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 *
“송구합니다, 전하. 대비마마께서 중전마마만 들이시라고 명하셨습니다.”
언과 규연 모두 빠르게 경춘전으로 향하자 연 상궁이 어찌할 줄 몰라 하며 언에게 대비의 명을 전했다.
“나는 들이지 말라?”
“송구하옵니다, 전하. 어의 영감의 말을 들어 보니 마마께서 조금 전 연회에서 피를 보신 것에 놀라 옥체가 미령해지셨다 합니다. 마마께서도 전하를 보시면 피가 떠오를 듯하다 하시어…….”
연 상궁은 혹여나 언의 화가 그녀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며 한껏 몸을 숙였다. 대비의 뜻이 원체 완강해 차마 언을 안으로 들일 수 없었다.
“신첩이 마마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말씀드릴 터이니 조금만…….”
“내 주상을 볼 일 없으니 중전만 안으로 들어오세요!”
규연이 대비를 달래 보겠다며 이야기하자마자 문 너머에서 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파 쓰러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에서 언을 향한 분노가 느껴졌다.
언은 피식 웃으며 규연에게 들어가라 고갯짓했다.
“저리 완강하신데 무슨 설득을 합니까. 중전이나 들어가 보세요.”
“중전! 어서 들어오라니까!”
양쪽에서 닦달이 이어지자 결국 규연이 먼저 침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를 확인한 언이 뒤를 돌아 멀어지려 하자 대비의 목소리가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주상은 거기 서 있으세요! 어디 내 허락도 없이 먼저 자리를 뜨려 합니까?”
한동안 경춘전과는 일이 없어 잊고 있었건만, 잔뜩 심술을 부리는 대비의 목소리를 들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바마마께서 계비를 들이신단 말씀입니까?〉
〈비워 둘 수 없는 자리이지 않더냐. 어마마마께서 떠나신 지도 어언 두 해가 지났으니.〉
둘째 형인 호산 대군이 계비가 들어올 예정이라며 소식을 전했던 때가 아직도 생생했다.
아무런 사랑 없이 시작된 결혼이었으나 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금슬이 좋았다. 집안도 탄탄한 데다가 아들도 넷이나 낳은 중전은 그 입지가 무척 공고했고, 선왕이 흔들릴 때마다 그의 버팀목이 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왕을 무력화하고 그 권력을 쥐려던 영의정은 그런 중전의 힘을 잘 알기에 이부터 치워 내려 했다.
그래서 중전의 약에 독을 타기 시작했고, 결국 중전이 먼저 병을 얻어 떠나갔다. 사실 언은 어머니까지도 영의정의 손이 닿았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해치우기 위해 정보를 모으면서 진실을 알게 됐다. 아직도 그날의 분노가 생생했다.
어머니가 떠난 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사랑하는 부인을 잃은 선왕은 서서히 무너졌고, 결국 영의정의 손에 쉽게 바스러졌다.
‘내가 어마마마를 지킬 수 있었다면, 우리가 어마마마를 지킬 수 있었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겠지.’
곱씹을수록 언의 입이 썼다. 그는 참 강하고 따뜻했던 여인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밀려오니 영의정을 향한 분노가 더욱 짙어졌다. 언의 모든 것을 앗아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자였다. 반드시 그의 손으로 벌하고 말리라는 의지가 타올랐다.
〈어찌 되었든 신첩 역시 영의정의 핏줄이니 그 피가 미워 신첩을 내치시려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겠지요.〉
영의정을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조금 전 규연이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우습게도, 언은 규연을 보며 영의정의 핏줄이니 어쩌니 하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다.
영의정의 질녀였다. 결코 멀지 않은 사이였다. 그런데도 한 번도 규연의 얼굴 위로 그 더러운 피를 겹쳐 본 적 없었다.
‘그리 연결하려는 생각을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내 마음이 큰 것이겠지요.’
언이 규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녀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증과도 같았다.
언은 두 눈을 감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더 이상은 규연에게 흔들려서는 안 됐다. 고지가 코앞이었다.
“대비마마께 잘 추스르시라 전해라.”
생각을 정리한 언은 대비의 명령이 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경춘전을 벗어났다.
대비가 목소리를 높이는 게 느껴졌지만, 알 바 아니었다.
규연이 또 그를 붙잡기 전에, 대비를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고 마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짙어지기 전에, 서둘러 멀어져야 했다.
* * *
“하…….”
침전으로 돌아온 규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비의 푸념을 받아 낸 뒤, 다급하게 언을 찾아갔으나 그는 규연을 만나 주지 않았다.
전각 앞에 서 있는 것조차 불허했다. 어찌나 단호하게 명령을 내려 놓은 건지, 상선은 물론이고 이경마저도 돌아가시라며 규연을 말렸다.
슬쩍 비치는 마음은 그저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향한 미련일 뿐이라는, 영의정을 내칠 때 규연 역시 내쳐야 하니 그의 미래에 규연이 없는 것이라는 말은 믿지 않았다.
그저 영의정에게 퍼부을 수 없으니 규연에게 퍼부은 것이라는 말이 아주 조금 규연을 흔들었으나 찰나였다.
규연은 그녀를 향한 언의 연정을 의심하지 않았다.
“정 상궁은? 어찌 보이지 않지?”
어떻게 해서든 언을 만나야 하니 방도를 찾아야 했다. 정 상궁과 함께 말을 해 보려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마마!”
마침 정 상궁이 다급하게 침방 안으로 들어왔다.
대체 어디를 갔던 것이냐 물으려던 규연이 정 상궁의 얼굴을 보고 말을 삼켰다.
표정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정 상궁? 무슨 일인가?”
“침전의 궁녀 하나가 몰래 돈을 받는 모습을 보았다 하여 살피고 오는 길입니다.”
“침전의 궁녀가 돈을 받아?”
“예, 마마. 분명 마마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파는 것일 테니 이 잡듯 뒤져 그 궁녀가 누구인지, 돈을 어떤 연유로, 누구로부터 받았는지를 알아냈습니다.”
정 상궁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고, 듣고 있던 규연의 표정 역시 어두워졌다.
누구든 적의 눈과 귀가 될 수 있는 게 궁이었다. 규연 역시 이를 잘 알았다.
그래서 침전의 궁인들을 꾸릴 때 무척이나 공을 들였다. 절대 꼬임에 넘어가지 않을 자를 골랐고, 신망이 두터운 자를 골랐다. 그렇게 지금껏 탈 없이 잘 유지하고 있다고 믿었건만. 침전의 궁녀 하나가 말을 옮겼다는 소식에 착잡함이 밀려왔다.
“숙부일 것 아니냐.”
규연의 정보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자야 불 보듯 뻔했다. 규연이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송구하오나 아닙니다, 마마. 해서 놀라 이리 바로 달려왔사옵니다.”
“숙부가 아니라고?”
“예, 마마.”
“숙부와 닿아 있는 다른 자도 아니고? 성빈이라거나. 이판이라거나.”
“아닙니다.”
정 상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면 누구란 말이냐?”
규연은 그럴만한 자가 없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크게 숨을 고른 정 상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십니다, 마마. 전하께서 궁녀를 이용하셨습니다.”
* * *
규연은 언이 배후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유월이 잡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궁녀들이 머무는 숙소 뒤편에 있는 허름한 암자에 유월이 묶인 모습으로 규연을 맞이했다. 궁녀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끌려가 상궁의 심문을 받는 곳이었다.
유월은 힘이 빠진 채 축 늘어져 규연을 바라봤다. 인사를 올릴 힘도 없어 보였다.
“모두 물러가거라. 암자에서 이십 보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도록.”
모두가 한바탕 심문이 또 이어지리라 예상했건만, 규연은 되레 암자를 비우라 명했다.
정 상궁도 놀라 규연을 바라봤고, 의자에 묶여서 고통을 기다리던 유월 역시 화들짝 놀라며 규연을 바라봤다.
“물러가라 명하지 않았느냐.”
“예, 마마.”
결국 정 상궁을 비롯한 몇몇 궁인들이 암자 밖으로 향하고, 규연만 홀로 남아 유월을 마주했다.
“듣는 이가 없다. 나뿐이야. 하니 솔직하게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벌하지 않고 풀어 주겠다.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을 게다.”
규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유월에게 물었다.
“전하께서 내 무엇을 살피셨느냐. 네게서 무엇을 알아가려 하셨지?”
“…….”
“네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기회를 놓칠 셈이더냐.”
유월의 눈이 흔들렸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갈등하는 게 보였다. 그러다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잘게 떨더니, 마른 입술을 떼고 갈라진 목소리로 진실을 고했다.
“마마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 하셨습니다. 식사는 잘하셨는지, 잠은 잘 주무시는지, 힘들어하시는 것이 있는지.”
“……언제부터?”
“입궁하셨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요.”
언이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 규연을 살피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당의 아래로 맞잡은 규연의 손이 떨렸다.
“그게 전부더냐. 또 네게 무엇을 부탁하셨지?”
“마마께서 잠드셨는지를 늘 확인하셨습니다. 잠드시면 꼭 전하께 기별을 넣도록 명하셨습니다, 마마.”
“내가 잠들었는지 확인하셨다고? 어째서?”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규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마마께서 잠드셔야 전하께서 오시어 살피고 가실 수 있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규연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고요함을 유지하고자 애썼던 그녀의 호수에 커다란 바위가 던져졌다.
“마마께서 잠드시면, 궁인들의 번이 바뀌는 시간에 맞춰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들어오실 수 있도록 침방의 문을 여는 것도 소인의 몫이었습니다.”
“…….”
“전하께서 자주 찾으셨습니다, 마마. 지금껏 말씀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유월이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규연은 맞잡았던 손을 풀고 툭 떨어뜨렸다.
‘이리 금방 들통날 거짓말은 어찌하십니까, 전하.’
애초에 믿지 않았던 말은, 금세 거짓임을 드러내며 규연을 뒤흔들었다.
손에 앵두가 놓였던 그날 이후로, 언이 규연을 잊은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