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 *
규연은 유월을 살려 제 위치로 데려왔다. 그러고는 언이 규연의 침전을 찾도록 기별을 넣으라고 명했다.
봐야 했다. 정말 언이 찾아오는지,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는지, 대체 무엇을 하다 가는지.
잠든 척 살피기 위해 구절초차에 적신 면포를 준비했다. 이를 눈 위에 가려 규연이 깨어 있다는 사실을 감출 생각이었다.
“절대 어색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전하께서 낌새를 알아차리셔서는 안 돼.”
“예, 마마. 필히 명심하겠사옵니다.”
규연은 언의 솔직한 마음을 확인하고자 했다. 들켜서는 안 됐다. 그래서 몇 번이고 유월을 단속했다. 규연에게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언은 앞으로 통명전 근처로도 찾아오지 않을 터였다.
“전하께 소식을 넣겠사옵니다, 마마.”
“그래.”
유월이 침방을 벗어나고, 규연은 자리에 누워 면포로 눈을 가렸다.
언이 알려 준 이 방법은 참 신기하게도 언이 있을 때만 효과를 봤다. 그가 떠난 뒤로 몇 번이나 눈 위에 올려 봤지만, 그럴 때마다 뜬눈으로 아침 해를 맞이했다.
꼭 언이 아니면 누구도 규연을 달래고 재울 수 없음을 확인시키듯,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다정했던 날의 기억이 밀려오자 규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껏 어떤 마음으로 규연을 바라보았을지, 규연을 밀어내려 애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안 돼. 울면 들킬 거야. 참아야 해.’
규연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 냈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됐다. 오늘만이 유일한 기회였다.
“분명히 잠들었더냐.”
“예, 전하. 귀비탕을 드시고 잠드셨습니다.”
“……결국 약을 먹었다는 말이더냐.”
“내내 주무시지 못했습니다. 약을 드실 수밖에요.”
“하……. 그래. 알겠다.”
정말 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들어도 그리운 목소리가 들리자 규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 언에게 들키고 마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박동이 요동쳤다.
침방의 문이 다시 닫히고, 언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금침 맡에 언이 앉았다. 규연이 사랑해 마지않는 언의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간질였다.
“이제 약이 아니면 잠들지 못하는 겝니까.”
상황을 모르는 언은 규연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언은 경춘전에 갔던 날 이후로 더 이상 규연을 찾지 않기로 다짐했다. 규연이 모든 진실을 알기 직전이었기에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기도 했고, 언 스스로가 더 이상 흔들려서는 안 됐기에 거리를 두어야 했다.
그런데 오늘 유월에게서 기별이 왔다. 내내 잠들지 못했다는 소식만 들려왔는데, 오늘은 잠드셨다며 다급한 연통이 날아온 것이다.
언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접으려 했다. 규연의 불면이 시작되면서 자주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전이라면 얼른 달려와 얼굴을 보고 갔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어차피 덜어 내야 할 마음이었다. 규연이 궁에 들어온 이래 매일같이 실패하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내야 했다.
마마께서 무척 미령하십니다.
그런데 유월이 적은 한마디가 기어코 언을 또 이끌었다.
언에게 규연은 지독한 약점이었다. 규연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녀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모든 이성이 마비됐다.
‘그래. 마지막이다. 오늘이 끝이야.’
결국 언은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는 통명전으로 달려왔다.
“오늘이 끝입니다. 더 이상 이리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해서 그냥 나 홀로 인사를 건네러 왔습니다.”
언은 항상 잠든 규연을 향해 그의 마음을 속삭이고 떠나고는 했다.
규연이 깊이 잠들었을 때만 찾아오는지라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도 똑같으리라 여겼다. 유월이 들킨 것도, 규연이 깨어 있는 것도, 조금도 알지 못했다.
“내 실수입니다. 그대가 얼마나 영민한 여인인지 알면서, 내가 실수를 했어요. 파자를 그리 볼 줄은 몰랐는데. 또 내 마음이 흘러넘친 탓이지요.”
“…….”
“그대가 내 말을 믿지 않아도 소용없습니다. 이제는 멈춰야 해요. 이제 옛 기억은 묻어 두어야 합니다.”
“…….”
“내가……. 참 모진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몹쓸 짓도 많이 했고. 하니 그런 것만 기억하고 나를 실컷 욕하세요. 분이 풀릴 때까지 욕하다가 그렇게 잊으면 됩니다.”
언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는데, 꼭 우는 것처럼 느껴지는 슬픈 미소였다.
“그대가 있으면 내가 약해집니다. 더 큰 꿈을 꿔야 하는데, 더 많은 이들의 행복을 위해 내가 나아가야 하는데, 그대만 보면 그냥 여기서 멈추고 싶어요.”
“…….”
“백성이고 뭐고 내 알 바가 아니고, 영상이 어떤 짓을 벌이든 간에 그냥 이곳에서 그대와 편히 사랑하며 살아가는 미래를 그리게 됩니다. 우리를 닮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미래를 말이에요. 우리가 몇 해 전에 그렸던 그런 미래를.”
언이 떠나갈 생각이었으니 규연을 밀어낸 것도 있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규연의 존재가 언을 무르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규연을 보고 있으면, 그를 집어삼킨 운명의 소용돌이가 어떻든 그냥 다 제쳐 두고 규연만을 끌어안고 싶어졌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복수도, 형들의 복수도, 동생에게 물려줄 새 나라도,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모든 게 한스럽고, 다 포기하고 싶어지고, 그냥 규연에게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이면서 꽃밭에 머물고 싶어졌다.
그래서 규연을 더욱 밀어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이 이전으로 돌아오라며 눈물지을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고, 제발 자신이 알던 연성 대군의 모습으로 돌아오라 간청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답답해지는데, 차마 진실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죽을 자를 사랑해 달라고 청하는 건,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일이었으니까.
“항상 생각했습니다. 누구 도술이라도 부릴 줄 아는 자를 찾아와서 그대의 기억을 지우고 싶다고.”
“…….”
“그러면 그대는 조금도 아프지 않을 테니까. 나와의 시간 때문에 가슴에 피멍이 새겨지지 않을 테니까.”
매일같이 바랐다. 누구든 규연의 기억을 지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너무 소중한 추억이라 언은 차마 놓을 수 없으니, 규연에게서만 지워 고통을 덜어 주고 싶다고.
그러나 하늘은 언의 뜻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고, 언과 규연 모두 그 어떤 고통으로부터도 해방되지 못했다.
“잊고 사세요.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힙니다. 그대는 안전할 테니까. 그냥 다 잊고 더 행복해지세요.”
“…….”
“절대 나를 용서하지도 말고요.”
언은 마지막 바람을 전한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규연에게 닿지 못할지언정, 그의 마지막 전언은 전했으니 조금이나마 미련을 덜 수 있었다.
“대체…….”
그가 침방을 빠져나가자마자 규연이 몸을 일으켰다. 눈을 가렸던 면포를 치워 내고, 금침에서 벗어나 밖으로 향했다.
걸음이 빠른 언은 어느새 통명전 뒤쪽의 화계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세심한 손길로 화계의 꽃을 보살폈다.
규연은 숨죽인 채 그 모습을 눈에 아로새겼다. 언에게 그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들켜서는 안 되기에 기둥에 반쯤 숨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한참이나 화계를 찬찬히 돌보던 그는 꼭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꼼꼼하게 바닥을 살폈다.
그러더니 작은 돌부리 하나를 찾아내 조약돌을 뽑아내고는 땅을 골랐다.
“설마…….”
규연이 무언가 짐작하며 등을 돌렸다. 그 뒤에는 유월이 함께 서서 언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 마마. 전하께서 화계를 직접 꾸리셨습니다. 꽃을 심으신 것도, 계절에 맞춰 꽃을 바꾸신 것도, 전부 전하십니다. 밤마다 그리하셨어요.”
유월의 말에 규연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꿈에도 그린 적 없었다.
그저 성실하디성실한 궁인 하나가 상전의 기쁨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만 있다고 생각했다.
‘하얀 연산홍…….’
규연은 그제야 왜 그녀가 좋아하는 꽃들로만 화계가 가득 찼는지 이유를 알아냈다.
그저 신기한 우연이라고만 여겼건만. 언이 꾸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혹 기억하시는지요? 마마께서 입궁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화계 앞을 구경하시다가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실 뻔한 일을요.”
“……기억하네.”
“마마께서 하루를 어찌 보내시는지 낱낱이 보고하라 명하셨기에, 소인이 그 이야기도 전하께 모두 전했사옵니다. 마마께서 넘어지실 뻔한 일이 있었노라고요.”
유월의 말을 듣던 규연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다시 언이 서 있는 곳을 응시했다.
그는 여전히 꼼꼼하게 땅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이제 다 확인한 것인지, 돌을 뽑아냈던 곳을 발로 꾹꾹 누르고는 그의 침전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뒤로 이곳을 찾으실 때마다 땅을 살피셨습니다. 혹 마마께서 또 넘어지시는 일이 없게요.”
“…….”
“해서 저희 궁녀들이 화계 앞 땅을 살필 일이 없었사옵니다, 마마. 이유를 모르는 자들은 꼭 도깨비가 사는 것 같다며 신기해했지요.”
“…….”
“그 도깨비가 전하셨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규연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언이 멀어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던 규연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제발 이전처럼 돌아오라고, 제발 그 광증을 이겨 내시고 예전의 눈으로 자신을 봐 달라고 청하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알아보지 못했구나. 그냥 내가 알아채지 못했어.”
단 한 번도 언의 마음은 변한 적이 없었음을 확인하는 과정은, 규연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