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 *
“점점 해가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아직 하지가 멀었는데, 앞으로 더 길어지겠어요.”
언의 말에 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밤이 깊으면 어둠이 찾아오네요. 해가 아무리 길어져도요.”
곧 해시(* 오후 9시-오후 11시)를 알리는 종이 칠 터였다.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은 여름밤이 반갑다는 듯, 규연이 싱긋 웃으며 언을 바라봤다.
언 역시 규연을 따라 미소 짓고는 별이 가득 수놓인 밤하늘을 잠시 바라봤다.
“별이 많이 뜬 밤이네요. 이렇게나 별로 가득 찬 하늘은 오랜만인 듯한데.”
“와…….”
찬찬히 별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규연이 고개를 꺾어 한참이나 별을 바라봤다.
꼭 별을 처음 본 어린아이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언이 작게 웃고 말았다.
“어찌 웃으세요?”
“그대가 귀여워서요.”
낯간지러운 말에 규연의 얼굴이 화르르 타올랐다.
이제 적응이 될 법도 하건만, 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하는 달콤한 말은 매번 규연의 얼굴을 붉혔다.
“하나 별보다 더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늦은 밤에 이곳 애련지로 향한 건, 다름 아닌 언의 청이었다.
“별보다 귀한 것이라니 여간 기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규연이 일부러 더 과장하며 기대를 드러냈다. 언을 살짝 놀리기 위함이었다.
언은 짓궂은 규연을 보며 피식 웃고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허락된 시간만이라도 규연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그의 다짐은 한동안 규연이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아 주었다.
몇 해 전 언이 보았던 대로, 밝고 생기 넘치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돌아와 언을 마주했다.
사랑받는 여인이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듯, 규연은 하루가 다르게 더 고와져 언의 눈에 아른거렸다.
“여기 잠깐만 멈춰 서세요.”
“여기서요? 아직 애련지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 하는데요?”
“압니다. 그래서 멈추라는 겁니다. 여기부터는 보아서는 안 되니까.”
“무엇을 준비하셨기에…….”
“직접 보세요. 그곳까지 가서.”
언은 규연의 뒤로 가서 그녀의 눈을 가렸다.
큰 손이 눈을 가리자 규연이 그녀를 가린 언의 손을 붙잡았다.
“보이지 않은 채로 걸으려니 무섭습니다.”
“내가 뒤에 있어 넘어지지 않을 겁니다. 나를 믿고 앞으로 걸어가요.”
규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언은 혹여나 그녀가 발을 헛디디기라도 할까 무척 마음 쓰며 천천히 연못 앞으로 다가갔다.
“아직인가요?”
어둠에 갇힌 채로 앞으로 걸으니 감각이 아득해졌다. 한참 앞으로 나아간 것 같은데, 아직도 멈춰 서지 않으니 괜히 마음이 답답했다.
“다 되었습니다. 이제 멈춰 서요.”
마침 언이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규연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손을 뗄 테니 셋을 세고 눈을 뜨세요.”
언이 손을 떼고, 규연은 착실하게 셋을 셌다.
“아……. 세상에…….”
꼭 감겼던 눈을 뜬 순간, 규연은 그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감탄사를 뱉어 냈다.
아직 꽃봉오리만 맺혀 있는 연못 위로 수많은 연등이 환히 빛을 뿜으며 둥둥 떠 있었다.
지독히도 황홀한 장관이었다. 초를 품은 연등이 분홍빛으로 타오르고, 물결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이며 빛나는데, 짙은 어둠과 어우러져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별보다 더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언을 바라봤다.
“연꽃이 피려면 아직 한두 달이 더 있어야 합니다. 때가 되지 않았어요.”
“…….”
“한데 그대와 꼭 연꽃을 보고 싶어서 등을 띄웠습니다. 생화처럼 싱싱하지는 않지만, 이리 아름답고 환하게 빛내는 모습을 그대와 함께 즐기고 싶었어요.”
애련지의 연꽃이 만개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고민하던 언은 연못 위에 연등을 띄웠다. 이렇게라도 규연과 함께 여름꽃을 즐기고 싶었다.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시간이니, 조금 이르게라도 기회를 붙잡고 싶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신첩이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절경보다도 아름다워요.”
규연은 진심을 다해 언에게 이야기했다. 아부를 위한 헛소리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절경이었다. 밤하늘을 머금은 호수 위로 흩어지는 연등의 빛이 규연의 가슴을 뛰게 했다.
“고운 기억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고운 기억으로 남겠지요. 넘치도록 행복한 기억으로요.”
규연은 어찌 그리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단호히 대답하고는 언을 끌어안았다.
두 팔이 언의 목을 감싸고, 언의 팔이 규연의 허리에 감긴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언이 피워 낸 호수 위의 빛나는 연꽃을 배경으로, 더없이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졌다.
* * *
애련지에서부터 손을 꼭 잡은 채, 달려오듯 규연의 침전으로 돌아온 둘은 침방의 문이 닫히자마자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규연의 숨을 모조리 훔쳐 올 것처럼 입술을 놓아주지 않던 언의 손이 자연스레 옷고름을 풀어내고, 규연은 맨살에 닿아 오는 서늘한 공기를 느끼며 언에게 바짝 매달렸다.
“전하…….”
숨이 가빴던 규연이 언을 살짝 밀어내며 그를 불렀다. 이성의 끈이 뚝 끊어져 살짝 풀린 눈이 규연을 마주했다.
처음 안기는 것도 아니건만,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쳤다. 어느새 몸을 가리는 옷가지가 전부 사라지고 새하얀 나신으로 언을 마주하고 있는데,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자꾸만 얼굴을 가리게 됐다.
“왜 가립니까.”
당연히 언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규연의 손을 치워 내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언의 입술이 닿지 않는 곳도, 언의 손이 간질이지 않는 곳도 없었다. 꼭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감각에 규연의 정신이 몽롱해졌다.
문득 언에게 처음 안기던 밤이 떠올랐다.
영의정이 쓴 미약 때문에 몸이 엉망인 채로 안겼던 밤이었다. 그 후로도 전혀 규연을 찾지 않은 언 때문에 오로지 규연의 마음에만 남았다고, 그는 다 잊어버렸다고 여긴 밤이기도 했다.
“전하.”
“그날 밤을 말하려 합니까?”
규연이 잠시 다른 세상으로 떠난 것을 알아챈 언이 그녀의 귀를 살짝 깨물며 물었다.
들켜 버린 규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자 언이 피식 웃고는 규연과 눈을 맞췄다.
“그대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고, 장소도 기루였기에 내게는 그저 한스러운 밤이었습니다. 그대를 그런 곳에서, 그런 식으로 처음 안고 싶지 않았으니까.”
“…….”
“한 번도 잊은 적 없습니다. 어찌 그 밤을 잊을까요. 내 품에 안겨 오던 그대의 열기를 어찌 잊겠습니까.”
“…….”
“하나 그대가 잊어 달라 청하면 얼마든지 잊을 겁니다. 그대에게 상처로 남은 밤이면, 전부 지워 낼 거예요.”
규연이 무엇을 물으려는지 다 꿰뚫어 본 뒤,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답을 그대로 전해주는 언 때문에 안 그래도 벅찼던 마음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쏟아지는 자극 때문에 이미 눈가가 젖어 있었건만, 떨리는 마음이 자아낸 눈물이 또 규연의 시야를 가렸다.
“너무도 괴로웠던 밤이지만, 잊으시는 건 싫습니다. 그냥……. 전하께 무엇이든 잊히고 싶지 않아요.”
언은 너무나도 다정한 눈으로 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진하게 입을 맞추고, 곳곳을 어루만지고, 이내 몸을 섞었다.
순식간에 열기가 침방을 뒤덮고, 서로를 찾던 목소리는 형체를 잃고 신음으로 변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서로에게 매달려 온기를 청하던 몸짓은 어둠이 어스름으로 변하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언에게 완전히 취해 버린 규연은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언의 품에 파고들었다.
언은 제 품에 안겨 오는 규연의 부드러운 감촉에 미소 지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감각에 규연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소리가 뭉개져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흘.’
규연의 등을 토닥이던 언이 둘에게 주어진 유예를 떠올렸다.
그래도 제법 남았다고 생각했던 시간은 유달리 빠르게 흘러갔다.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하루가 가는 듯했다.
아직도 모자랐다. 규연에게 해 주지 못한 것도 너무 많았고, 더 마음껏 안지도 또 더 마음껏 입 맞추지도 못했다.
그런데 주어진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언은 당장 내일이면 영의정을 불러 규연의 폐비를 논해야 했고, 그 뒤로 또 사흘이 지나면, 규연은 영영 이 궁을 떠나야 했다.
‘시간을 멈출 방법을 알면 좋으련만.’
간절했다. 이 시간에 영원히 갇혀 있을 수 있다면, 그저 이렇게 규연을 안고 있을 수만 있다면, 언은 무엇이든 바쳐 얻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언은 규연을 놓아주어야 했고, 규연은 곧 언의 거짓말을 깨달을 터였다.
‘미안합니다. 이리 만들어 버려서. 너무 미안해요.’
차마 닿지 못할 마음을 전하며 언이 규연을 더 꽉 끌어안았다.
언은 규연을 안고서 하늘에게 빌고 또 빌었다.
부디 또 한 번의 기회가 있다면, 그 기회가 언에게 허락된다면, 한 번만 규연을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그때는 언이 쏟아부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퍼부어 규연을 웃게 할 자신 있으니, 부디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언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