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 *
“어찌 그리 음흉한 눈으로 쳐다봐?”
“음흉한 눈이라니요. 그리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마마.”
정 상궁이 너스레를 떨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규연은 작게 웃고는 정 상궁을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
“말씀해 보십시오, 마마. 어찌 그리 사이가 좋아지셨는지요.”
언이 규연과 함께 궁을 거닐기 시작하면서 궁이 발칵 뒤집혔다.
언과 규연이 그간 어떤 관계였는지 모르는 궁인이 없었다. 그런데 언이 문을 걸어 잠갔던 날 규연이 그 벽을 뚫었던 이후로 둘 사이가 완전히 달라졌으니, 너도나도 신기해하며 말을 얹었다.
가장 놀란 건 규연 곁에 있는 정 상궁이었다.
항상 언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상전의 모습을 마냥 안타까워했던 정 상궁으로서는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마주한 상전이 벽해된 상황이 마냥 얼떨떨했다.
“오해가 풀린 것이지. 해서 쉽게 마음이 열린 게고.”
“그것이 전부입니까?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바뀐 것처럼 변하셨는데, 그것이 전부여요?”
“원래 남녀 사이의 일은 함부로 옮기는 게 아닐세.”
조금은 짓궂은 말에 정 상궁이 허허 소리 내며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마. 주상 전하께서 납시었사옵니다.”
무어라 더 말을 건네려던 정 상궁은 언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얼른 입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으로 모시게.”
언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규연을 보고 있으니, 굳이 이유를 더 캐묻고 싶지도 않아졌다.
많이 아파하던 여인이 저렇게나 환히 웃을 수만 있다면, 봄 햇볕처럼 따뜻하고 싱그러운 여인이 그 색을 닮은 미소를 지금처럼 머금을 수만 있다면, 정 상궁은 어떤 이유든 다 좋았다.
* * *
“기껏 달려왔더니 이리 얼굴 한 번 안 보여 줄 줄이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얼마든지 보실 수 있는걸요?”
“하지만 그대 눈은 계속 책을 향해 있지 않습니까?”
언의 푸념에 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규연은 지금 언의 품에 등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언의 두 팔이 규연의 허리를 꽉 감싸 안았다.
“이리 전하께 안겨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게 해 준다고 하셨던 것은 전하신걸요?”
“내 입이 방정입니다.”
이리될 줄 몰랐다며 진심으로 후회하는 듯한 목소리에 규연이 또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조금의 걱정도 묻어나지 않는 해맑은 웃음소리가 언의 마음을 간질였다. 그는 규연을 더 꼭 끌어안으며 가느다란 목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직 은장도가 만든 상처가 남아 있었다. 언은 그의 입맞춤이 상처를 치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살짝 덮인 면포 위에 제 입술을 묻었다.
간질거리는 입맞춤에 규연이 살짝 몸을 바르작거렸다.
“요즘 궁 안이 우리 때문에 시끄럽다는 이야기 들었습니까?”
“들었습니다.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언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과 규연의 사이가 급격하게 좋아지자 궁인들이 너도나도 말을 옮기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주상이 드디어 중전에게 마음을 내어 주었는데, 성빈을 아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애정을 쏟아 내는 게 보여 모두가 눈을 의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하나.
여전히 정사를 돌보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안하무인인 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양귀비 대신 중전에게 취해 있는 모양이니 차라리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둘.
굳게 닫혔던 편전의 문을 열고 들어간 날부터 사이가 달라졌으니 그날 분명 무언가 있었을 것이라며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저마다 추리를 쏟아내는 게 셋이었다.
“말이 퍼지기 시작하니 오늘 이른 아침에 숙부가 찾아왔습니다.”
“영상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는데, 소문이 진짜인지 살펴보려는 것 같더군요. 혹시 신첩이 또 중전의 자리를 탐하느라 수를 쓴 게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했어요.”
영의정은 누구보다 빠르게 흐름을 읽어 내는 자였다. 한껏 날을 세우며 눈을 흘기던 기억이 생생한데, 언이 규연에게 다시 마음을 보이고 있노라는 소문이 퍼지자 훨씬 너그러워진 태도로 중궁전을 찾았다.
“신첩의 배 속에 전하의 아이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으니 아마 지금 상황을 무척 흡족해할 겁니다.”
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상황은 영의정에게 이득이면 이득이었지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아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말을 이으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규연이 책을 덮고 몸을 돌려 언을 바라봤다.
“신첩이 항상 꿈꾸던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전하를 닮은 아이 하나, 신첩을 닮은 아이 하나, 그리고 우리 둘을 꼭 반반씩 빼닮은 아이 하나를 낳는 것이요.”
규연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 환히 웃으며 언을 바라봤다.
“우리가 이 궁을 나가서 그곳에 머물게 되면, 꼭 그렇게 살아가요. 빼닮은 아이들을 낳고, 마냥 행복하게요.”
절대 얻지 못할 미래를 그리며 행복해하는 규연 앞에서 언의 마음이 다시 또 무너져 내렸다.
“……그래요. 그리합시다.”
또 한 번, 거짓과 죄가 쌓였다.
* * *
이경은 날카로운 눈매로 훈련하는 병사들을 살폈다.
언이 계획한 대로, 흑의적은 휼에게 찾아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우두머리인 이경과 윤성을 필두로 모두 함께해 새 주군을 맞이했다.
언을 내치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준비하던 휼에게는 말 그대로 넝쿨째 들어온 복이었다.
휼은 갑작스러운 행운을 경계했으나 이경과 윤성이 그리는 미래와 그들의 능력, 그리고 성정과 기운을 느끼고는 흑의적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언이 원하던 대로 그림이 완성되어 갔고, 이경은 틈이 나는 대로 휼의 군대를 살폈다. ‘눈밭’이라 불렸던 요새는 이제 텅 비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증거와 정보가 휼의 공간으로 넘어왔다.
“……자가?”
이경이 새로운 공간과 주인에게 적응하며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익숙한 형상이 이경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훈련을 계속하라 명한 뒤, 서혜처럼 보이는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
이경의 한마디에 등을 돌리고 있던 서혜가 몸을 돌렸다. 녹색 쓰개치마를 두르고 있던 그녀는 이경을 보자마자 눈을 빛냈다.
“어찌 궁에 계시지 않고 이곳까지 나오신 겁니까?”
“잊었나 본데, 나도 흑의적의 일원입니다. 동료들이 잘 지내는지 보러 온 것이지요.”
“동료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나 궁에서 이곳으로 나오시기엔 길이 너무 멀지 않습니까. 혹여나 뒤를 밟히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미행을 살피는 일도, 미행이 붙지 않게 그림자를 따돌리는 것도, 전부 별장에게 배웠습니다. 본인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겝니까? 나는 그대로 배워 두었는데.”
이경은 항상 서혜를 이기지 못했다. 서혜는 한마디 지는 법이 없었으니까. 이경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작게 웃자 서혜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무슨 연유로 오신 겁니까?”
“……별장에게 물을 것이 있어서요.”
서혜가 먼 길을 나선 건 다름 아닌 이경 때문이었다. 뒤늦게 전해 들은 소식에 너무 놀라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정말입니까? 중전마마를 폐비시키는 명목이 별장과의 사통이라는 사실이?”
다른 것도 아니고 사통이었다. 거짓이고, 휼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깨끗이 사라질 죄목이라 해도, 무척이나 치욕스러운 족쇄였다.
“저 역시 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니까요. 이 방법이 가장 확실했습니다. 마마와 저는 어릴 적의 연도 있으니 세상의 눈을 속이기도 더 수월하고요.”
“혹 사통이 무엇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분명 흠이 될 겁니다. 누명임이 밝혀질 것도 알고, 대군께서 왕위에 오르시면 흔적도 없이 지우실 죄임을 알지만, 그래도 사통이라니요!”
서혜는 이경을 잘 알았다. 그는 누구보다 충직한 무관이었고, 이 어지러운 시대에 깨끗한 삶을 지키며 살아온 족적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자였다.
사통이라는 글자가 달가울 리 없었다. 아마 평소의 그였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작전이었다.
‘마마시기에 받아들이셨겠지. 중전마마시니까.’
오로지 규연이기에. 규연과의 일이기에 받아들였을 것이 뻔했다.
“자가께서 저를 얼마나 생각해 주시는지 압니다. 친오라비처럼 마음 써 주시는 것 잘 알아요. 하나 이리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이리되면 마마를 더 온전히 지켜 드릴 수 있으니까요. 언제 영의정이 수를 쓸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하니 제가 직접 마마를 모시는 것이 낫습니다.”
지독한 얼룩이 될 일이건만, 이경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반기고 있는 티가 났다. 규연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고, 그녀를 가까이서 지킬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눈치였다.
‘그래. 항상 나만 우스워지지.’
이 그림을 왜 받아들인 것이냐며 따지기 위해 찾아왔건만. 혹여나 이경이 억지로 떠안은 것이라면 언에게 그림을 다시 그려 보자며 설득하겠다고 말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건만.
언이 규연을 총애하고 있다는 소문이 궁 안에 가득 퍼진 상황에서도 규연을 놓지 못하는 이경을 보고 있으려니 서혜의 마음이 한없이 비참해졌다.
“나는 마마가 참 부럽습니다.”
“예?”
무척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탓에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이경이 못 들었다며 다시 물었다.
서혜는 몇 번 고개를 젓고는 이만 물러가겠다며 등을 돌렸다.
거사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찢기는 건 언뿐이 아니었다.
엇갈려 버린 연정의 방향은, 서혜의 마음도 넝마처럼 해어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