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 *
“조금 따가울 겁니다.”
언은 연고와 면포를 가져와 규연 앞에 앉았다.
은장도에 베인 규연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다. 피가 쉬이 멈추지 않았다.
어의를 최대한 멀리해야 하는 만큼 언의 침방에는 약과 면포가 무척 많았다. 어지간한 상처는 상선의 손을 빌리거나 직접 치료했기에 상처를 살피는 언의 솜씨가 제법 뛰어났다.
“앗.”
“스며드는 동안은 꽤 아플 거예요. 하나 금방 가라앉을 겁니다.”
언이 연고를 바르고 면포를 덮어 주자 규연이 살짝 앓는 소리를 냈다. 베인 틈으로 연고가 스미면서 통증이 인 탓이었다.
“칼은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그게 설령 작은 은장도라 하여도요.”
언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규연에게 다시 은장도를 넘겨주었다.
규연은 말없이 은장도를 받아 들더니 잠시 망설이다 언을 빤히 바라봤다.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지킬 터이니 그만 불안해하고 이만 물러나세요. 굳게 닫혔던 문이 그대 때문에 열렸으니 궁 곳곳으로 소문이 퍼졌을 겁니다.”
언은 규연을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규연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중…….”
“증표를 주십시오. 전하께서 정말 마음을 바꾸셨음을 증명할 수 있는 증표를요.”
규연은 언이 불안했다. 죽기 위해 지금껏 움직인 자였다. 이 자리에서야 규연의 협박이 통했다고는 하나,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더 확실한 증표가 필요했다. 언이 정말 죽지 않고, 규연의 곁에 남아 있으리라는 확신이 필요했다.
“무엇을 해야 믿겠습니까?”
“신첩이 변수가 되겠습니다. 그리 만들어 주세요.”
규연의 말에 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계획이 어그러졌음을 신첩이 확인할 수 있게. 전하의 그림이 달라졌음을 증명할 수 있게.”
“…….”
“하니 보여 주세요. 전하께서 쓰신 그 가면 너머의 일을 할 때 쓰셨을 공간을요. 오늘 밤에요.”
따로 일을 살피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을 터였다. 규연은 이를 확인하고자 했다. 아무에게도 보이면 안 되는 공간이 규연에게 보이고 나면 무엇이든 수정해야 할 터였다. 이게 규연이 원하는 바였다.
본래의 그림을 망쳐 놓아야 했다. 언이 계속 그렸던 그림을 찢어 놓아야 했다.
몹쓸 짓임을, 못난 짓임을 잘 알았다. 그러나 지금 규연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다름 아닌 언의 목숨이었다.
다른 건 상관없었다. 적어도 규연에게는 그랬다.
살려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언을 살려야 했다. 그러니 언이 품고 있는 저 잔인한 계획을 어떻게든 어그러뜨려야 했다.
“그래요. 그리하겠습니다. 내 오늘 보여 줄게요.”
그 뜻을 읽은 언은 당황하던 것도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곧바로 약조했다.
이리 쉽게 받아들이리라 생각지 못했던 터라 되레 규연이 당황했다.
“다 들켰으니 이제 감출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대 뜻대로 계획도 바꿀 거니까, 보여 주겠습니다.”
혹시 허튼 공간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고 있을 때, 언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설이던 규연은 결국 의심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조하셨습니다. 오늘 밤이에요.”
“그래요. 오늘 밤.”
규연은 몰랐다.
이미 언이 흑의적을 휼에게로 넘기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요새를 비워 가고 있었다는 것을.
* * *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규연이 겨우 침전을 떠나자 언이 바로 이경을 불러들였다.
“눈밭이 얼마나 정리되었지?”
“중요한 자료는 거의 다 옮겼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면 지금 당장 기별을 넣어서 나머지까지 전부 옮기거라.”
언이 갑자기 일정을 앞당기려 하자 이경이 그 이유를 물었다.
“어인 연유에서 그리하시는지요? 혹 갑자기 계획을 바꾸어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옵니까?”
“중전이 알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이유를 들은 이경은 입을 살짝 벌린 채 굳어 버릴 정도로 크게 놀랐다.
규연이 진실을 알아낸다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보성사의 일로 언을 의심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금방 거두리라 생각했고 설령 거두지 않더라도 그간 쌓아 온 시간이 있으니 언이 들키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이경의 예상은 완전히 뒤엎어졌다.
“전하. 그 무슨…….”
“죽겠다는 계획을 바꾸지 않으면 중전이 먼저 죽겠다고 하더구나. 실제로 은장도를 찔러 넣으려다 목에 상처가 났다.”
규연이 다쳤다는 소식에 이경의 눈이 요동쳤다.
“죽겠다 하면 정말 죽을 여인임을 너도 알지 않더냐. 우선은 살려야 한다. 나로 인해 목숨을 잃게 둘 수는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언은 크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이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니 시기를 조금 앞당길 수밖에 없구나. 중요한 자료는 모두 옮기되 이미 방이 붙어 세간에 알려진 정보는 그대로 남겨 둔다. 자료를 치운 흔적이 보이면 중전이 의심할 테니까.”
애써 감추었으나 규연이 알아내 버린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철저하고 치밀해야 규연의 눈을 잠시나마 가릴 수 있었다.
“오늘 모이기로 한 일정은 취소한다. 내일로 미루고, 정확한 사연은 윤성에게만 전해. 모두에게 전할 필요는 없어. 일이 이렇게 되었다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까.”
언은 계획이 달라지지 않으리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가만히 언이 내리는 명령을 듣고 있던 이경은 또 가슴이 미어졌다.
모든 사실을 안 규연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을지 알기에 그녀가 너무나도 가여웠고, 다른 사내를 위해 목숨도 버리려 하고 있는 그녀가 야속했고, 하필 그 사내가 충정을 맹세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사내라 차마 그를 미워할 수도 없는 이 상황이 한스러웠다.
“바로 전해야 한다. 지금 당장.”
“예, 전하. 그리하겠습니다.”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른 이경이 바로 명을 따르겠노라 답했다.
그러나 쉬이 따라 나온 대답과 달리, 이경의 발은 바닥에 딱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전해야 한다니까 어찌 그리 서 있기만 해?”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될는지요, 전하.”
고뇌에 찼던 이경이 언과 눈을 맞췄다. 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의 물음을 허락했다.
“정말 계획을 바꾸실 마음이 없으신 겁니까?”
“무슨 뜻이더냐.”
“마마께 약조한 대로, 살아남으실 마음은 추호도 없으십니까?”
죽는 언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경 또한 같았다. 군주의 뜻이 원체 강경해 차마 입을 대지 못했을 뿐, 이경은 언이 떠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없다.”
그러나 언은 너무나도 단호하게 이경의 마음을 잘라 냈다.
“나는 떠나야 한다, 이경아. 그게 내 몫이야.”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호한 대답에 결국 이경이 깊이 허리를 숙인 뒤 침전을 빠져나왔다.
* * *
“전하.”
파란색 쓰개치마를 덮은 규연이 언을 발견하여 그에게 다가왔다.
언 역시 용포를 벗고 회색 도포를 입은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거리가 있습니다. 해서 말을 몰고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규연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탈 줄 몰라 두려움이 앞서긴 했지만, 지금은 겁에 질려 멈칫할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뒤에서 받칠 겁니다. 절대 떨어질 리 없고, 다칠 리도 없으니 나를 믿어요.”
언은 말 위에 규연을 올리고, 바로 그 뒤에 올라타 품에 안듯 규연을 감쌌다.
등 뒤에서 닿아 오는 온기와 향에 규연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언의 품에 닿아 있다는 사실이 규연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한없이 심각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실제로 그런 마음가짐이건만, 심장이 빠르게 내달리는 일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랴!”
규연을 뒤에서 안은 채로 고삐를 쥔 언은 곧바로 말을 몰았다. 밤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규연을 안심시키고 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언은 급히 달려가면서도 규연을 살폈다. 닿아 있는 몸에서 바짝 긴장한 게 느껴져 규연이 걱정됐다.
규연은 몇 번이고 괜찮다 말했고, 둘은 한참 달린 끝에 요새 초입에 다다랐다.
“오늘은 모이기로 한 날이 아니라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조용해도 이상하다 여기지 마세요.”
언은 멈추지 않고 달려가 요새 중앙으로 향했다. 규연은 생각보다 큰 공간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어렴풋이 예상하던 바를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리세요.”
언이 먼저 말에서 내리고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규연이 언이 말한 대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이내 커다란 손이 규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언은 그대로 규연을 안아 올려 그녀를 말에서 내렸다.
몸 곳곳에 닿는 온기가 설레 자꾸만 규연의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 그러나 찰나였다. 규연은 마음을 가다듬고 언의 시간이 쌓인 곳을 바라봤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언은 잠시 멈춰서 요새의 전경을 바라본 뒤, 규연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
안으로 들어간 순간, 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방을 뒤덮은 수많은 자료를 눈에 담았다.
“이겁니다. 내가 폭군의 가면을 쓰고 그 너머에서 벌인 일이.”
겹겹이 쌓인 시간과 노력을 마주한 순간, 규연은 언이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무게를 깨달았다.
이리 버티고 서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짓눌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이리 버텨 온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