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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40/68)

40화

“중전!”

순식간이었다. 이경이 바로 언의 앞을 막으며 날아오는 화살을 쳐 내고, 본래는 그 뒤에 서 있어야 할 언이 옆에 있던 병사의 검을 빼 들어 규연 앞으로 날아오던 화살을 동강 내 버린 건.

영의정을 향한 화살 역시 빗맞았다. 날아간 세 발의 화살은 하나도 적중하지 못했다.

“영상 대감! 괜찮으십니까? 아니 이 무슨!”

곁에 있던 이판이 사색이 되어 영의정을 살폈지만, 그는 놀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덤덤했다. 대신 날카로운 눈매로 언과 규연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화살이 날아올 때부터 비껴가리라는 점을 알았다. 방향이 어긋나 있었으니까. 이를 확인한 영의정은 바로 시선을 돌려 언을 바라봤다.

‘광기 어린 눈이 아니었다.’

찰나였으나 영의정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늘 그에게 보이던 탁한 눈이 아니었다. 영의정이 기억하는, 오래전의 연성 대군이 갖고 있던 총기가 분명 스쳤다.

“중전! 괜찮습니까?”

“예, 전하. 신첩은……. 신첩은 괜찮습니다. 전하께서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넋이 나갔던 규연 역시 언의 민첩함을 똑똑히 보았다.

규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기 위해 곧바로 다가온 모습 위로 지난번 보성사에서의 장면이 겹쳐졌다. 규연을 위해서라면 목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가 규연의 마음을 울렸다.

“나도 괜찮습니다.”

놀란 마음이 가라앉자 언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화살이 규연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에 이성이 마비되어 무작정 달려들고 말았으나 이리 행동해서는 안 됐다.

‘설마 영상이 보았나.’

특히나 이 자리에는 영의정이 있었다. 뱀 같은 사내가 지금의 언을 보았다면 큰일이었다.

“온 백성이 굶어 죽어 가는데 왕이라는 작자가 이리 술판이나 벌이고 있으니 참으로 우습다! 죽어 마땅한 자 아니냐! 죽어야 한다! 어찌 살아 숨 쉰단 말이냐!”

아찔함에 아득해졌을 때, 쏟아진 병사들에게 추포된 광대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고통스러워하는 포효처럼 느껴지는 소리에 언의 시선이 광대에게로 향했다.

“저 밖이 어떤 꼴인 줄도 모르고! 저 밖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 가는지 모르고! 이거 놓아라! 내 반드시 저 작자를 죽일 게다!”

광대는 계속해서 저항했고, 언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고통으로 얼룩진 눈에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그저 언을 향한 증오와 분노만이 가득했다. 어떤 꼴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듯, 그저 언을 죽이기만 하면 다 된다는 듯,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네 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이런 괘씸한 짓을 벌이느냐! 버러지만도 못한 천것이 감히 전하의 탄신연을 망쳐? 감히!”

영의정이 진심으로 격노한 듯,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며 광대에게 삿대질했다. 언은 곧바로 영의정을 바라봤다.

“무엇 하는가? 이는 반역이네! 감히 전하의 목숨을 노린 자 아닌가! 당장 베지 않고 무엇해? 어서 벌해야지!”

영의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편에 붙어 있는 호위청의 다른 별장 하나가 광대의 등을 베었다.

“크허억!”

“형선!”

이경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검을 휘두른 별장의 이름을 외쳤다. 주상의 명이 아닌 영의정의 명이었다. 그런데 호위청에 소속되었으면서 당당하게 영의정의 명령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니 피가 끓었다.

검에 당한 광대는 엄청난 양의 피를 뱉어 냈지만,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별장이 일부러 급소를 피한 탓이었다.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는 뜻이 선연히 비쳤다.

영의정을 살피던 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영의정이 무얼 하려는 것인지 보이니 또 치가 떨렸다.

피식 웃고만 언은 상 위에 놓인 술병을 입에 털어 넣고는 술병을 그대로 바닥에 던졌다.

“꺅!”

큰 파열음이 연회장에 울려 퍼지자 안 그래도 공포에 질려 있던 몇몇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언에게로 향했다.

“전하께서 격노하신 게 보이지 않느냐! 어서 더 베어라!”

영의정은 이에 질세라 다시 명령했고, 그의 명을 따르는 별장이 다시 광대를 쳤다. 이번에도 역시 바로 숨이 끊어지지 않게 휘둘렀다.

“크헉!”

“꺄악!”

그런데 그 순간, 언이 곁에 서 있던 이경의 검을 빼앗아들어 그 별장에게 던졌다. 장검은 그대로 별장의 몸을 관통했고, 그는 곧바로 숨이 끊어져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참 재미있지. 내가 어느 바닥까지 떨어졌기에 천한 광대는 내 목숨을 노리고, 나를 지켜야 하는 호위청의 별장은 내 명령도 듣지 않고 사람을 베어 낼까.”

평소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뱉어 낸 말에 서린 살기가 지독해서 규연과 이경은 물론이고, 영의정마저도 흠칫 몸을 떨었다.

“내가 죽어야 한다라…….”

언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광대 앞으로 나아갔다. 광대는 무릎을 꿇은 채 겨우 숨을 붙이고 있었다.

가여운 자였다. 쌓여 온 폐단에 고통받은 자일뿐이었다. 누구보다도 언이 이를 잘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 일이 벌어졌고, 왕의 목숨을 노린 대가는 행동한 자 그 자신의 목숨이었다.

언이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 그의 몸을 휘감고 있을 고통을 빠르게 덜어 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천것이 참으로 방자하기도 하지.”

언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광대의 숨이 끊기고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아버지! 아악, 아버지!”

뒤에서 포박되어 있던 어린아이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광대의 아들이었다.

“전하.”

언이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영의정이 언을 불렀다.

“본래 역모를 일으킨 자는 3대를 멸하는 법입니다. 어찌 저 천것의 씨를 살려 두시려는지요? 지금처럼 베어 넘기시지요. 하여 전하의 위엄을 세우십시오.”

검을 쥔 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영의정을 향한 지독한 분노가 또 한 번 그를 휘감았다.

영의정은 언의 광기를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그가 정말 광기가 가득한 폭군이 맞는지, 아니면 폭군인 척 꾸며 내고 있는지, 지금 언의 행동을 보며 판단하려 들고 있었다.

‘보았구나. 그 순간을.’

규연을 구할 때 잠시 드러내고 만 언의 모습을 본 게 분명했다.

죄 없는 아이를 베는 일이었다. 목숨을 노린 광대를 베는 일과 그 무게가 달랐다. 영의정은 언이 총기를 숨기기 전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했고, 그때의 영민함과 따뜻한 성정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언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베어야 했다. 언이 지금껏 감춰 왔던 시간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베어야 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지독한 모멸감이 언을 감쌌다. 죄 없는 어린아이를 해하는 건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안 됩니다, 전하!”

검을 든 채 비틀거리며 아이 앞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 둥근 단 위로 달려 내려온 규연이 그 앞을 막아섰다.

규연이 다가오는 줄 모르고 있던 언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뭐 합니까?”

“베지 마십시오, 전하. 이미 피를 많이 보았습니다.”

규연은 조금도 물러날 뜻이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하며 아이를 가렸다.

“전하의 탄일입니다. 전하께서 세상에 오신 날을 축복하고 축하하는 자리에 피를 잔뜩 보아 무엇 한단 말입니까. 액운이 들까 무섭습니다.”

“…….”

“일을 벌인 아비를 이미 벌했습니다. 어차피 그 일족으로 묶여 투옥되고 벌을 받을 것이 아니옵니까. 전하께서 직접 베실 필요 없습니다.”

규연이 끼어들어 일을 방해하자 영의정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이를 확인한 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숙부를 빤히 노려본 뒤, 다시 언을 바라봤다.

“신첩을 보아서라도 참아 주십시오, 전하. 탄신연을 피로 물들이다니요. 옳지 않습니다. 신첩은 하늘이 두렵습니다. 하니 신첩의 간청을 들어주십시오.”

언은 멍하니 눈앞의 규연을 바라봤다.

지금 규연은 언을 구하고 있었다. 언이 아이를 해치지 못하도록 핑계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언은 세상을 속이기 위해 틈만 나면 광증을 꾸며 냈고, 규연은 항상 대신 나서 여러 일을 수습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고, 지금의 모습 역시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언만은 이전과 지금의 차이를 또렷이 느꼈다.

이전에는 그저 언의 광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매달리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언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언이 그의 가면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도록, 규연이 방패가 되어 주고 있었다.

“정 베시려거든 신첩을 먼저 베십시오, 전하. 신첩은 전하께서 하늘의 노여움을 사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싶지 않사옵니다.”

규연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자 언이 쥐고 있던 검을 툭 떨어뜨렸다.

그러자 대신들 사이에서 숨을 크게 내쉬는 소리가 들려오고, 규연 역시 두 눈을 감으며 안도했다.

“…….”

하지만 뒤를 돈 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는 조금도 안도할 수 없었다.

막아서는 규연을 보며 언은 확신했다.

규연이 모든 것을 알아채 버렸다는 사실을. 규연이 언의 가면 너머를 또렷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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