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 * *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날이 밝은 뒤, 규연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언은 이내 그녀를 떠나보낸 뒤 이경을 찾았다.
“왜 불렀는지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 전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이었다. 언은 오늘 영의정을 불러 규연의 폐비를 논하고자 했다. 그러니 이경은 오늘로 중전과 사통한 사내가 될 터였다.
“중전에게는 일러두었다.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면 강화도에서 어찌해야 하는지, 네가 언제 찾아가는지.”
강화도에 유배된 규연이 죽은 것처럼 꾸미고, 함께 보성사로 데려오는 게 이경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하게 모셔가겠습니다.”
이경은 단호한 목소리로 제법 비장하게 대답했다.
언은 그런 이경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를 마주했다.
규연 못지않게 언 역시 이경과의 인연이 깊었다. 한참 어린 대군 시절부터 그의 곁을 지켜 주었던 벗이다. 이경이 함께였기에 가면 너머의 그림을 훨씬 수월하게 그리고, 또 훨씬 쉽게 이뤄 낼 수 있었다.
“이경아.”
“예, 전하.”
“미안하구나. 네게 이런 일을 맡겨서.”
이경이 워낙 강경하게 그대로 진행해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휼의 세상이 찾아오면 전부 사라질 죄목임을 알기에 허락했지만 그래도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규연에게도, 이경에게도, 여러모로 큰 짐을 지우며 죄를 짓는 듯한 기분이 들어 언의 마음이 무거웠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전하. 한 번에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았습니까. 소신이 말씀드린 것이기도 하고요. 괘념치 마십시오.”
어쨌든 옥으로 끌려갈 테고, 아무 죄도 짓지 않았건만 죄인처럼 유배지로 이송될 터였다. 티 없이 깨끗한 사내의 백지에 핏빛 얼룩을 만드는 듯해 참 미안했다.
“고맙구나. 늘.”
“소신이 감읍할 따름이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이경의 말은 진심이었다.
사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차라리 언이 못난 사내였다면, 별 볼 일 없는 치였다면, 이경은 규연을 붙잡고 제발 그 사내 대신 나를 사랑하라며 투정이라도 부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언은 이경이 보기에도 흠모할 수밖에 없는 사내였고, 이경 역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규연이 사랑하는 사내가 언이었기에, 이경의 마음은 더 고달팠다.
“이경아.”
“예, 전하.”
“나와의 약조 기억하느냐.”
잠시 침묵을 지켰던 언이 나지막이 물었다.
“예, 전하. 기억합니다.”
“지켜 다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 다오. 네게 이것 하나만 더 청하마.”
언이 떠나고 나면 꼭 규연을 지켜 달라는 게 그의 청이었다.
오래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언은 항상 규연의 안전을 이경에게 부탁하고는 했다.
“예, 전하. 그리하겠습니다.”
언은 부드럽게 웃으며 이경의 어깨를 두드린 뒤, 편전을 향해 발을 옮겼다.
침전에 홀로 남은 이경은 두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언이 청한 대로, 그는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규연을 지키고자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규연만은 온전히 보호할 생각이었다.
‘하나 영원히 마음은 얻지 못하겠지요.’
씁쓸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전하께서는 떠나시고 나면 마마께서 전하를 잊으시리라 믿으시지만, 소신은 믿지 않습니다, 전하.’
언이 더 이상 규연을 밀어내지 않고 품기 시작하자 이경이 기억하는 옛날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아름답게 활짝 피어나는 규연의 모습을 보고 나니 새삼 또 깨달았다.
규연은 절대 언이 아닌 자에게 마음을 내어 주지 않을 것이다.
* * *
“참으로 오랜만에 소신을 찾으셨습니다, 전하.”
“그런가?”
“예. 자주 불러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중전마마를 만나시느라 조정에 소홀하신 것이라 하니 소신은 그저 활짝 웃게 됩니다.”
영의정은 편전으로 들자마자 요 근래의 일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 늘어놓았다.
“본래 나라의 본인 두 분께서 금슬이 좋으셔야 나라가 평안하지 않겠사옵니까. 참으로 다행입니다, 전하.”
규연에게 총애가 쏟아지는 것은, 영의정에게 한없는 이득이었다. 이를 알기에 신이 난 모습을 보니 언의 속에서 헛웃음이 차올랐다.
“매일 밤 마마를 찾으신다지요? 하니 곧 즐거운 소식이 들리겠사옵니다. 벌써부터 경하스럽습니다.”
언은 쉬지 않고 떠드는 영의정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표정을 굳히고 그의 앞에 상소문 하나를 툭 던졌다.
“……이것이 무엇인지요?”
“읽어 보거라.”
싱글벙글하던 영의정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바닥에 내던져진 상소를 주워 들고는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글을 읽을수록 영의정은 사색이 됐다.
“어떤가? 무슨 생각이 드는지 영상이 내게 한번 말해 보게.”
“송구하오나 전하. 본래 전하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는 여인에게는 끝없는 모함과…….”
“나도 그런 것이길 바랐지. 누군가의 음모이길 바랐다는 말일세.”
언은 증좌를 모아 적어 둔 상서를 하나 더 던졌다.
“궁으로 들어오기 이전처럼 중전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네. 그리되었다고 여겼어. 한데 그 많은 증좌가 보이는가?”
“…….”
“궁인들을 잡아 모두 조사했네. 전부 실토했어. 중전이 틈만 나면 별장을 만났더군.”
“…….”
“참으로 우습지. 고분고분해져 내 마음을 청하는 중전이 반가워 품에 안았는데, 돌아온 것이 사통이라는 사실이.”
조작된 자료였다. 그러나 거짓임을 전혀 알 수 없게 치밀하게 꾸며진 증거였다.
영의정은 혹여나 무슨 틈이라도 보일까 상서를 계속해서 살폈다. 그러나 어떤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규연과 이경의 사통을 너무 상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폐비 교지를 내릴 걸세.”
“전하!”
영의정이 다급하게 언을 불렀다.
누구보다도 영의정이 앞서 규연을 내치려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규연의 배 속에 있는 언의 씨에 많은 것을 걸고 있었다. 이미 여러 일을 벌일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게다가 성빈을 향한 주상의 관심도 사그라들었기에 다른 대체재가 없었다.
지금은 규연이 중전의 자리를 지키게 해야 했다.
영의정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어떻게 해야 규연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생각해내야 했다.
‘설마 아직 중전의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가? 중전이 이미 말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영의정은 규연이 직접 알아채기 전까지는 말하지 말라며 어의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일찍 아이를 잃는 일이 많았다. 만일 어의가 먼저 말해 온 세상이 규연의 회임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얼마 안 가 유산이라도 되었다가는 규연의 입지에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알아채고도 감추고 있다고 여겼건만. 설마 알아채지 못했다고?’
달거리가 끊겼을 터였다. 영의정은 규연이 이를 모를 리 없다고 확신했다. 더군다나 요 며칠은 언이 밤마다 들고 있었다.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감추고 있다면 말씀드려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야.’
제 씨앗을 품고 있는 여인을 내칠 리는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주상의 위치에 있는 자이니 더더욱 그러했다.
“전하. 마마께 아무런 말씀도 못 들으셨는지요?”
영의정이 다급하게 말을 꺼낸 순간, 언은 그의 낚시가 성공했음을 감지했다.
“혹여나 일찍 여읠까 두려워 말씀하시지 않았나 봅니다. 하나 소신에게는 전하셨지요. 지금 마마께서는 배 속에 전하의 아이를 품고 계십니다. 원자일지 모르는 아기가 마마의 태에 있습니다.”
언이 예상한 대로, 영의정은 규연이 파 둔 함정에 발을 디뎠다. 그 밑이 깊은 구덩이인 줄 모르고, 곧 깊이 추락하리라는 것을 모르고, 허를 찔렀다며 뿌듯해하는 모양새가 참 우스웠다.
“언제부터?”
“두 달쯤 되었지요. 하니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오로지 원자를…….”
“나는 그 전에 중전을 안은 적 없습니다.”
“……예?”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영의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여유를 잃고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영상이 약을 풀어 냈던 그 밤에 중전을 안고, 그 뒤로 한동안 중전을 안은 적 없다고.”
“하, 하나 분명 이전에 마마의 침전에 드시어…….”
“아침에 밖으로 나왔을 뿐, 안지 않았네.”
영의정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고, 언은 끓어오르는 화를 달래려는 척 주먹을 꽉 쥐었다.
규연이 사통한 사실에 분노하는, 심지어 배 속에 다른 사내의 아이를 품었다는 사실에 격노하는 모양새를 만들어 내야 했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언은 고함을 지르며 편전의 온갖 물건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규연을 가까이하면서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광증에 가까운 소음이 들리자 상선이 다급하게 달려와 언을 말리려 했다. 그러나 언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전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뒤, 씩씩거리며 영의정을 쳐다봤다.
“영상 덕에 내 모르고 있던 사실까지 알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중전의 배 속에 별장의 씨가 자라고 있다 이겁니까? 이를 알아채지 못했으면 그 아이가 왕의 피를 이어받은 원자처럼 꾸며지고?”
영의정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묘수라 여겼던 수가 최악의 수였다. 차라리 회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건만, 일이 엉망이 됐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구나. 왕의 씨앗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입을 닫고 있었던 게야.’
왜 규연이 언에게 말하지 않았는지까지 이유가 딱딱 맞아 들자 영의정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종묘사직을 기만하는 행위네. 감히……. 어디 감히!”
언이 언성을 높이자 영의정이 잠시 눈을 감았다. 언의 말이 맞았다. 중전이 다른 사내의 아이를 가졌다면, 이는 쉽게 가라앉을 일이 아니었다.
“어디 한번 말해 보게. 이래도 폐비 교지를 내리지 말라 할 겐가? 이 발칙한 일의 배후에 영상 자네가 있다 여겨도 돼?”
언은 가쁜 숨을 내쉬며 영의정에게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전하. 질녀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소신의 불찰입니다. 하니 소신이 책임지고 중전을 폐비시키시라 상소를 올리겠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영의정은 누구보다 빠르게 태세를 바꿔 넙죽 엎드려 절했다.
얼마든지 사람을 끊어 내고 버릴 수 있는 이였다. 오로지 자신의 목숨과 명예만이 중요한 자기도 했다.
언은 그런 영의정이 참으로 역겹다고 생각하며 남아 있는 도자기 하나를 그의 옆으로 내던졌다.
백자가 와장창 깨지며 생긴 파편 하나가 엎드려 있는 영의정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부디 거사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저런 생채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죗값이 영의정을 후려치기를. 언은 바라고 또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