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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42/68)

42화

언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규연만 눈물 젖은 눈으로 언을 바라봤다.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조차 아득했다. 흑의적의 방을 전부 들여다본 것이냐고, 어디서 그 방을 구해 보았냐고, 어쩌다 파자를 떠올려 알아본 것이냐고, 물어야 할 것은 많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규연이 진실에 가까워지리라는 것도 예상치 못했지만, 그중에서도 흑의적의 일을 알아보는 건 꿈에도 그린 적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흑의적의 방을 들여다보는 것도, 그 안에 숨겨진 파자를 알아내는 것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하. 한번 살펴 주시지요.〉

언은 방마다 적어 넣을 문장을 살폈던 날을 떠올렸다.

〈겨울을 참고 견디어 내니 재앙의 빌미가 되는 악의 무리가 흩어지고 봄의 수풀이 우거지는구나.〉

〈어떠신지요?〉

〈훌륭해. 뜻이 전해지기에 충분하구나.〉

폐단이 사라지며 고통스러운 겨울이 물러나고, 새 왕이 새봄을 가져오리라는 뜻을 전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언은 수고했다며 윤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를 떠나보낸 뒤 다른 일을 살피다가 문득 다시 문장이 떠올랐다. 언은 다시 유심히 문장을 들여다봤다.

〈겨울이라.〉

언에게 겨울은 특별한 계절이었다. 본래는 그저 춥기만 한 계절이었는데, 규연을 만난 뒤로는 특별해졌다.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그녀를 만났다. 찬 바람이 불어올 때면, 그리고 눈이 내릴 때면, 항상 규연의 손에 앵두를 쥐여 주던 순간이 떠올랐다.

언은 겨울이라는 글자를 빤히 바라보다 문장을 채운 글자의 자획을 나누었다. 규연을 생각하다 보니 파자가 떠오른 탓이었다.

〈파자 놀이를 좋아합니까?〉

〈네. 아버지께서 무척 좋아하셨거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저를 붙잡고 자주 하곤 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저도 좋아하게 되었고요.〉

아버지와의 추억을 말하며 싱긋 웃던 규연의 미소가 생생했다.

〈참 잘했는데. 아버지께서 감탄하실 정도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글자를 나누고 합치던 규연이 떠오르니 언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다 이내 현재의 상황을 깨닫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깊숙이 묻어야 할 추억이었다.

〈아. 함도가 만들어지는구나.〉

규연을 그만 떠올리겠다며 선택한 게 파자였다. 이 또한 규연과 닿아 있음을 알면서도, 아닌 척하며 자획을 나누고 합쳤다.

그러다 보니 ‘함도’가 보였다. 앵두의 다른 말이 보이고 나니 자연스레 눈을 찾게 됐다. 겨울이라는 글자는 이미 있으니, ‘눈’만 만들어 내면 눈 오던 겨울날의 함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글자를 비로 대신하면…….〉

흩어진다는 글자 하나만 바꾸니 파자로 나누어 합쳤을 때 ‘눈’이 만들어졌다.

글자 하나를 고친 덕에 다소 비유에 기대는 표현이 되었지만, 뜻을 전하기에는 아무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봄날의 수풀과 연결되기에는 이편이 나았다.

잠시 망설이던 언은 붓을 들어 붉은 염료에 적신 뒤, 글자를 바꾸어 적었다.

〈……볼 리도, 보면서 파자를 할 리도 없을 테니까.〉

규연이 볼 방도가 없었고, 설령 본다 한들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리라 확신했기에, 언만의 작은 흔적을 남겼다.

그런데 그 흔적이 독이 되어 돌아왔다.

“숙부의 눈을 피해야 하니 폭군의 가면을 써야 한다는 것도 알겠고, 광증이 있는 것처럼 꾸며 낸 것도 알겠고, 양귀비에 취한 척 행동하신 것도 다 알겠습니다. 그 이유를 다 알겠어요.”

“…….”

“한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왜 전하께서 신첩을 그리 밀어내려 하셨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규연은 언을 바라보며 내내 고민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저 신첩이 미웠던 것이라면. 어찌 되었든 신첩 역시 영의정의 핏줄이니 그 피가 미워 신첩을 내치시려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겠지요. 정이라는 것은 참 신기하고 무서워서 불같이 타오르다가도 쉬이 꺼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

“하나 아니시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이리 신첩을 아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규연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갔다.

“전하께서 뒤에 계신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전하 역시 폐단이라 주장하시는 것도 다 알겠습니다. 그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 신첩과 관련된 일만큼은…….”

언은 무어라 입을 떼지 못하고 규연을 바라보기만 했다.

“전하께서 숙부를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그리려 하심을 아는데, 그 마음을 이제는 알겠는데, 왜 그 나라에 신첩이 없는지 말씀해 주세요.”

규연은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로 연신 물었다.

언은 손을 뻗어 눈물을 훔쳐 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영민한 여인이었다.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의심을 품은 순간 궁 밖을 살피고, 흑의적을 발견하고, 그 방을 들여다보고, 언의 흔적을 찾아내 그의 가면과 그 너머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총명한 여인이 언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죽으리라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구나. 내 옆에 죽음을 붙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구나.’

이유는 하나였다. 규연은 언이 죽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규연의 그림에는 무조건 언이 있었다. 무엇을 그리든, 그녀는 절대 언을 지우지 않았다. 그래서 언이 무엇을 하려는지 정확히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그리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실 겁니까?”

규연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언은 입술을 달싹일 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아직도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부인한다 해서 믿을 규연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언이 잘 알았다. 파자까지 본 이상, 언이 아무리 마음을 접었노라 이야기해도 코웃음 칠 게 빤했다.

언이 규연의 상황이라도 그리할 터였다. 규연을 속이기에는 마음이 너무 많이 흘러넘쳐 버렸다.

하지만 잠자코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인정할 것이었다면, 순순히 사실을 밝힐 것이었다면, 그리 긴 시간 서로의 가슴에 대못을 박으면서 버둥거리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언은 끊임없이 부정하고 또 부인해야 했다.

규연이 언의 죽음을 그려 내지 못하도록 지금처럼 막아야 했다. 만약 규연이 언의 마지막까지 알아낸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막을 게 분명했다.

“그 파자는 내 미련이었습니다. 내가 왕위에 오를 줄 몰랐던, 그 시절에 대한 내 미련.”

한참이나 말을 고르던 언은 가까스로 입을 뗐다.

“나는 영의정을 내칠 겁니다. 영의정이 나라 곳곳에 뿌려 놓은 폐단을 뿌리째 뽑아낼 겁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

“중전이 잘 말했어요. 사람의 정이라는 것은 참 우스워서, 당장 어제는 없으면 죽을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식어내려 덤덤해지지요.”

“…….”

“우리는 분명히 서로를 아꼈지만, 그대는 영상의 핏줄입니다. 나를 이토록 괴롭게 만든 사람의 질녀지요.”

영의정의 이야기를 꺼내자 규연의 눈이 흔들렸다.

“중전을 보면 영상이 떠올라요. 해서 괴롭습니다. 그리고 영상을 내치고 나면, 중전 역시 함께 떠나야지요. 나는 영상의 흔적이 조금도 남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조금도.”

지금으로서는 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거짓말이었다. 영의정이 엮여 있으니 너와의 미래는 그릴 수 없다는 말로 규연의 눈을 가리려 했다.

“마음이 식어 내리신 분이 신첩을 살리려 대신 칼을 맞고, 아무렇지 않게 유리 위를 걸으십니까? 대체 어떤 사내가 그리한단 말입니까?”

“그 시절의 기억이 있으니 중전이 다치는 게 싫을 뿐입니다. 그게 전부예요. 내게 그 정도의 정은 남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언은 한 번 숨을 고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마음이 있는데도 이를 감추려 중전을 밀어낸 적 없습니다. 나는 그저 진심으로 중전을 못나게 대했을 뿐입니다.”

“…….”

“영의정에게는 당장 퍼부을 수 없으니까. 그냥 중전에게 쏟아 낸 거예요. 아마 앞으로도 그리하겠지요. 그뿐입니다.”

억지처럼 들려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사실 네가 옳다고,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하고 있고, 지금껏 거사를 위해 부정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규연은 언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그래야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언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착각은 접어 두고 이만 돌아가세요.”

언이 매정하게 돌아섰는데도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규연이 여전히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상선. 들어와 중전을 데리고 나가거라.”

언은 여전히 뒤를 돈 채로 밖에 있을 상선을 찾았다. 언이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상선이 해결하는 게 더 나았다.

“상선. 내 명하지 않는가.”

그런데 상선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대답도, 발소리도, 무엇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상선!”

결국 참다못한 언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문이 벌컥 열렸다.

“저, 전하!”

급히 달려온 상선은 난장판이 된 편전을 보며 경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규연은 석상처럼 굳어 울고 있고, 언의 버선에는 피가 묻어 있으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무슨…….”

“대체 몇 번을 불러야 들어오는 겐가! 지금 당장 중전을 데리고 돌아가게.”

언은 규연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상선을 바라보고는 역정 섞인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상선이 규연을 데려가는 대신 다급한 목소리로 언에게 소식을 전했다.

“송구하오나 전하께서도 마마께서도 당장 경춘전으로 향하셔야 할 듯하옵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언과 규연 모두 상선을 바라봤다.

“대비마마께서 쓰러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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