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 *
대비가 급히 규연을 찾은 탓에 정자에서의 이야기는 길어지지 못했다.
결국 언의 뜻만 전해진 채로 규연이 경춘전으로 향했다. 연회의 충격에서 회복한 대비는 기력이 돌아왔는지 또 규연의 속을 긁었다.
여느 때라면 규연의 마음이 착잡하게 가라앉았겠지만, 오늘은 규연의 머릿속에 ‘폐비’라는 글자만 둥둥 떠 있었던 탓에 대비가 무슨 말을 건넸는지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규연은 이후로도 내내 멍한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보다 못한 정 상궁이 무슨 일이 있으시냐며 물어 올 정도였다.
그러나 규연은 그저 피곤할 뿐이라고 둘러대고는 언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는 몇 가지 일을 처리하느라 해가 지고 나서야 규연의 침전에 들 수 있었다.
“전부 물러가거라. 전각 앞에서 열 보씩 떨어지도록.”
“예, 전하.”
언은 침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위의 궁인들을 물렸다. 단순히 밖으로만 밀어내는 게 아니라 아무도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하도록 아주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정 상궁과 상선을 포함한 모든 궁인들이 통명전에서 멀어지자 언이 규연을 마주 보고 앉았다.
“대비께서는 그대를 어찌 찾으셨습니까?”
“아……. 내명부를 잘 관리해야 한다고 조언하셨던 것 같은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듣지 못했습니다.”
머릿속에 남은 것이 없으니 말을 지어낼 수도 없었다. 규연은 솔직히 상태를 전했고, 그 안에 비치는 심란함을 읽은 언은 조금 착잡한 마음으로 규연을 바라봤다.
“미안합니다. 내내 심란했을 터인데, 하필 시간이 이리되어 버려서.”
언은 둘 사이에 놓인 주안상을 밀어내고, 규연을 그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오로지 둘만 남은 공간이 되자 규연 역시 낮과 달리 크게 수줍어하지 않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뜻이 있으신 것이겠지요.”
규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대가 얼마나 이 자리에 욕심이 큰지 압니다. 얼마나 힘들게 지켜 왔는지도 잘 알고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압니다.”
사실이었다. 규연이 어떤 마음으로 버텨왔는지는, 언이 너무나도 잘 알았다.
“하나 나는 그대를 지켜야 해요. 궁에 피바람이 분 이후를 생각해야 합니다.”
언이 규연을 폐비시키려는 이유는 오로지 그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것만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그대는 영상의 질녀입니다. 영상을 내치면, 그 화가 무조건 미치게 되어 있어요.”
“…….”
“영상은 극형을 받고 부관참시 될 겁니다. 그 조건을 갖추었고, 그리되도록 내가 증좌를 모아 놨으니까. 반드시 그리되어 중죄인으로 남을 겁니다.”
“…….”
“그 순간에 그대는 궁에 있으면 안 돼요. 영상의 일족으로 묶여서는 안 됩니다.”
영의정이 도려내지는 순간에 규연이 궁에 머문다면, 규연은 영의정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그대는 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영의정의 끈을 끊어 내야 해요.”
“하나 폐비된다 한들, 숙부가 처형되고 나면 신첩 또한 형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그전에 죽은 자가 되어야지요.”
규연이 크게 놀라며 언을 바라봤다.
“죽은 척 꾸며 낼 겁니다. 폐비당한 그대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꾸밀 거예요. 아무런 화도 입지 않고 잘 피해 갈 수 있도록, 그리 만들 겁니다. 이를 위해 폐비가 필요해요.”
언은 규연이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살아가길 원했다.
폐비된 중전이라는 신분도 남지 않고,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던 간신배의 질녀라는 흉도 남지 않고, 온전히 규연으로서 남아 원하는 대로 살아가길 바랐다.
“강화도로 유배되는 것처럼 꾸밀 테지만, 자결한 것으로 속인 뒤 그대를 보성사로 옮길 겁니다.”
“보성사요?”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까. 내가 살피기도 편하고요. 일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다가 다 성공하고 나면 미리 준비해 둔 저택으로 옮겨 갈 거예요. 그곳이 거처가 될 겁니다.”
언은 규연이 여생을 보낼 큰 집과 넉넉한 돈을 모두 마련해 두었다. 무엇을 하려 하든, 다 할 수 있을 만큼 챙겨 놓았다.
“하면 전하께서도 그곳으로 오시는 겁니까?”
진지한 표정으로 유심히 이야기를 듣던 규연이 언을 짚어 냈다.
규연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언이었다. 언이 그녀의 곁으로 돌아오는 시점을 알아야 했다.
“그래요. 맞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살 겁니다. 나도, 그대도, 본래 타고난 이름으로는 살 수 없겠지만.”
거짓이었다. 그곳은 규연이 살아갈 곳이었지, 언에게 허락된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어떤 이름으로 살아가든, 어떤 신분으로 살아가든 상관없어요. 전하께서만 곁을 지켜 주시면 됩니다. 그것이면 돼요.”
규연은 진심을 가득 담아 이야기했다.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언만 그녀 곁에 남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규연의 손을 잡았다.
“한데 무엇을 명목으로 폐비 교지를 내리실 것인지요? 신첩이 수를 써서 숙부를 속여 놓은 탓에 아직도 제가 회임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배 속에 용종이 있다 생각하니 어떻게 해서든 폐비를 막으려 들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하나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으니까. 그대가 그리 수를 써 준 덕에 훨씬 쉬워졌습니다.”
회임을 역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이미 그림을 그려 둔 상태였다. 영의정의 반대를 꺾는 것도, 폐비 교지를 내리는 것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명목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을 겁니다. 하나 한 번에 일을 처리하려면 이게 최선이에요.”
“명목이 무엇인데요?”
“그대와 이경이 사통한 것으로 꾸며 낼 겁니다.”
규연의 눈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상상도 못 한 이유였으니 당연했다.
“이경은 흑의적의 우두머리입니다. 이 거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고, 이후에도 휼의 손발이 될 거예요.”
“하면 이런 오명이 씌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오명은 휼이 왕위에 오르는 순간 깨끗하게 씻겨 흔적도 남지 않을 겁니다. 모든 게 다 복권될 것이고요. 내가 원하는 건 이경이 잠시나마 감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언은 차분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궁에 있는 온전한 내 사람으로 유일하게 남은 자가 이경입니다. 모두가 폭군을 진심으로 호위하는 별장을 알아요. 영상도, 이판도, 다른 많은 이들도 늘 이경을 주시합니다.”
“…….”
“하나 거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이경이 지금보다 자유로워져야 해요.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하는데, 궁에 묶여 있으면 시간이 더뎌집니다. 들킬 위험도 커지고요.”
이경은 거사의 핵심이었다.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고, 책임 역시 막중했다. 거사 직전까지는 거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똑같이 강화도로 보내질 겁니다. 이경 역시 그대처럼 똑같이 꾸며질 거예요. 충정을 의심받아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며 유서를 남기고 사라진 것으로 할 겁니다. 그의 성정을 아는 이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
“잘 숨고 나면 이경이 그대를 데리러 갈 거예요. 보성사로 데려가는 것도, 그 뒤로 틈나는 족족 그대를 지키는 것도, 이경이 맡을 겁니다.”
이경은 언이 가장 신뢰하는 자였다. 그래서 언은 이경에게 규연을 맡기려 했다.
“이경도 이 계획에 대해 다 아는지요?”
“압니다. 함께 계획을 세웠으니까요.”
혹 이경에게 짐이 되는 일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을 때, 언이 이경 역시 이 모든 일을 안다고 이야기했다.
소리 높여 규연을 살피겠다고 주장했던 건 다름 아닌 이경이었다. 언 역시 이 일의 여파를 다소 걱정했으나 이경이 너무나도 강경하게 이리 꾸며야 한다고 말해 그대로 밀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대도 잘 알겠지만, 너무나도 뛰어난 자입니다. 분명 잘 지킬 것입니다. 그대가 조금도 불안하지 않게요.”
“물론입니다. 아주 오래 지켜본 벗이니까요. 신첩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만?”
“전하께서는요? 이경이 별장에서 물러나면 더 많은 이가 전하의 목숨을 노릴 게 빤해요. 전하가 염려됩니다. 혹여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전하께서 위험해지실까 봐요.”
오로지 언만을 걱정하는 규연을 보고 있으니 언의 마음이 한없이 착잡해졌다.
언이 무엇이라고. 못나기만 한 자신에게 이토록 마음을 쏟아 내는 여인이 참으로 벅차고 고마우면서도, 정해진 미래를 알기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겼다.
“내 걱정은 말아요. 전혀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거사 전에 내가 죽는 일은 없어요.”
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규연을 달랬다.
“아마 열흘 뒤가 될 겁니다. 그대에게 폐비 교지가 내려지는 날이요.”
“생각보다 이르네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규연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를 느낀 언은 제 품에 더 바짝 안길 수 있도록 규연을 끌어당긴 뒤, 손등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행동에 규연의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일이 빨리 끝날수록 더 좋을 테니까요. 그리고 아직 열흘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
“그때까지 이리 닿아 있으면 되지요. 지금처럼.”
말을 마친 언은 규연에게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규연의 눈이 감기고, 언은 다디단 입술을 연신 머금으며 규연을 놓아주지 않았다.
규연이 진실을 알아차리기 전까지, 언은 그가 떠난 뒤의 고통을 생각해서라도 규연이 언과의 추억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단호하게 규연을 밀어낸 것도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고, 규연은 언에게 마음을 청했다. 그래서 언 역시 마음을 바꿨다.
어차피 규연의 가슴에 멍울이 남게 될 것이라면, 그 상처가 찾아오기 전까지만이라도 규연이 마냥 행복할 수 있게 만들겠다고.
그간 받지 못한 사랑을 온전히 받아 내고, 그저 말갛고 환한 웃음을 원 없이 지어 보일 수 있게.
그 마음의 값을 치르기 위해 언이 더 뜨거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 만들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