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68)

45화

* * *

“마마…….”

“고하게.”

“송구합니다. 전하께서 오수에 드시어 누구도 들이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김 내관이 송구스러워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듯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규연은 마음을 다스리려는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언이 누구도 만나지 않고 침전에 틀어박힌 지가 어언 나흘째였다. 규연은 물론이고 영의정을 비롯한 몇몇 대신까지 찾아와 문을 열어 달라 청했지만, 단 한 번도 문이 열린 적은 없었다.

‘어찌하여 문을 걸어 잠그신 것이옵니까. 무엇을 그리시기에 이리…….’

규연은 차마 내뱉을 수 없는 깊은 한숨을 꾹 삼켰다.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전해야 할 감정이 한둘이 아니건만, 언은 갑자기 세상과 뚝 단절됐다.

‘분명 또 밤이 되면 밖으로 잠행을 떠나시거나 틈이 나는 대로 무언가 일을 살피실 터인데.’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기에 이처럼 행동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규연은 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숙부를 내치는 건 규연 역시 누구보다 바라는 바였고, 설령 그 화가 규연에게까지 미친다 해도 전혀 상관없었다.

숙부가 그의 앞에 달린 여러 죗값을 치를 수 있다면, 그래서 언이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죽어 가는 사람들의 숨통이 트일 수만 있다면, 정말 조금도 상관없었다.

“하면 전하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터이니 기침하시면 내게 말하게.”

“마, 마마. 방금 막 오수에 드시어 아마 한참…….”

“상관없네. 뵙기 전에 돌아갈 마음 없으니 그리 알고 신경 쓰지 말게.”

김 내관의 눈이 또 이리저리 굴러갔다. 중전이 이 앞에 계속 서 있겠다는데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 없었다.

규연의 평소 성정을 생각했을 때, 한번 이렇게 마음먹은 이상 언을 보기 전까지 절대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더 난감했다.

“마마. 이렇게 기다리시다 혹 옥체라도 미령해지시면…….”

“괜찮다 하지 않았는가. 그냥 기다릴 것이니 괘념치 말게.”

규연은 어느 때보다 완강했다. 김 내관만 속으로 연신 한숨을 삼켰다.

“중전마마.”

그때, 침전 안에서 상선이 나타났다.

“안으로 드시지요.”

상선이 직접 문을 열자 김 내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규연 역시 상선이 직접 문을 열어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에 조금 놀란 얼굴로 상선을 바라봤다.

“그래.”

그러나 이내 낯빛을 가다듬고는 침전 안으로 향했다. 언을 만나야 했다.

“자네가 나를 안으로 들일 줄은 몰랐는데.”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순간, 규연이 상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유가 있으면 얼른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규연이 아는 상선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언의 명을 어기고 사람을 들일 자가 아니었다.

“전하의 상태가 심상치 않으십니다, 마마.”

아니나 다를까 상선이 어두운 얼굴로 언의 상태가 이상하노라 이야기했다. 그는 지체할 틈이 없다는 듯이 바로 침방의 문을 열었고, 규연 역시 심각해진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금침에 누운 언이 몸을 뒤척이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신 게 보이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얼굴에는 고통이 얼룩져 있었다.

“전하! 신첩의 말이 들리세요? 전하!”

규연이 몇 번이고 불러 보았지만, 언은 깨어나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러신 겐가?”

“이각(* 30분) 정도 되었습니다.”

“어의는? 왜 부르지 않아?”

“악몽을 꾸시는 것이라 의원을 데려와도 아무런 효과가 없사옵니다, 마마.”

악몽이라는 이야기에 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선은 안타까워하는 눈으로 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사실 상선이 말한 것이 온전한 진실은 아니었다.

악몽에 갇힌 것은 맞았지만, 그 원인은 다름 아니라 양귀비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양귀비에 취하지 않기 위해 매일같이 마시고 있는 약의 부작용이었다.

영의정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양귀비에 취해 있어야 하나 실제로 취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언은 매일같이 해독제를 마셨는데, 이 약이 여간 독한 게 아니었다.

부작용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중 하나가 오늘 같은 상황이었다. 해독제를 마시고 잠들면 꼭 이렇게 악몽에 뒤척이다가 몇 번이고 토악질을 하고는 정신을 차렸다.

보통은 일각(*15분)을 넘기지 않고 진정이 되었으나 오늘은 그 시간의 배가 지나도록 언의 상태가 가라앉지 않았다.

“전하, 깨어나셔야 합니다. 전…….”

일단은 깨워야 한다는 생각에 규연이 언의 어깨를 잡고 흔들려는데, 언이 규연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통증에 규연의 얼굴이 일그러진 순간, 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전하!”

그런데 눈의 초점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분명히 눈을 떴음에도 아직도 꿈에 갇힌 듯했다.

“전하, 신첩을 보세요. 신첩의 말이 안 들리십니까? 전하!”

언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통스러워하는 얼굴로 규연의 손목만 꽉 붙잡고 있었다.

“너무 아파. 여기가 너무…….”

침묵을 지키던 언이 갑자기 다른 손으로 가슴께의 옷을 쥐어뜯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상선. 얼른 어의를…….”

흉통을 느낀다 하니 어의를 불러오라 명하려던 규연이 이내 말을 흐렸다.

어의가 언의 상태를 살피면 이 또한 영의정의 귀로 들어갈 터였다. 가면 너머의 언을 알게 된 이상, 그의 정보를 함부로 영의정에게 가게 해서는 안 됐다.

‘그래서 상선이 나를 들였구나. 어의를 부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 상태를 그냥 둘 수는 없으니. 하면 지금 이건 혹시 양귀비 때문인가?’

광증이야 미친 척 연기하면 될 일이었지만, 양귀비는 달랐다. 취하는 순간 사람이 망가졌다.

규연은 언이 양귀비에 취하지 않기 위해 무언가 손을 쓰고 있으리라고 확신했고, 어쩌면 지금 보이는 모습이 그 조치 때문에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선이 쉽게 어의를 부르지 않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숨이……. 숨이 안 쉬어져.”

언이 지독한 통증에 괴로워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낯빛도 점점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상선. 전하께서 흉통을 느끼실 때 드시는 약을 가져오게. 따로 구비해 두었을 것이 아닌가!”

규연이 약을 가져오라 명하자 상선이 다소 놀란 얼굴로 규연을 바라봤다.

규연은 언이 어의에게 쉽게 진찰받지 않으리라고 전제하고 말하고 있었다. 언의 가면 너머를 짐작하고 있기에 건넬 수 있는 말이었다.

‘들키신 것입니까, 전하.’

언은 규연이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상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서 가져오래도! 전하께서 이리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그냥 두고만 볼 겐가!”

“송구합니다, 마마. 당장 대령하겠나이다.”

다그치는 소리에 상선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지금은 언의 고통을 덜어내는 게 우선이었다.

상선은 요새의 의원으로부터 받아 온 환약이 담긴 주머니를 들고 왔다. 규연은 곧바로 주머니를 받아들고 동그란 환약을 언의 입에 넣었다.

“삼키셔야 합니다, 전하. 훨씬 나아지실 거예요.”

언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환약을 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훨씬 고르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몽롱함은 가시지 않았다. 여전히 언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흉통이 가라앉자 규연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를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다.

“혹 내가 벌써 죽었습니까? 왜 중전이 보이지. 아니지. 죽었는데 중전이 보이면 안 되는데.”

언이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죽었을 때 찾아갈 곳은 지옥인데. 그곳에서 그대를 보면 안 되잖아. 한데 어찌하여 중전이 보이지. 아닌가, 내가 헛것을 보는 겐가?”

규연은 숨죽인 채 언을 바라봤다. 단숨에 온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살짝 흐트러진 언에게서 쏟아질 말이 예사말이 아닐 듯한 감이 왔다.

“마마. 전하께서 많이 미령하신 듯합니다. 이러다 광증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소신과 함께 나가시지요. 당장 어의를…….”

“물러나게.”

상선 역시 이를 느꼈기에 서둘러 규연을 내보내려 했다. 그러나 규연이 물러서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목소리가 상선을 밀어냈다.

“헛것 같지 않은데. 너무 따뜻하지 않습니까. 부드럽고, 따뜻하고. 내가 기억하는 그대와 같은데.”

언이 손을 뻗어 규연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놀란 규연의 눈이 떨리고, 갑작스레 닿은 온기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하면 말해 줘요. 지옥이 아니라고. 그대는 지옥에 오지 않았다고. 그냥 구천을 떠도는 내가 환상에 갇힌 거라고.”

“……구천을 떠도신다니요?”

순식간에 열기가 가셨다. 싸한 감각과 함께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규연은 제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구천이라니요. 말씀을 해 보십시오, 전하. 전하께서 왜 구천을 떠도십니까?”

“그야 내가 다 끌어안고 죽었을 테니까.”

언의 고백에 상선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절대 흘러서는 안 되는 말이 기어코 입 밖으로 흘러나와 버렸다.

“그대가 있는 곳이 부디 조금 더 나아졌어야 할 텐데. 영상이 사라지고, 부정이 사라진 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웃고 있어야 할 텐데.”

“…….”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나도 잊으세요. 그리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나 오래도록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해독제에 취한 언은 옅게 웃으며 그의 바람을 전했다.

“나랑 약조해요.”

그가 갑자기 규연의 손을 꽉 잡았다.

“무조건 천천히 오겠다고. 절대 나를 따라 금방 오지 않겠다고.”

언의 온기가 규연을 감쌌는데도 온몸의 떨림이 가라앉질 않았다. 규연은 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얼른 내게 소리 내 약조해 달란 말입니다. 그리하겠다고요.”

놀란 규연이 얼어붙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언은 너무나도 슬퍼하는 눈으로 규연을 바라보다 그녀의 품으로 그대로 고꾸라졌다.

규연은 그녀에게 쓰러진 언을 받친 채, 그대로 말을 잃고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깨닫고 말았다. 왜 언이 규연을 밀어냈는지, 왜 많은 것을 들키고도 끝까지 마음을 부정했는지, 그리고 왜 휘하에 있는 흑의적이 언을 공격했는지.

‘다 끌어안고 죽을 작정이셨단 말입니까.’

좀처럼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해결된 순간, 규연의 마음은 부서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 공허하게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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