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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39/68)

39화

* * *

“이판이 움직이는 놈들도 아무것도 못 알아냈습니까? 내가 부리는 놈들보다 뛰어날 것이라며 그리 자랑을 하더니?”

“……송구합니다, 대감. 어떤 쥐새끼인지 보통이 아닌 놈입니다. 제 휘하에 있는 자들이 이리 헤맨 것은 처음입니다.”

영의정이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이판을 질책하고, 이판은 애써 시선을 피하며 머쓱해하는 헛기침을 뱉어 냈다.

흑의적이 점점 더 요란하게 날뛰었다. 영의정의 곳간 중 다섯 곳이 털렸다. 어제는 궁에서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의 가마 위로 오물이 던져졌다.

던진 이를 곧바로 잡아 태형에 처했지만, 분은 풀리지 않았다. 영의정을 향한 백성의 민심이 얼마나 악화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장면이기에 더욱 화가 났다.

“나와 주상이 계속 표적이 되고 있는데, 주상은 거리로 나올 일이 없으니 내게 분을 풀겠다 이건가.”

영의정은 괘씸해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상에 펼쳐 둔 여러 개의 방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 언과 영의정을 욕하고 있었다.

‘배후가 뉘기에 이리 꼬리가 잡히지 않지? 대체 어떤 자가 이리 치밀하게…….’

생각에 잠겼던 영의정의 눈매가 갑자기 날카롭게 벼려졌다.

‘멍청한 왕은 나와 함께 표적이 되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게 연막이라면? 내 눈을 가리기 위함이라면?’

영의정은 지금껏 언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양귀비에 절어 가는 멍청이기도 했고, 계속 같이 표적으로 묶이고 있었으니 굳이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흑의적의 배후가 누구인지 이토록 잡히지 않고, 곳곳에서 치밀하게 준비한 흔적이 보이니 생각이 달라졌다.

보통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도, 보통의 지략으로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판.”

“예, 대감.”

“연성 대군이 기억나는가?”

“예? 갑자기 연성 대군은 왜……. 주상 전하께서 연성 대군이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때의 주상을 어찌 기억하고 있냐는 말이네.”

이판이 다소 당황하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말 그대로 무색무취였지요. 세자 저하나 호산 대군 대감에 비하면 여러모로 모자랐고요. 형보다 못난 아우. 그 자체이지 않았습니까?”

“그게 본모습이라 여겼는가?”

“……예?”

“내가 기억하는 연성 대군은 무서우리만큼 총명한 대군이었네. 고작 일고여덟인 아이에게서 볼 수 없는 모습이 보이곤 했으니까.”

영의정이 손가락으로 상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한데 머리가 자라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 모습을 감추더군. 존재를 철저히 지웠어. 심지어는 아우인 상평 대군보다도 보이지 않도록 말이야.”

“…….”

“왕이 될 수 없는 왕의 아들의 삶은 매일매일 줄을 타며 살아가는 것과 같지. 한 발자국만 잘못 디뎌도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네. 아마 그 사실을 깨우쳤을 게야.”

“…….”

“해서 살아남았고, 해서 왕이 됐지. 지금까지 죽지 않았고.”

이판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영의정을 바라봤다.

“상평 대군을 왕위에 앉히는 순간 내게 지독한 비난이 쏟아질 테니 연성 대군을 왕위에 앉혔네.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잘 알 테니까.”

“…….”

“하나 이면의 총명함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니 약에 취하게 만들었지. 양귀비를 잔뜩 주면서 말이야.”

“…….”

“한데 만약 그조차 피하고 있었다면…….”

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뚝 멎고, 이제야 뜻을 알아들은 이판이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영의정에게 물었다.

“설마 흑의적의 뒤에 전하가 계신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하나 대감께서도 그 광증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뭐 연기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를 일이지.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좀 살펴야겠네. 하나같이 도깨비가 아니고서야 분명 뒤에 서 있는 자가 존재할 텐데, 한양 곳곳을 쥐 잡듯이 뒤져도 나오지 않으니 이제는 궁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영의정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광기로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 봐야겠어.”

* * *

“어찌 그리 안색이 좋지 않은 게냐?”

대례복으로 갈아입던 중 언이 이경을 보며 물었다. 늘 곁을 지키는 이경의 안색이 무척 어두웠다.

시간은 빠르게 달려 언의 생일이 됐고, 오늘은 이를 기념하는 탄신연이 열리는 날이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날까 걱정하는 게야?”

환복을 마친 언이 궁인들을 전부 밖으로 물리고, 이경과 단둘이 남은 상태에서 한 번 더 물었다.

“어찌 답이 없어.”

백성들의 삶이 곤궁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려한 연회를 여는 것처럼 꾸며야 했기에, 연회의 규모가 상당했다.

궁에 적이 있는 일패 기생이나 의녀들은 물론이고, 한양에서 유명하다는 광대 패까지 모조리 불러들였다. 궁 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의 수가 상당했다.

이경은 이 점이 걱정됐다. 그는 가면 너머의 언을 알지만, 흑의적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언을 향한 백성들의 분노가 이전보다 뜨거워진 상태였다.

혹시나 뜻을 품고 일을 치려는 이가 있진 않을지 염려됐다.

“정말 호위를 더 강화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전하?”

침묵을 지키던 이경이 되물었다.

“별일 없을 것이라니까. 설령 일이 생긴다 해도 네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일 게다.”

“하나…….”

이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흐렸다.

꿈자리가 보통 뒤숭숭한 게 아니었다. 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데, 그런 언을 끌어안으며 우는 규연의 가슴에도 화살이 박혀 있는 꿈을 꿨다.

어찌나 생생했는지 이경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꿈자리도 영 좋지 않아 더 염려가 됩니다, 전하.”

“윤성이 들으면 실컷 놀렸을 이야기다. 그깟 꿈이 무엇이라고. 염려 말고 일에 집중하거라.”

언은 피식 웃으며 이경의 어깨를 두드린 뒤, 침전 밖으로 나갔다. 결국 이경 역시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하고 언의 뒤를 따랐다.

“주상 전하 납시오!”

언이 연회장에 나타나자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대소신료들이 모두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단상 위, 언의 자리 옆에 앉아 있던 규연 역시 대례복을 입은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언은 잠시 그 모습을 눈에 담은 뒤, 천천히 그의 자리에 앉았다.

“오늘 짐을 위한 연회에 이리 모여 주어 고맙네. 다들 마음껏 먹고 즐기도록 해. 내 아주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렸으니 말이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폭군의 가면을 쓴 언은 씩 웃으며 모든 대신의 반응을 살폈다.

조정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충신은 지독하리만큼 화려한 연회에 한숨을 내쉬었고, 이 상황이 그저 우습고 즐겁기만 한 간신들은 흡족하게 웃으며 저들끼리 신나게 말을 나누고 있었다.

잔을 높이 들어 올렸던 언은 이를 삼키며 영의정을 살폈다.

그는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언에게 묵례했다.

“전하.”

언이 그 모습을 비웃고 있을 때, 곁에 앉은 규연이 나지막이 언을 불렀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온데, 연회가 끝난 뒤 신첩의 침전에 드실 수 있으신지요. 감히 청할 것이 아님을 아오나 꼭 긴히 아뢰어야 해서 이리 말씀 올립니다.”

언의 시선이 향하자 규연이 빠르게 속삭였다.

“꼭 들으셔야 합니다. 반드시요.”

규연은 힘주어 말했고, 언은 그런 규연을 가만히 바라봤다.

맑은 눈에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무언가 알아낸 건가?’

조금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무엇이든 간에 꼭 언에게 말하고서 답을 듣고 말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언은 누구보다도 규연을 잘 알았다. 규연이 저런 눈으로 그를 바라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피해야 했다. 만약 규연이 또 무언가 낌새를 알아챈 것이라면, 무조건 피하고 그녀를 밀어내야 했다.

“오늘은 성빈의 침소를 찾을 겝니다. 하니 그런 청은 하지 마세요. 좋은 날인데 내가 어찌 중전의 침전을 찾겠습니까?”

모진 말이건만 규연의 낯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반응을 보고 언의 눈이 잘게 떨렸다.

이전이라면 분명 상처받은 기색으로 언을 바라보며 그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을 텐데, 지금의 규연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고 그저 빤히 언을 바라보기만 했다.

언이 왜 이러는지 안다는 듯한, 언의 마음이 어떤지 이미 알아 상관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

그 모습을 보고 나니 불안해졌다. 규연이 정말 진실에 가까워진 듯해 심장이 뛰었다.

끝이 보이고 있었다. 이 긴 지옥을 끝내기 직전인데, 이제 와서 들켜서는 안 됐다.

“기다리겠습니다, 전하. 신첩의 신변과 관련된 것입니다.”

규연은 자신의 신변과 관련한 것이라며 전하고는 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되레 언이 규연을 계속 바라봤다.

언은 규연의 안전에 대해서는 한없이 예민했다. 규연은 이제 이리 그녀의 목숨을 논하면 반드시 오리라 확신한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자신이 어떤 패를 쥐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행동하니 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허이!”

언이 당황하며 규연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가무가 벌어지던 중앙의 둥근 단 위로 광대 패 하나가 뛰어 올라왔다.

요란한 소리에 연회장의 모두가 단 위를 바라봤다. 언과 규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상 전하의 탄신을 감축드리나이다. 이리 천한 것까지 부르시어 춤판을 벌이게 해 주시니 하해와 같은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익살스러운 말투를 채 벗겨 내지 못한 채로 인사한 광대가 큰절을 올렸다.

그러더니 요란한 음악과 함께 광대 패의 줄타기와 춤판이 시작됐다.

한양 제일의 광대 패라는 소리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신나는 판이 벌어지자 연회장 곳곳에서 흥이 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의정마저도 꽤나 흥미롭다는 듯이 광대들의 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아, 이제 판을 바꾸어 볼까!”

“허이!”

광대 패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크게 외침과 함께 갑자기 광대들의 대형이 바뀌었다.

그 순간, 무언가 낌새를 알아챈 이경이 검 자루를 쥐었다.

“꺄아아악!”

“전하!”

이경의 감은 적중했다.

탈의 방향을 바꾼 광대 셋이 활을 꺼내더니 그대로 화살을 날렸다.

하나는 언, 하나는 영의정.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규연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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