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68)

41화

* * *

“전하. 어찌 중전마마와 소신을 함께…….”

연회가 아수라장이 되어 마무리되자마자 언이 영의정과 규연을 편전으로 불러들였다.

영의정이 연유를 묻기도 전에 도자기 하나가 날아들었다. 영의정의 얼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백자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어찌 불렀겠는가? 어찌 불렀겠냔 말이야!”

언은 익선관을 내던지고, 눈에서 불을 뿜으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영의정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규연은 눈치를 챘고, 영의정은 언이 흔들리는 찰나를 봤다. 언은 이를 가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규연의 믿음에도 균열을 만들어야 했고, 영의정의 의심도 지워야 했다. 언에게 총기 따위는 없는 양, 그저 비참하고 미련한 폭군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시켜야 했다.

“내가 왕위에 올랐을 때, 자네가 뭐라 했는지 기억하나? 내 목숨을 지켜 주겠노라 이야기했네. 영상 말만 잘 들으면 그리 만들어 준다고 말이야. 한데 지금 이 꼴이 뭔가? 내 탄신을 축하해 주러 모인 이들 앞에서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어!”

언이 고함치자 영의정의 눈매가 날카롭게 벼려졌다.

“탄일이니 많이 챙겨 주겠다던 양귀비는 하나도 주지 않고, 오늘 목숨을 잃을 뻔하고. 이게 대체 뭐냔 말일세!”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이러신다고…….”

“상선! 당장 편전의 문을 잠가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전각의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절대 나가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뜻을 비치자 영의정이 항상 쓰고 있는 여유로운 가면에도 균열이 생겼다.

“목숨을 구해 준다고 했잖아. 절대 죽지 않게 해 준다고 했잖아. 절대 아바마마처럼, 큰형님이나 작은형님처럼 죽게 하지 않겠다고 내게 약조한 건 영상 자네였어.”

어느새 영의정의 코앞까지 다가온 언은 혹여나 죽을까 두려워 미치겠다는 얼굴로 영의정을 닦달했다.

그의 멱살을 잡듯 옷깃을 쥐고서는 말을 퍼부었다.

“또 누군가 들어와서 내 목을 노리면? 그땐 어떻게 책임질 건가? 응? 살려 준다 했으면 끝까지 약조를 지켜야지. 오늘 내가 저리 허무하게 죽을 뻔한 게 말이 되냐는 말일세!”

영의정은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가 흔들리면서도 언을 살피려 애썼다.

그는 분명 과거의 연성 대군이 보였던 찰나를 마주했고, 그 찰나가 우연인지 아닌지 알아내야 했다.

안 그래도 흑의적의 배후로 언을 의심하고 있는 지금, 분명하게 판단해야 했다.

“혹시 자네가 그 광대를 궁으로 불러들였는가? 응? 설마 자네가 꾸몄어?”

“전하. 어찌 소신이 그리했겠사옵니까. 그랬다면 광대 무리가 소신에게 활을 겨누었을 리 없지요.”

“하면 왜? 왜 찾아와 내게 화살을 쐈지? 대체 왜? 나는 자네가 하라는 대로만 하고 있는데? 왜?”

언은 정말 미친 사람처럼 눈을 희번덕대며 영상을 몰아세웠다.

“아니야. 자네가 거짓을 고하는 게 분명하네. 자네가 나를 죽이려 했지? 그런 게지? 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응?”

그러더니 영의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영의정은 물론이고 규연마저도 휘둥그레진 눈으로 언을 바라봤다.

“살려 주게. 나는 살고 싶어. 나는 형님들처럼 죽고 싶지 않네, 응? 자네는 살릴 수 있잖아. 나를 왕으로 만들었으니, 나를 죽이려는 자들로부터 지킬 수도 있잖아. 맞지? 응?”

언은 영의정만이 동아줄이라도 된다는 듯, 그의 옷을 잡고 계속 매달렸다. 그러자 언을 바라보는 영의정의 눈동자가 탁해졌다.

‘괜한 의심을 했군.’

만약 흑의적 뒤에 언이 있다면, 무슨 연유로든 슬슬 존재감을 나타내려 한다면, 언이 이렇게 영의정 앞에 납작 엎드릴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가면 뒤의 고고한 모습을 드러내며 슬슬 영의정을 위협해야 옳았다. 그러나 지금 마주하는 언은 누가 봐도 진심으로 목숨이 날아갈까 두려워하고 있었고, 영의정에게 보호받기를 원했다.

영의정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잠시나마 언을 의심했던 사실을 비웃고는 이내 말을 이었다.

“소신은 목숨을 바쳐 전하를 지킬 것이옵니다. 소신이 그리 맹세하지 않았사옵니까, 전하. 너무 염려 마십시오. 마음이 허하실 터이니 소신이 양귀비를 대령하겠나이다.”

다시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영의정은 사람 좋게 웃으며 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왕을 일으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듯, 위계가 뒤집힌 이 굴욕의 순간을 한껏 즐기겠다는 듯, 그저 싱긋 웃으며 언을 아랫것 대하듯 다뤘다.

“하니 상선에게 명해 문을 열어 주시지요. 소신이 나가야 양귀비를 얻어 오지 않겠사옵니까? 최상품으로 준비했으니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시기 쉬울 것이옵니다.”

“알겠네. 대신 많이 가져오게. 알겠는가?”

“물론입니다, 전하. 명 받잡겠나이다.”

결국 언이 문을 열어 주자 영의정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돌아가는 길에 규연에게 눈을 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죽을 때가 되긴 했군. 알아채지 못하다니.’

언은 멀어지는 영의정을 보며 비웃었다. 끝까지 의심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물고 늘어질 법한 상황이건만, 영의정은 생각보다 쉽게 의심을 지워 냈다.

언이 그에게 이 정도로 엎드리며 정체를 감추려 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거사를 위해서라면, 영의정이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이런 굴욕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은 영의정의 눈을 가리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

영의정은 해결되었지만, 규연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규연은 영의정보다 훨씬 뒤쪽에 섰던 자리 그대로였다.

정이 떨어지고도 남을 장면이었다. 언은 그리되기를 원했다. 가면 뒤에 언이 있다는 믿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기를 바랐다. 저런 모습을 보니 어쩌면 규연의 기대와 달리 정말 폭군일지도 모르겠다고, 정말 양귀비에 정신을 먹혀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하기를 바랐다.

“중전에게는 경고하기 위해 불렀습니다. 한 번만 더 그리 내 뜻을 막아서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지아비이기 전에 왕이거늘. 감히 왕의 뜻을 거스르려 하다니.”

“…….”

“이제 되었으니 물러가세요. 나는 양귀비와 쉴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언은 혀를 끌끌 차고는 축객령을 내렸다. 그런데 규연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합니까? 돌아가라니까?”

언이 한 번 더 말했지만, 규연은 꼿꼿했다. 쉽게 감정을 읽어 낼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흑의적의 방에서 숨겨진 글자를 발견했을 때, 규연은 당장 언에게 달려가려 했다. 달려가서 물으려 했다. 규연 못지않게 언 역시 옛 시간에 살고 있으면서, 대체 왜 그렇게 모질게 규연을 밀어내려 하냐고. 조정의 폐단을 갈아엎은 뒤, 그저 평범한 주상과 중전으로 살아가면 될 일인데 왜 그 일에서 규연을 지워 내려 하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달려가는 대신 꾹 참았다. 또 마음 그대로 언에게 달라붙으려 하면, 언이 몇 발자국 더 멀어지리라는 점을 깨달은 탓이었다.

거리를 벌린 순간 찾아왔던 다정한 밤을 기억했다.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오늘 연회가 끝난 뒤에야 파자를 이야기하며 이유를 묻고자 했다.

그런데 영의정의 눈을 속이기 위해 무릎까지 꿇는 언을 마주한 순간, 마음속 어딘가가 무너져 내렸다. 참을 수가 없었다. 온갖 굴욕을 다 감내하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 미래에는 규연이 없는 것인지, 죽어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러가라니까 왜 말을 듣지 않습니까? 당장……. 중전! 뭐 합니까!”

언이 온갖 도자기와 물건을 다 던진 탓에 편전 바닥이 엉망이었다. 유리 파편이 사방에 가득했다.

규연이 언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바닥에도 유리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날카로운 유리가 버선을 뚫고 상처를 낼 게 분명했다.

“중전!”

몇 번이고 언성을 높여도 규연이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오자 결국 언이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앞에 섰다.

규연의 발에 유리가 박히는 꼴은 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지금 언의 발에는 상처가 났건만, 규연에게 다가오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규연은 그새 피가 번진 언의 흰 버선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 탓이었다.

“내가 그리 우스워요? 대체 왜 매번!”

“우습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모질게 밀어내시려면 끝까지 밀어내셨어야 합니다. 감추실 것이었으면 끝까지 감추셨어야 하고요.”

“…….”

“신첩이 유리를 밟는 꼴도 보지 못해 이리 달려오시면서 대체 무엇을 감추려 하신 겁니까?”

규연은 터지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언을 바라봤다.

“신첩도 우습습니다. 마냥 다정하시던 분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그것 하나만 보며 매달리느라 제대로 볼 생각을 못 했어요.”

“…….”

“전하를 따라다니기 급급해하며 그리 울 게 아니라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왜 저리 행동하시는지를 살펴보려고 움직이기라도 해야 했는데. 그러면 지금처럼 전하의 마음이 또렷이 보였을 텐데.”

규연은 입술을 깨물면서까지 눈물을 참아 내려 했지만, 결국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전하시면서. 신첩을 향한 마음을 여전히 품고 계시면서. 왜 전하께서 그리시는 미래에는 신첩이 없습니까? 왜 신첩은 함께할 수 없어요?”

“…….”

“신첩이 그 파자를 못 알아보리라 여기셨습니까? 눈 오는 겨울날의 앵두를요?”

규연이 파자 이야기를 전한 순간, 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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