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68)

38화

* * *

“중전마마!”

“세상에, 이게 누구야. 우리 유하가 그새 참 많이 자랐구나.”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어린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규연의 품으로 달려왔다.

“그리 예의 없게 굴면 안 된다니까. 하늘같이 높으신 중전마마께 어찌…….”

“아직 어린아이지 않은가. 너무 다그치지 말게. 게다가 이리 귀여우니 다 괜찮아.”

유하가 환히 웃으며 규연의 다리를 끌어안고, 유하의 어미는 그런 딸을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아이는 규연에게 몇 번 더 재롱을 부리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궁녀들과 놀기 시작했다.

“그리 응석 받아 주지 마십시오, 마마. 버릇이 나빠집니다.”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가르칠까. 나처럼 마냥 받아 주는 어른도 하나 있어야 유하가 더 즐겁지 않겠어?”

유하를 낳은 여인은 규연의 오랜 벗으로, 이름은 효정이었다. 처음 만난 게 5살 무렵이었으니 규연과는 이경 못지않은 소꿉친구였다.

효정은 영성군의 부인이었는데, 영성군은 언의 사촌 형이었다. 종친의 부인이 되었고 다소 이른 나이에 아이도 낳아 오늘처럼 대비전에 인사를 올리러 입궁하고는 했다.

딸인 유하가 워낙 사랑스럽다 보니 여러 어른의 애정을 담뿍 받곤 했는데, 규연 역시 그그 어른 중 하나였다.

“유하가 몇 살이지?”

“4살이랍니다. 시간이 참 빠르지요?”

“세상에. 벌써 그리되었다니……. 정말 빠르네.”

규연과 효정은 정자로 자리를 옮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처럼 효정이 찾아오면, 규연은 꼭 어린 날로 돌아간 듯해 항상 기분이 좋아졌다.

효정은 예나 지금이나 답답한 궁 생활의 숨구멍이 되어 주는 벗이었다.

“조금 천천히 자라 주면 좋을 텐데.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하루하루가 다르답니다.”

“자랄수록 자네를 닮아 가는 것 같아. 보통 미인이 아니야.”

“그리 낯 간지러운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고 민망해집니다, 마마.”

마주 앉은 두 여인이 소리 내 웃었다.

“무척 총명해 보여.”

“네. 영민한 아이예요. 배움이 무척 빠르답니다. 요즘은 파자(破字) 놀이에 푹 빠져 있어요.”

“벌써 파자를 할 줄 알아?”

규연이 화들짝 놀라며 효정을 바라봤다. 파자 놀이는 한자의 자획을 나누거나 합치는 것으로, 예를 들면 ‘李’라는 글자를 ‘木’과 ‘子’로 나누거나 반대로 ‘木’과 ‘子’를 합쳐 ‘李’를 만드는 놀이였다.

“참으로 신기하지요? 글자만 보면 획을 나누고 있어요.”

신기하다며 웃는 효정의 얼굴에 뿌듯함과 기쁨이 비쳤다. 아이를 기르는 즐거움이 완연한 얼굴이었다.

규연은 그런 벗이 내심 부러웠다.

미래를 약속한 이와 사랑을 나누고, 그와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규연이 오래도록 바랐던 꿈이었다. 조선의 여인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는 건 꿈꿔 본 적도 없었다.

운명의 소용돌이가 규연을 휩싸는 바람에 여기까지 흘러왔지만, 규연이 바라는 삶과는 한참 멀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지 않으시고, 우리가 그저 대군과 대군의 부인이 되었다면 더 행복했겠지. 적어도 솔직하게 사랑을 나눌 수는 있었을 테니.’

의미 없는 가정을 하고 나니 입 안 가득 씁쓸함이 번졌다.

“많이 야위셨습니다.”

“내가?”

“예, 마마. 혹 끼니를 거르시거나 주무시지 못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그럴 리 있나.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있어. 다만 살필 일이 원체 많다 보니 몸이 곤해 이러네.”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한 허언일 뿐, 사실 규연은 여전히 불면과 싸우고 있었고 밥도 많이 먹지 못했다.

머릿속에 언의 비밀을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 차 있는데, 막상 완벽하게 알아낸 것은 없어 속에 답답함만 쌓여 갔다.

“혹 전하께서는 여전하십니까?”

많은 것이 함축된 물음이었다. 오랜 벗의 조심스러운 질문 앞에 규연이 잠시 말을 잃었다.

“……여전하시네. 지금도.”

규연의 대답에 효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여전히 폭군이냐 물으면 여전히 폭군이라 할 수밖에 없었고, 여전히 광증을 보이냐 물으면 여전히 광증을 보인다 할 수밖에 없었으며, 여전히 규연과의 시간을 다 잃어버린 것처럼 행동하냐 물으면 그리 행동한다 답해야 했다.

남들이 보는 언의 모습에는 변화가 없었다. 규연 홀로 깨달음을 얻어 그 너머를 보고 있을 뿐.

“궁 밖의 소식을 듣고 계시는지요, 마마?”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던 효정이 용기 내 말을 꺼냈다.

“조금씩 듣고 있네.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만.”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사오나 바깥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마마.”

효정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민심이 보통 흉흉한 게 아니에요. 백성들이 들끓는 게 느껴집니다. 근래 북촌은 해가 지고 나면 누구도 대문 밖으로 나오지 않아요.”

“…….”

“흑의적이라는 의적이 온갖 부정한 관리와 양반을 털며 이 폐단을 끊어 내야 한다고 방을 붙이고 다니는데, 모든 방마다 영상 대감과 전하를 탓하고 있습니다.”

방의 내용은 규연 역시 알고 있었으나 북촌의 분위기는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듣고 나니 바깥이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꼭 누구 하나가 톡 건드리면, 펑 터지며 온갖 것들이 와르르 쏟아질 듯한 느낌이에요.”

“…….”

“정말 일이 날 수 있습니다, 마마.”

효정이 말한 ‘일’은 분명 반역이나 봉기를 뜻했다. 효정은 혹여나 언이 공격당해 그 불똥이 규연에게까지 튀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었다.

‘민심이 전하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구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어.’

규연이 얼핏 살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정말 혹시나.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정말 혹시나 일이 생기면……. 마마께서 궁 밖으로 나와 피해야 할 곳이 필요하시면, 제게 오십시오.”

효정이 규연의 두 손을 꽉 잡으며 단단한 목소리로 뜻을 전했다.

“진심입니다, 마마. 아무 염려 마시고 저를 찾으세요.”

벗을 아끼는 절절한 마음이 느껴져 규연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상황은 여러모로 심각했지만, 효정의 마음만큼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고맙네. 진심으로 고마워.”

규연 역시 효정의 손을 꽉 잡고 어루만지며 몇 번이고 고마움을 전했다.

하지만 효정이 걱정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됐다. 결코 보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규연은 차오르는 불안함을 애써 억누르며 하늘에 빌고 빌었다.

제발 언의 목에 칼이 닿는 모습은 보지 않게 해 달라고.

* * *

“좀처럼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효정과 유하를 떠나보내고 통명전으로 돌아온 규연이 혼잣말을 읊조렸다.

창밖의 화계를 보며 다시 한번 그녀가 알고 있는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여전히 답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가 풀리면 다른 하나가 막히고, 하나가 이어지나 싶으면 다른 하나가 뚝 끊겼다.

“하…….”

규연은 도깨비불이 피어나는 날, 품에 고이 넣어 가져온 흑의적의 여러 방을 모조리 꺼내 찬찬히 살폈다.

하나도 빠짐없이 언과 영의정을 탓했고, 썩을 대로 썩어 버린 나라의 상황을 규탄했다.

“겨울을 참고 견디어 내니 재앙의 빌미가 되는 악의 무리가 흩어지고 봄의 수풀이 우거지는구나.”

규연은 방의 마지막에 똑같이 적힌 문장을 소리 내 읽었다.

흑의적이 그들의 상징처럼 쓰고 있는 문장이었다. 사람들은 이 문장을 보고 흑의적의 방을 구분했다.

“왜 그림이나 도장을 쓰지 않고 문장을 썼을까. 중요한 뜻을 드러내기 때문인가.”

반복되고 있는 문장은 암울한 시대가 저물고 새 세상이 올 것이라는 일종의 희망가였다.

그러니 계속해서 쓰며 강조할 만한 문장이기는 했다.

“어렵구나. 다 어려워.”

규연은 한숨을 푹 내쉬며 멍하니 글자를 바라봤다. 계속 들여다보니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인 상태가 되어갔다.

〈요즘은 파자 놀이에 푹 빠져 있어요.〉

글자만 빤히 들여다보던 중 불현듯 효정의 말이 떠올랐다.

규연 역시 어릴 적부터 파자 놀이를 좋아했다. 똑똑하게 잘한다며 아버지의 칭찬을 받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했다.

“나누는 것도 재밌지만 합쳐 보는 것도 재밌지. 어디 보자…….”

별생각 없이 글자를 이리저리 붙여 보던 규연의 눈동자가 갑자기 요동쳤다.

합치고 나니 보이는 문자들이 어딘가 익숙했다.

“겨울(冬)을 참고 견디어 내니(含) 재앙의 빌미(兆)가 되는 악의 무리가 흩어지고(雨) 봄의 수풀(木)이 우거지는구나.”

다시 문장을 읽어 본 규연은 드러난 한 자 한 자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이리저리 이어 붙였다.

그러자 눈에 띄는 글자가 몇 보였다.

“……말도 안 돼.”

글자를 확인한 규연은 그녀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합쳐 나온 글자는 ‘눈(雪)’, 그리고 ‘함도(含桃)’였다. 두 단어에 앞에 있던 ‘겨울(冬)’을 붙이고 나면, 방마다 붙어 있는 문장이 가리키는 건 하나였다.

눈 오던 겨울날의 함도.

함도는 앵두의 다른 말이었다.

〈앵두입니다. 여름에 붉게 익는 과일이 한겨울이 되도록 나무에 달려 있어 따 놓았는데……. 낭자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언과 규연의 첫 만남을 담은 문장 앞에서 규연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규연의 짐작이 맞았다.

흑의적 뒤에는, 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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