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68)

46화

* * *

“윽…….”

언이 지독한 두통에 이마를 짚으며 눈을 떴다. 도저히 소리를 참아 낼 수 없는 통증이었다.

‘또 해독제가 일을 냈나 보군.’

해독제를 들이켠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규연을 피하고, 영의정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며칠간 침전의 문을 걸어 잠근 것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해독제가 일을 낼까 걱정되어 문을 잠근 것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이 문제를 일으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하……. 상선. 밖에 있…….”

언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상선을 부르려 할 때, 그의 시야에 규연이 들어찼다.

“중전.”

금침 맡에 앉은 규연의 얼굴에 눈물길이 잔뜩 나 있었다. 언이 깨어나 시선이 맞닿자 다시 또 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헛것 같지 않은데. 너무 따뜻하지 않습니까. 부드럽고. 따뜻하고. 내가 기억하는 그대와 같은데.〉

〈…….〉

〈하면 말해 줘요. 지옥이 아니라고. 그대는 지옥에 오지 않았다고. 그냥 구천을 떠도는 내가 환상에 갇힌 거라고.〉

눈물로 젖어 가는 맑은 눈을 본 순간, 꿈이라고 생각했던 장면이 언의 머릿속을 스쳤다.

〈구천이라니요. 말씀을 해 보십시오, 전하. 전하께서 왜 구천을 떠도십니까?〉

〈그야 내가 다 끌어안고 죽었을 테니까.〉

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해독제를 들이켰던 여느 날처럼, 그저 악몽에 갇혔다고만 생각했다.

상선에게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단단히 명령해 두었으니 규연이 침전 안으로 들어올 리도 없었고, 유달리 기운이 몽롱해 현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다.

“상선.”

“송구합니다, 전하. 전하께서 여느 때와 달리 심하게 앓으시기에……. 두려워 마마를 침전 안으로 모셨습니다.”

언은 평소보다 낮아진 목소리로 상선에게 상황을 물었고, 상선은 깊이 허리를 숙이며 그의 죄를 고했다.

사실을 알게 된 언의 시선이 다시 규연에게로 향했다.

언이 죽으며 이야기가 끝난다는 비밀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규연이 알아서는 안 되는, 그녀로부터 지켜야 하는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데 규연이 알아 버렸다. 그것도 언이 약에 취해 제 입으로 털어놓은 것 때문에.

순식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숨죽여 울고 있는 규연을 어찌 상대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이제 신첩에게 무어라 말씀하실 겁니까?”

하염없이 운 탓에 잔뜩 잠긴 목소리가 물었다.

“약이 만들어 낸 헛소리라 하실 겁니까? 여전히 숙부의 그림자가 보여 신첩이 밉다고 하실 겁니까?”

“……중전.”

“신첩과 함께하는 미래를 계속 그리시게 되면, 그냥 그리십시오. 다 끌어안고 사라질 생각 마시고 그냥 그리시란 말씀입니다.”

규연이 밤에 몰래 찾아갔을 때 전했던 말을 뱉어내자 언의 눈에 파도가 일었다.

“정말 잔인하십니다. 신첩을 그리 박대하시는 것처럼 몰아세우시고는 밤에 몰래 찾아와 진심을 속삭이고는 사라지고, 매일같이 말라 가는 신첩을 보시면서 정작 제 쉴 곳이 되어 주던 화계를 직접 꾸리며 혹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을까 땅을 고르시고.”

언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죽고자 하는 계획만 들킨 게 아니었다. 밤마다 규연을 찾아가고, 그녀를 위해 화계를 가꾼 것까지 전부 들켜 버렸다.

“한데 이제 그것도 모자라 신첩을 두고 떠나가려 하십니까?”

쏟아지는 눈물이 자꾸만 규연의 시야를 가렸다.

언을 똑바로 보며 말하고 싶은데, 멈출 줄 모르는 눈물이 규연을 방해했다. 그만 울고 싶은데, 꼭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밉습니다. 신첩이 괴로워한 시간을 생각하면 정말 너무나도 밉고 야속해 죽겠는데……. 홀로 다 끌어안고 죽기로 마음먹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그리고 지금까지 버티셨을 시간을 생각하면, 온전히 미워하지도 못하겠어요.”

“…….”

“해서 잔인하시다는 겁니다. 차라리 들키지를 마셨어야지요. 정말 신첩이 욕하고 미워할 수 있게 끝까지 감추셨어야지요. 한데 어찌!”

언은 무너져내리는 규연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규연을 달랠 자격이 없었다.

그리도 생기 넘치고 사랑스러운 여인의 빛을 앗아 간 것도, 따뜻하고 부드럽던 마음을 넝마처럼 찢어 놓은 것도, 전부 언이었으니까.

“아까 당부하셨지요. 절대 전하의 뒤를 따라 금방 오지 말라고요. 약조해 달라고요.”

“…….”

“신첩은 전하께 약조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그냥 신첩 먼저 떠나겠습니다. 제 눈으로 전하께서 돌아가시는 모습은 볼 수 없으니, 그냥 제가 먼저 떠날 것이에요.”

순식간이었다. 규연이 품에서 은장도를 꺼내 제 목에 찔러 넣으려 했다.

“중전!”

내내 침묵을 지키던 언이 다급하게 달려와 규연의 은장도를 빼앗으려 들었다. 그의 큰 손이 규연의 손을 움켜쥐었다. 힘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규연은 금방 저지됐다. 그러나 그녀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어떻게 해서든 제 목에 가져다 대려 안간힘을 쓴 탓에 기어코 가느다란 하얀 목에 상처를 냈다.

“미쳤습니까!”

겨우 은장도를 빼앗은 언이 언성을 높였다. 하얀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보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제정신이에요? 지금 무슨 짓을!”

“왜 전하께서는 되고 신첩은 안 되는지요? 전하께서 떠나가려 하시듯, 저도 죽으려는 겁니다.”

“중전!”

“전하께서 뜻을 굽히지 않으시면 신첩은 정말 죽을 겁니다. 은장도로 목을 베든, 침전에 끈을 매고 목을 달든, 독약을 구해 들이켜든, 정말 죽을 겁니다. 신첩이 못 할 것 같으신지요?”

규연은 진심이었다. 언이 떠난 세상에서 살아갈 마음도, 이유도 없었다. 언이 먼저 죽는 꼴을 보느니 규연이 먼저 숨을 거두는 것이 나았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신첩은 전하께서 번복하시기 전까지 계속 죽으려 할 테니까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규연이 먼 바닥에 나동그라진 은장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엇을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는지 확인하자마자 언이 그녀를 따라갔다. 그는 금세 규연을 따라잡고서는 규연의 손에서 은장도를 빼앗았다.

“중전, 제발!”

“놓으십시오.”

“이래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도 소용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리 말리셔도 아무 소용 없어요. 하니 그냥 편히라도 죽게 해 주세요.”

규연이 다시 팔을 뻗어 은장도를 가져가려 하자 언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저항하지 못하도록 품에 가두었다.

온몸을 감싸는 온기에 잠시 멈춘 규연은 이내 그 품을 벗어나려 바르작거렸다.

“놓으세요. 이거 놓으시란 말입니다!”

“제발. 내가 이리 간청합니다. 규연 제발…….”

“신첩에게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까!”

언이 간절한 목소리로 청하자 규연이 언성을 높였다. 화가 섞인, 답답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목소리가 언의 귓가를 때렸다.

“왜 그 값을 치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떠나십니까? 신첩에게 지으신 죄는 죄가 아닙니까?”

규연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 내며 쏘아붙이다가 이내 너무나도 지쳐 버린 목소리로 언에게 속삭였다.

“살아서. 살아남아서.”

“…….”

“살아서 제게 갚으십시오. 신첩의 마음에 박으셨던 그 많은 대못을 다 뽑아내고, 곳곳에 남은 흉터가 아물도록 약을 바르면서, 그리 속죄하시란 말입니다.”

규연의 몸에서 힘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규연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언의 품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꼈다.

“대답하세요. 계획을 바꾸시겠노라고. 죽지 않으시겠다고. 그리 말씀 못 하신다면 당장 침전으로 돌아가 목을 맬 겁니다.”

온기에 녹아 물러날 마음은 없었다. 규연은 언의 입에서 직접 약조를 듣기 전까지는 조금도 뜻을 접지 않을 생각이었다.

“…….”

언은 규연을 끌어안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규연의 성정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지금 규연의 협박은 공수표가 아니었다. 이대로 놓아주면 정말 당장이고 끈을 매달 여인이었다.

하나 언의 그림은 바꿀 수 없었다. 아주 오래도록 그려 온 그림이었고, 절대 바꾸지 않겠노라 맹세했던 그림이었다.

언은 분명 가라앉아야 했다. 끌어안은 그대로 물속에 잠겨 영원히 수면 아래에 갇혀야 했다.

그런데 이제 언에게 도망갈 길이 없었다. 규연으로부터 멀어질 방법이 없었다.

규연은 제 목숨을 쥐고 언을 흔들었다. 모든 탈출로를 차단하고, 막다른 길에 언을 밀어 넣은 것과 다름없었다.

‘이리하면 나는…….’

언은 제 품에서 규연을 놓아준 뒤, 그 어느 때보다도 결연해 보이는 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약조하세요. 반드시 바꾸시겠노라고. 살고, 또 살아서, 신첩에게 갚으시겠노라고.”

규연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약조해 달라는 목소리에서 절실함이 느껴졌다.

내내 입술을 달싹이며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던 언은,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려야 했다. 우선은 규연을 살려야 했다.

규연을 잃는다면, 그것도 언 때문에 잃고 만다면, 언은 그 고통을 이겨 낼 자신이 없었다. 거사를 똑바로 치를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래서 언은 지키지 못할 약조를 하고 말았다.

“그리하겠습니다. 죽지 않을게요. 살아서 그대에게 갚겠습니다. 내가 그대를 밀어내기 위해 남기고 말았던 그 모든 상처의 값을, 살아남아 그대 곁에서 치를게요.”

거짓이었다. 참으로 지독한 거짓이었다.

“그러니 다시는 내 앞에서 죽으려 하지 마요. 다시는.”

언은 간절히 청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죄가 하나 더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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