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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49/68)

49화

* * *

“꼭 한번 같이 보고 싶었습니다. 부용정에 가득 핀 이 수련을요.”

규연이 싱긋 웃으며 언을 바라봤다. 언 역시 규연을 따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절대 떠나지 않겠노라 약조한 것 외에도, 규연이 청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마음을 감추지 마세요, 전하. 이제 모두 아니까, 그냥 드러내 주세요. 오히려 숙부를 속이는 일에도 더 유리할 겁니다.〉

더 이상 마음을 감추지 말아 달라고, 그냥 규연을 향한 애정을 쏟아 내 달라고, 조금은 수줍은 얼굴로 부탁했다.

언은 그런 얼굴로 청하는 규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영의정을 속이기 더 유리하리라는 말 역시 맞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습을 보여야 영의정이 언의 총기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둘 테고, 규연이 다시 총애를 얻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감지하고 나면 규연을 향한 경계도 다소 늦출 테니 여러모로 유리했다.

“수련을 좋아합니까?”

“네. 참 곱잖아요. 깨끗하고요.”

규연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언은 그 모습을 천천히 눈에 아로새겼다.

규연이 궁에 들어온 이래, 이렇게나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점점 생기를 잃으며 시들기 직전까지 죽어 가던 꽃에서 다시 새잎이 돋고, 새 꽃봉오리가 맺히는 것만 같았다.

“곧 해가 더 뜨거워질 거예요. 날이 점점 더 무더워지고 있으니 얼른 정자로 가시지요. 바람이 무척 잘 통해 그곳에 앉아 있으면 금방 시원해져요.”

강해지는 햇볕을 느낀 규연이 언을 정자로 데려가려 했다. 언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규연의 손을 잡았다.

“……전하?”

궁인들이 뒤따르고 있었고, 그 외에도 곳곳에 눈이 붙어 있는 공간이었다. 그랬기에 언이 이렇게 손을 잡아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규연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언을 바라봤다.

“마음을 감추지 말라 청한 것은 중전입니다. 한데 어찌 그리 부끄러워합니까?”

“아…….”

“더 늦기 전에 갑시다. 나도 슬슬 더워지니.”

언은 규연의 손을 꼭 잡고서 정자를 향해 나란히 발을 맞추며 걸어갔다.

마음을 감추지 말아 달라는 청을 들었을 때, 크게 욕심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감히 행복을 맛보려 들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런데 파란 하늘 아래서 행복하게 웃는 규연을 다시 마주한 순간, 그의 다짐이 무너져내렸다.

떠나기 전에 규연이 보다 더 많이 웃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미소를 언의 기억에 조금이라도 더 담아 낼 수 있다면, 언은 감히 욕심내고 싶었다.

* * *

“정말 시원하지요?”

“네. 시원합니다.”

“매번 신기합니다. 특히 여름마다요. 아, 원래 부용정을 자주 찾았습니다. 이곳이 책을 읽기 참 좋아서요.”

“압니다. 그대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규연이 어찌 알았냐는 듯이 언을 바라봤다.

“내가 그대의 궁녀에게 어떤 명을 내렸는지 그새 잊었습니까?”

“아…….”

깨달음을 얻은 탄식에 언이 피식 웃었다.

“자주…… 찾으셨나요?”

“그대가 곤히 잠들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대부분 갔습니다. 내 잠행이 길어지는 밤이 아닌 한.”

규연은 조심스럽게 물었고, 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찾아갔던 수많은 밤을 회상했다.

“사실 머릿속으로는 이러면 안 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찾다 보면 언제든 들킬 수 있고, 또 이렇게 찾다 보면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을 조금도 접을 수 없을 테니까.”

“…….”

“한데 도저히 멈출 수가 없더군요. 항상 홀린 듯이 그대를 찾게 됐습니다. 그렇게라도 그대의 평온한 얼굴을 보지 않으면, 그렇게라도 그대에게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가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아서요.”

언은 매일매일 한계까지 밀어붙여졌다. 영의정을 속이기 위해 양귀비 향을 곁에 두고, 물건을 때려 부수고, 광증을 만들어 내고, 미친 사람처럼 널브러져 있어야 했다.

포악한 가면을 쓰고 그 너머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으니,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었다.

떨어지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높이에서,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낡은 줄을 타는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규연이 창밖에 보이는 화계에 매달렸듯, 언에게도 조금이나마 숨을 쉴 곳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규연이었다.

하루하루 규연의 숨을 옥죄이고 있으면서 정작 언은 규연으로부터 숨을 얻고 있었으니, 참으로 못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같이 자괴감이 밀려오는데, 찾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그만두지 못했다.

“신첩이 불면에 괴로워할 때, 전하께서도 괴로우셨겠네요.”

“찾지 못해 괴로운 것도 있었지만, 그대가 아프니까. 그게 정말 괴로웠지요.”

진심이었다. 잠들 수 없는 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전하께서 합방한 것처럼 꾸며 주셨을 때 말입니다. 신첩의 눈에 구절초차를 적신 면포를 올려 주셨던 날이요.”

규연은 깊이 잠들었던 다정한 밤을 떠올렸다.

“그날 너무 쉽게 잠들어 버려서 그다음에도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편히 잠들 수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하면서요.”

“…….”

“한데 전혀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날 그리 잠들 수 있었던 건, 그저 전하의 온기가 닿았기 때문임을 알려 주려던 것처럼요.”

침방 전체에 구절초 향이 진하게 퍼질 때까지 몇 번이고 면포를 차에 적셨지만, 규연은 그날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참 신기하지요. 전하의 온기라는 것이.”

규연이 조금은 슬픈 미소를 지어 보이자 언이 팔을 뻗어 규연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규연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제 품에 가까이 다가올 수 있게 만들었다.

“전하!”

언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된 규연이 또 얼굴을 붉히며 그를 불렀다.

“마음을 감추지 말아 달라는 것이 신첩을 부끄럽게 해 달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여기 지금 궁인이 몇인데…….”

“다들 알아서 다섯 보씩 물러서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대야말로 궁인들을 무엇으로 보는 겁니까. 우리보다 훨씬 민첩한 자들이건만.”

규연은 멀찍이 물러서 땅을 바라보고 있는 궁인들을 확인한 뒤, 언을 살짝 흘겨봤다.

“보지 못한다 한들 저들끼리 계속해서 이야기할 겁니다. 전하께서 무척 낯간지러운 일을 벌이셨다고요.”

“뭐 어떠합니까. 떠들게 두세요.”

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양, 살짝 어깨를 들썩였다.

그 모습에 규연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고 말았다.

옛날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다정하면서도 능글맞은 구석이 있어 틈만 나면 규연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던 연성 대군이 떠올랐다.

지금의 언은 그때와 똑같았다. 규연이 기억하던 대로, 그토록 그리워하던 대로, 따뜻하게 규연을 감싸며 바라봤다.

“그리웠습니다, 전하. 전하의 너른 품도, 온기도, 다정한 목소리도, 전부요.”

규연은 조심스럽게 언의 품으로 파고들며 조용히 속삭였다.

언도 마찬가지였다. 한없이 그리웠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규연의 환한 미소도, 안겨 올 때마다 꼬물꼬물 움직이던 손길도, 수줍어할 때마다 발그레 달아오르는 얼굴도, 무엇 하나 그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제 다시는 잃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는요.”

규연은 진심을 다해 말했고, 이를 느낀 언은 규연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언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잃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처럼 영원히 규연을 끌어안고 이 향에 취해 있고만 싶었다.

그러나 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중전.”

그래서 힘겹게 말을 꺼내야만 했다. 이리 행복에 취해 있는 순간에 전할 말이 아니었고, 규연에게 지독한 충격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대가 원한 대로, 내가 약조한 대로 끝은 달리할 수 있지만, 그 끝으로 향하는 그림은 바꿀 수 없습니다.”

“…….”

“몇 번이고 따지고 또 따져서 가장 최선인 방법을 찾아낸 것이니까요.”

언에게 기대어 있던 규연이 몸을 일으켜 그와 눈을 맞췄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탓이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어요. 최대한 빠르게 일을 끝내야 합니다.”

달포. 거사까지 겨우 그 정도의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 짧지 않은 듯한 시간처럼 보였지만, 결코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흘러갈지, 언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해서 나는…….”

크게 숨을 고른 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이든 괜찮으니 편히 말씀해 주세요. 어떤 그림을 그리고 계신 것입니까?”

언이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니 규연이 먼저 물었다.

그러자 작게 한숨을 내쉰 언이 다시 규연과 눈을 맞추며 그가 그렸던 그림이 무엇인지 보여 줬다.

“그대에게 폐비 교지를 내리려 합니다.”

언의 말을 들은 순간, 규연은 왜 그가 그토록 망설였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계획이었다.

성큼 다가왔다고 생각했던 행복이 다시 멀어지는 것만 같아서, 규연은 잘게 떨리는 손을 당의 뒤로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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