습니까?”

“허.”

영의정을 완전히 속이기 위한 물음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상황을 알고자 던진 물음이기도 했다.

규연은 중전이라는 보호막이 있었지만, 이경은 아니었다. 언을 향한 충정과 오랜 벗을 지키려는 의리가 혹여 이경을 해치지는 않을지 걱정됐다.

“별장은 의금부에 압송되어 투옥됐습니다. 설마 이리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도 멀쩡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영의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짓고는 당장 직접 규연을 죽일 기세처럼 살기를 뿜어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제 손으로 마마의 폐비를 청하기로 했습니다. 제 이름으로 상소가 올라갈 겁니다.”

“…….”

“하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집안의 보호를 받으리라는 기대는 추호도 하지 마십시오. 마마께서 걷어차신 복입니다.”

달리 대응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영의정이 ‘보호’를 논하니 규연 역시 헛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보호라 하셨습니까?”

충동적으로 규연이 영의정을 향해 쏘아붙였다.

“제가 집안의 힘을 쓸 수 있던 건 이 자리에 오르던 순간뿐이었습니다. 딱 그 순간 한 번이요.”

“…….”

“그 뒤로는 홀로 싸워 지켜 왔던 자리입니다. 심지어는 숙부께서 제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도 피해 가면서.”

“…….”

“집안의 보호를 논하시려면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저를 도우셨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규연이 이를 악물고 이야기하자 영의정이 비릿하게 규연을 비웃고는 침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규연만 가만히 앉아 화를 다스렸다.

어차피 곧 바스러질 사내였다. 언의 손에서 죗값을 치르고 비참하게 죽을 사내였다.

규연은 부디 언의 정의가 많은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녀의 침방을 찬찬히 둘러봤다.

이제 곧 떠나야 할, 아마 다시는 오지 못할 공간이었다.

* * *

“이리 입고 나와 걸으니 옛날 생각이 납니다.”

“그래요. 나도 그러합니다.”

언과 규연은 몰래 궁 밖으로 나와 함께 길을 걸었다.

사달이 났으니 궁 안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폐비에 대한 소문이 벌써부터 스멀스멀 궁에 돌기 시작했다. 수많은 눈과 귀가 있는데, 당장 내일 교지를 내린다 해 놓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밤도 점점 뜨거워지겠네요. 이레 전까지만 해도 밤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완연한 여름이네요.”

싱그러운 녹색을 자랑하는 여러 녹음만 봐도 여름이 실감 났다. 봄밤과는 전혀 다른 온도와 색깔에 규연이 싱긋 미소 지었다.

“한데 어디로 가는 겁니까?”

“멀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워요.”

규연은 시간이 다하기 전에 언과 꼭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그에게 함께 가자고 청했다.

내일이면 교지가 내려질 테고, 모레면 궁을 떠나게 될 터였다. 혹여나 제게 불똥이 튈까 걱정하고 있는 영의정이 어떻게 해서든 빠르게 일을 끝내려 들 테니, 속전속결로 폐비가 이루어질 것이 빤했다.

그러니 언과 온전히 함께할 수 있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거사가 끝나고, 모든 것이 정리되기 전까지는 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힘들었다.

“여깁니다. 이 나무 아래 돌담길이요.”

규연이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들 아래의 돌담 앞에 멈춰 섰다.

특별할 것이 없는 곳이었다. 담 위의 나무들이 울창하고, 이파리가 유달리 푸릇푸릇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점이 없었다.

언은 왜 이곳에 오고자 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규연의 이야기를 기다리려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규연은 생각이 투명하게 보이는 진갈색 눈동자를 보며 살포시 웃었다.

“혹시 기억하세요? 전하께서 그리 떠나시기 전, 마지막으로 신첩과 했던 대화요. 기억하지 못하셔도 괜찮아요. 워낙 오래되었으니까요.”

벌써 몇 해 전의 일이니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노라 이야기했지만, 언은 규연과의 기억이라면 하나도 잊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에 나눴던 대화는 더 선연히 기억했다. 그날 주고받았던 말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지라 더 또렷이 남았다.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당장 내일 찾아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봄을 많이 좋아하나 봅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그래요? 그곳이 어디입니까?〉

〈비밀이에요.〉

〈너무합니다. 낭자만 알려고요?〉

〈네. 아직까지는요. 그렇지만 저 홀로 가지는 않을 거랍니다.〉

수줍게 웃으며 꼭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하지만 홀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얼굴을 붉히던 모습이 여전히 선연했다.

〈이전에 아버지를 기다리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 있는데, 벚꽃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거든요.〉

〈그 아름다운 곳에 같이 갈 자가 누구입니까?〉

〈이미 답을 아시지 않습니까.〉

〈직접 듣고 싶어서 그럽니다.〉

〈대감이요. 대감과 함께 가고 싶어서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은 바로 고개를 들어 나무를 살폈다. 벚나무였다. 기둥과 이파리를 보니 확실했다.

“나와 오고 싶었다던 곳입니까? 봄이 오면 나와 함께 구경하고 싶다고 했던 곳이요.”

언이 정확히 기억해 짚어 내자 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그러다 이내 언의 마음이 마냥 벅차다는 듯, 행복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봄이면 정말 흐드러지게 벚꽃이 핍니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면 꽃비가 떨어지는데, 그 비를 맞고 있으면 온 세상의 번뇌가 사라지는 것만 같아요.”

규연은 꽃이 모두 떨어지고 파릇한 이파리만 남은 나무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번 봄은 이미 지나 버렸고, 다음 봄을 기다리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으니까요.”

“…….”

“그리고 어쩌면 이다음 봄에는 우리가 한양 안에 들어올 수 없을지도 모르고요.”

왕과 중전이라는 신분도, 집안도, 모두 버리고 새사람이 되어 맞이할 봄이었다.

언과 규연이 죽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삶을 살게 될 테니 한양으로 돌아오는 일이 무척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해서 오늘 밤에 찾고 싶었습니다. 전하와 꼭 오고 싶어서요.”

“……..”

“제가 보았던 벚꽃은 사라졌고, 함께 보러 가자는 약속은 이리 한참이 지나서야 지키게 되었지만, 그래도 함께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니까.”

규연은 다시 언을 바라보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아마 오늘이 지나면 또 한동안 멀어져 있어야겠지요.”

규연이 가까이 다가오자 언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사실 조금 힘들어요. 지난 시간이 너무도 꿈같아서……. 정말 매일같이 빌었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부디 이 하루하루가 꿈이 아니기를 빌었어요.”

“…….”

“한데 이제 거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이 행복과 잠시 멀어져야 하니까. 그게 힘듭니다.”

규연은 속마음을 그대로 전했다. 언과 헤어지는 게 아쉬웠고, 동시에 두려웠다.

떠나지 않으리라고 몇 번이나 약조를 받아 두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불안함이 틈만 나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전하께서는 아쉽지 않으십니까?”

언이 내내 침묵을 지키자 규연이 넌지시 물었다.

“어찌 아쉽지 않겠습니까. 장담하는데 내가 그대보다 훨씬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을 겁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언은 그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오늘이 온전한 마지막임을 아는데, 규연보다 마음이 에일 수밖에 없었다.

“건강이 제일 중요합니다. 절대 아프지 말고, 끼니 거르지 말고. 정신없겠지만 그래도 다 챙겨야 해요. 나랑 약조하세요.”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전하께서도 그리하셔야 해요.”

언이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많이 보고 싶을 겁니다.”

아마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규연의 얼굴만 아른거릴 것이라고, 언은 확신했다.

“규연.”

중전도, 그대라는 말도 아닌 이름이 흘러나오자 규연의 눈이 커졌다.

“꼭 이름으로 한 번 불러 보고 싶었습니다. 고운 이름이니까.”

언은 규연을 조금 더 바짝 끌어안으며 그녀의 모습을 천천히 눈에 아로새겼다.

환한 달 아래, 녹음이 우거진 나무 옆에서 살랑거리는 여름의 산들바람을 느끼며 규연을 끌어안고 있는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사랑해요.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언의 나지막한 고백에 규연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마냥 행복하기만 한 고백이건만, 분명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닿아 온 밀어건만, 이상하게 듣자마자 눈물이 고였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소리 내 약조해 주세요. 신첩에게 돌아오시겠노라고. 아무 일 없이, 아무 탈 없이, 제가 기다리는 곳으로 웃으며 찾아오실 것이라고.”

규연이 언의 팔을 꽉 붙잡고 다시 청했다.

언의 고백이 꼭 마지막 말처럼 느껴져서, 몇 번이고 다시 확인받고 싶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약조해요.”

언은 영원히 지키지 못할 약조를 또 한 번 건네고는 그대로 규연에게 입을 맞췄다.

한없이 달고, 또 한없이 쓴, 마지막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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