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숙부에 대한 자료가 가장 많네요.”
“아무래도.”
규연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며 자료를 살폈다.
수많은 대소신료들의 부정과 부패의 증거를 모아 두었는데, 영의정을 겨냥하는 정황이 가장 많았다.
“어찌 이리 다 모으신 것입니까?”
“바쁘게 움직였지요. 아주 영민한 자들을 모아서.”
언은 덤덤히 이야기했지만, 규연은 언이 이만큼 증거를 모으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고가 있었을지 느껴져 마음이 쓰렸다.
“언제부터셨습니까? 이리 움직이겠노라 다짐하신 건?”
규연은 그간의 시간을 듣고 싶었다. 규연이 곁을 지켰으나 알지 못했던, 언의 가면 너머에서 흘러간 시간이 궁금했다.
“스승님을 잃은 직후부터.”
언은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야 할 말도,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도, 너무나도 많았다.
“왕이 된 후부터 사람을 모으려 애썼습니다. 꼭대기에 올라 내려다보니 상황이 너무 암담해서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신이 다 아득한데, 우선은 내 사람을 만들고 내 세력을 꾸려야 무엇이든 할 수 있겠더군요.”
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 과정에 잃을 수밖에 없었던 소중한 이들의 얼굴 역시 눈앞에 아른거렸다.
“스승님이 사람을 모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제법 구실을 갖추게 되었지요. 하나 그 대가로 스승님을 잃었습니다.”
언은 스승인 대제학이 자신을 도운 뒤 모든 누명을 끌어안고 홀로 희생한 이야기를 전했다.
“스승님의 여식이 성빈입니다. 풍비박산 난 집안에서 홀로 살아남았고, 내가 찾아내 거두었어요.”
서혜의 이야기를 들은 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서혜의 숨겨진 정보에 대해서는 규연 역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언이 무엇을 숨기는지 꼬리를 밟기 위해 이것저것 조사했을 때, 서혜에 대해서도 알아본 탓이었다.
그러나 규연이 안 내용은 서혜가 이판이 정을 통했던 기생 아래서 태어난 서녀라는 것뿐이었다. 언이 거짓으로 꾸며 낸 정보였다.
“하면 이판의 서녀라는 것도…….”
“거짓입니다. 성빈이 꼭 집안의 복수를 위해 일하고 싶다 하여 그곳에 세작으로 보냈어요. 멍청한 이판이 제 여식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을 뿐, 성빈은 대제학의 여식입니다.”
진실을 알게 된 규연이 시선을 내리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의정이 엉망으로 망쳐 놓은 인생이 한둘이 아니었다. 언도, 규연도, 심지어는 서혜마저도 그리 꼬여 버렸다는 사실이 새삼 다가오니 속이 쓰렸다.
“다 끌어안고 죽겠노라 결심하신 것도 그때부터입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규연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왜 그런 가시밭길을 걷겠다고 다짐했는지, 규연은 알아야 했다.
“그래요. 그때부터였습니다.”
언은 지금껏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은 속마음을 규연에게 들려줬다.
“스승님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개혁을 향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내 손으로 피고름을 짜낼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었어요. 영상의 눈을 피해 힘을 기를 수 있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이라 여겼습니다.”
“…….”
“한데 계속해서 사람을 잃고, 스승님마저 잃고 나니 깨닫게 되더군요. 이렇게 움직이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없다고.”
영의정은 너무나도 탄탄하게 그의 힘을 길러 놓았고, 이는 언이 함부로 덤벼들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직접 상대하면 이길 방법이 없었다. 그대로 들이받게 되면, 언만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 게 빤했다.
“고름을 짜내고, 연고를 발라 나을 상태가 아닙니다. 지금의 조선은 그래요. 곳곳에서 썩은 내가 진동합니다. 잘라내고, 도려내야 해요. 그 뒤에 자라날 새살을 기다려야 합니다.”
“…….”
“내가 피고름을 뒤집어쓰고자 했습니다. 내가 수많은 원흉을 끌어안고, 모두를 줄줄이 엮어서 다 무너뜨리겠다고요.”
언이 그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니 규연의 손이 잘게 떨렸다.
“내가 겨울이 되어 폐단을 끌어안고 사라지면, 휼이 봄이 되어 새 세상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몇 번이고 다른 방법을 찾으려 해 봐도, 이게 최선이었어요. 누군가는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라앉아야 했습니다.”
언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이야기를 듣는 규연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겼다.
본래 왕이 될 운명이 아닌 자였다. 그저 평범한 대군으로, 제 삶을 꾸려나가기만 했던 자였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레 운명이 그를 뒤흔들더니, 그의 삶에 너무나도 막중한 무게를 얹어 주었다.
“상평 대군도 압니까? 전하께서 어떤 그림을 그리시는지?”
“……압니다. 상평도 알아요.”
거짓이었다. 휼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언에게 제발 정신 차리고 선정을 베풀어 달라 그리 간청했다.
그러나 규연을 속이기 위해서는 휼을 이용한 거짓이 필요했다.
“해서 바꿀 수 있습니다. 본래 휼이 나를 죽이기로 약조했던 것이니까. 휼과의 계획을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살 수 있어요.”
“왜 처음부터 그리 계획을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전하께서 상평 대군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또 상평 대군이 전하를 얼마나 잘 따르셨는지 신첩이 압니다. 한데 어찌 형제를 죽이는 무게를 그리 넘기고 또 받아들이려 하셨단 말입니까.”
“내가 살아 있으면 상평에게 부담이 되니까. 내 존재가 끊임없는 위협이 될 겁니다.”
동생을 위해 사라지려 했다는 뜻이었다. 끝의 끝까지, 언만 최대한 많은 짐을 끌어안고 물속에 잠기려 했던 것이 느껴졌다.
규연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리 다 끌어안으려 하신 것입니까. 왜 전하만 이리 가엽게…….”
규연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언의 얼굴을 감쌌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 닿자 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독히도, 정말 지독히도 바랐던 온기였다. 잠시 굳었던 언은 이내 그의 얼굴에 닿은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상평 대군도 분명 반기실 겁니다. 제가 아는 상평 대군은 저만큼이나 전하의 뜻을 말리려 하셨을 테니까요.”
“……맞아요. 그랬습니다.”
그럴듯한 거짓을 늘어놓을수록 언의 심장이 콕콕 아파 왔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규연을 살리고, 그의 거사도 성공시키려면, 방법은 이뿐이었다.
“영상이 형님들을 다 죽이고 나를 왕위에 올렸을 때, 나는 그대가 중전 자리에 오르는 것만은 막고 싶었습니다.”
“…….”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몫도, 그리고 형님들의 몫도. 전부 갚아 주려 했으니 이 삶이 순탄할 리 없었고, 궁이 얼마나 숨 막히는 곳인지 알기에 들이고 싶지도 않았고, 영상의 손에 놀아나다 잃게 될까 두려웠으니까요.”
무거운 죄책감이 밀려들자 이전부터 전하고 싶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대가 나를 다 잊고 궁 밖에서 행복하길 바랐습니다. 나와의 시간이 그저 겨울날의 예쁜 꿈처럼 남고, 그 꿈에서 깨어나 그대의 삶을 살길 바랐어요. 그래야 행복할 테니까. 그래야 더 많이 웃을 수 있을 테니까.”
“…….”
“그리고 두려웠습니다. 영상이 이미 그대와 나의 사이를 알고 있어서 혹여나 나를 쥐고 흔들기 위해 그대에게 해를 가하게 될까 봐.”
언은 괴로웠던 시간을 떠올리며 잠시 숨을 고르고는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무런 연통도 넣지 않았어요. 부디 나라는 사람이 그대의 삶에서 온전히 사라지길 원해서.”
“…….”
“이를 모르는 그대가 나를 하염없이 기다렸음을 압니다. 나라는 사내가 무엇이라고, 그대가 조금도 잊지 않고 계속 궁가를 찾으며 내 흔적을 쫓으려 했음을 알아요.”
궁에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마음이 미어졌던 날들이 생생했다.
“미안해요. 그 모든 시간에 대해, 그리고 결국 그대가 이 불구덩이 속으로 끌려오는 것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규연을 살리기 위해 중전으로 들인 것이지만, 언은 그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다. 어차피 핑계였다. 규연에게 괜한 마음의 짐을 얹고 싶지 않았다.
“숙부가 집에 찾아와 왕비가 되지 않겠냐고 물었던 날을 기억합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규연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신첩의 뜻이었습니다. 그 자리를 받아들인 것이요.”
불구덩이에 뛰어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규연의 선택이었다.
“신첩이 이 자리에 앉겠노라 이야기했습니다. 연성 대군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숙부의 말을 듣자마자 그 옆자리를 제가 차지하겠노라 이야기했어요.”
“…….”
“전하의 곁을 선택한 건 신첩입니다. 전하께서 막지 못하신 것이 아니에요. 막으려 하셨어도 신첩이 무작정 떼를 써서라도 들어왔을 겁니다.”
진심이었다. 언을 보기 위해서라면, 그의 곁에 남기 위해서라면, 그때의 규연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전하께서 죄스러워하실 일이 아닙니다.”
언은 점점 더 야속하게 느껴지는 운명을 탓하며 규연의 손을 더 꽉 잡고 감쌌다.
“하나 궁에 들어와 신첩을 밀어내시어 남은 마음의 흉터가 한둘이 아니니까. 한 번 더, 부디 한 번 더 제게 약조해 주세요.”
그 온기를 느끼던 규연은 언에게 다시 한번 간절히 청했다.
“절대 죽지 않겠노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고 살아서 신첩의 그 흉터를 지워 주시겠다고. 한 번만 더 제게 약조해 주세요.”
규연은 몇 번이고 더 들어야겠다는 듯, 언의 맹세를 또 듣고 싶어 했다. 그만큼 불안했고, 그만큼 간절했다.
조용히 눈을 맞추던 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조하겠습니다. 그대 곁에 남겠다고.”
참으로 달콤하게 다가갈, 훗날 너무나도 잔혹하게 다가올 거짓을 전하면서, 언은 연신 속삭였다.
부디 절대 그를 용서하지 말길. 부디 규연이 겪을 아픔이 조금이나마, 정말 조금이나마 옅어질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