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 *
“대, 대감. 지금 누가 무엇을 하셨다 말씀하셨습니까?”
“중전께서 회임을 하셨다고 했네.”
함께 차를 기울이던 이판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떡 벌린 채로 영의정을 바라봤다.
“한데 어찌 이리 조용합니까? 하면 당장에 산실청이니 뭐니 말이 나오고…….”
“아직 중전께서도 모르시니까.”
“예? 그게 어찌 가능하단 말입니까?”
“맥을 짚은 어의가 중전께 일러 드리기 전에 내게 먼저 찾아왔다고 하더군. 사람을 아주 잘 키웠어.”
영의정이 몹시 흡족해하며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이판만 빳빳하게 굳은 채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성빈께서는 아직 회임 소식이 없지?”
“……예. 제게 알려 오신 건 없습니다.”
서혜가 입궁해 왕의 총애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판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언의 씨가 서혜의 배 속에 자리 잡는 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 변덕스러운 사내가 다른 여인도 찾지 않고 매일 밤 성빈을 찾는다 하니 온갖 장밋빛 미래가 이판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서혜에게서 원자가 태어나면 이판의 핏줄이 왕이 되는 셈이었다. 상상만 해도 짜릿해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그리 밤마다 찾으셨다는데 왜 용종을 품지 못한 게지? 설마 서혜가 석녀란 말인가? 아닌데. 그럴 리 없는데.’
하지만 이판이 생각한 것보다, 아니 모든 이들이 생각한 것보다도 서혜에게서는 낭보가 들려오질 않았다.
당장이고 배 속에 아이가 들어섰다는 소식과 함께 온갖 호들갑이 이어져야 할 것 같은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아니 어떻게 중전이 먼저 회임을? 중전이야말로 석녀라 생각했건만. 어찌 이리 뒤통수를 친단 말이야?’
서혜보다 규연이 먼저 아이를 가지리라고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터라 그 충격이 더 컸다.
이판은 지금 이 상황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영의정은 그 모습을 한껏 비웃었다. 물론 차를 들이켜며 찻잔 뒤에 조소를 감췄다.
‘잘되었어. 성빈이 용종을 품으면 이판이 꼴사납게 나대는 꼴을 봐야 했을 터이니.’
지금이야 딱 붙어 한배를 타고 있지만, 언제 누가 어떻게 갈라질지 모르는 게 조정이었다. 이판과 조금이라도 힘을 나눠 가지는 건 원치 않았다.
“하나 아직 배 속의 아이가 남아인지 여아인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태어날 때까지는 알 길이 없어. 하니 성빈께도 아직 기회가 있네.”
영의정은 무척이나 여유롭게 대답했고, 이판은 그 여유가 꽤나 얄밉다고 생각했다.
“성빈께 한번 일러 드리게. 전하의 총애에 취해 계시기만 하면 아무것도 못 하실 거라고 말이야. 원체 변덕이 들끓는 분이라 마음을 잃기 쉬워. 안 그래도 요즘 전하께서 성빈을 찾으시는 횟수가 줄어드셨다지? 사나흘에 한 번씩만 부르시고 말이야. 아예 마음이 떠나시면 어찌하려고 그리 태평한가?”
“……꼭 전하겠습니다.”
심사가 뒤틀려 꿍얼거리듯 대답하는 이판의 모습을 보니 영의정의 기분이 두둥실 떠올랐다.
“한데 정말 의외입니다. 전하께서 중전마마를 평생 안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본래 사내와 여인 사이의 감정은 언제 들불처럼 번질지 모르는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두 분은 궁 밖에 나와 계실 때부터 인연이 있었으니.”
“흠, 그러면 중전께서 다시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기라도 하시면, 마마를 계속 지켜보실 겁니까? 당장이고 해치우겠다며 괘씸해하지 않으셨습니까.”
이판은 아직도 규연을 떠올리며 씩씩거리던 영의정을 기억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랗게 어린 질녀에게 한 방 먹었다며 부들부들 떨던 모습이 선연했다.
“내가 언제 그랬는가? 자네 지금 나를 모함하는 게야?”
뻔뻔하게 말을 바꾸는 영의정의 행태에 이판이 얼굴을 구겼다.
‘뱀보다도 교활한 사내 같으니라고.’
턱 끝까지 차오른 욕지기를 꾹 참은 이판은 그저 침묵을 지키며 영의정의 시선을 피했다. 영의정이 무엇을 전하려고 이런 시치미를 떼는지 알기에 입을 닫는 편이 더 유리했다.
“사내아이일 걸세. 느낌이 좋아.”
영의정은 씩 웃으며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규연이 사내아이를 낳기만 한다면, 언의 뒤에 왕위에 오를 아이까지 영의정의 손 위에 놓일 수 있다면.
흑의적이니 뭐니 하는 난리는 전부 상관없었다.
* * *
“오랜만이구나.”
“예, 전하. 강녕하셨습니까?”
“보이는 대로.”
오랜만에 언이 서혜를 찾았다.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언은 서혜를 찾는 빈도를 조절했다. 영의정으로부터 규연을 지키려는 보호책의 일환이었는데, 언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내가 찾지 않으면 더 일찍 잠들거나 편히 쉴 수 있으니 혈색이 좋아지리라 생각했는데. 어째 더 피곤해 보이는구나.”
언이 명령을 내리면 서혜가 이를 따르는 구조였다. 완벽한 상명하복의 사이였으니, 서혜에게는 언이 찾아오지 않는 밤이 훨씬 편하고 즐거운 밤이었다.
그런데 언이 매일 밤 들락거릴 때보다 서혜의 안색이 어두웠다.
“살필 일이 생각보다 많아 그런가 봅니다. 이 궁이라는 곳이 사람의 기운을 쪽쪽 빨아들이기도 하고요.”
“보통 공간은 아니지.”
언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사실 살필 일이 많아 이렇다는 건 핑계였다. 서혜의 답은 따로 있었다.
전부 이경 탓이었다. 언이 찾아오지 않아 쉴 수 있다 한들, 서혜의 머릿속에는 이경을 갈구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으니 괴로움이 가시지 않았다.
“오늘 이판이 찾아와 길게 말을 남기고 갔다던데.”
언의 한마디가 서혜를 이경의 잔상으로부터 구해 냈다.
“아, 예. 열심히 징징거리다 갔지요.”
이판은 잔뜩 흥분한 채 서혜를 찾아와 쓸데없는 억지만 잔뜩 부리고 사라졌다.
“이판은 어찌할 생각이더냐? 그 역시 화를 피하진 못할 거다.”
“화를 피하려 하면 제 손으로 그 화를 제대로 맞게 만들 겁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누구보다도 소리 높여 아버지께 누명을 씌웠던 자입니다. 그냥 둘 수는 없지요.”
어리석게 착각해 양녀로 들이고, 멍청해 서혜를 알아보지 못하고 잘해주었다 한들, 서혜는 그를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제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기생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만 해도 알아서 무너질 겁니다. 죽기 전에 그 사실은 꼭 알게 해야지요. 그래야 괴로울 터이니.”
서혜는 차분한 목소리로 어찌 복수할 것인지 설명하고는 다시 언을 바라봤다.
이판이 남기고 간 말에 대해 언에게 해야 할 말이 많았다.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전하.”
“무엇이더냐?”
“혹, 중전마마께서 회임하셨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회임이라는 말에 바로 언의 표정이 굳었다.
“갑자기 회임이라니? 어찌 묻는 것이냐?”
“오늘 이판이 찾아온 건 다름 아니라 중전마마의 회임 소식을 전해 들어서였습니다. 잔뜩 성이 난 채 달려와 소인에게 너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냐며 쏘아붙이고 가더군요.”
“중전은 회임했을 리 없다. 불가능해.”
언이 단호하게 말했다. 약에 취해 규연을 안았던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규연이 아이를 가졌다면 그날뿐인데, 그날 이후로 규연이 달거리를 거른 적은 없었다.
“하면 어의를 포섭하셔나 보군요.”
서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왕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다 하면 영의정이 마마를 죽일 수 없을 테니까요. 방패를 하나 만드신 모양입니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어의는 늘 나와 중전을 살피고서 그 내용을 영의정에게 갖다 바쳤으니, 잘 이용하면 훌륭하게 거짓을 심을 수 있지.”
언 역시 규연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다며 혼잣말하듯 상황을 짚어 냈다.
원체 총명한 여인이었다. 기발한 발상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줄 알았다.
‘마음이 놓이는군.’
언이 떠난 후로도 홀로 잘 살아남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위안이 됐다.
“단순히 목숨만 건지시려는 게 아니실 겁니다, 전하.”
훌륭하게 보호막을 쳤다며 안심하고 있을 때, 서혜가 심각한 얼굴로 언을 바라봤다.
“10달입니다, 전하. 회임했다는 소식이 영의정의 귀에 들어가면, 10달을 벌 수 있어요. 일부러 시간을 길게 버는 방법을 선택하신 겁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
“전하께서는 계속 부인하셨지만, 제대로 냄새를 맡으신 겁니다. 전하 뒤에 무언가 복잡한 사연이 엉켜 있다는 점을 깨달으신 거예요. 오랜 시간을 들여 찬찬히 살펴봐야겠다는 계획을 세우신 겁니다.”
서혜는 언이 바로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정말 찾아내실지도 모릅니다, 전하. 정말 전하의 가면 뒤를 보게 되실지도 몰라요.”
아찔한 이야기에 언이 그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만일 중전마마께서 진실을 알게 되시면, 그때는 어찌하실지요.”
서혜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하며 언을 바라봤다.
언은 살짝 시선을 내린 채로 수심에 잠겼다. 사실 그 역시 점점 서혜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찾지 못할 것이라며 무작정 부인하기에는 규연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만약 중전이 정말 진실을 알게 된다면,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코앞까지 다가오기라도 한다면.”
언이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규연이 회임으로 시간을 벌었다면, 영의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10달 동안 규연을 건드리지 않을 터였다. 언의 뒤를 이을 미래의 왕이 규연의 배 속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 죽이려 드는 것이 영의정에게는 더 손해였다.
‘이제는 궁 밖으로 나가도 살 수 있어. 이제는 궁의 호위가 무조건 필요하지 않아.’
보성사의 일이 있고 난 뒤, 규연을 곁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다름 아닌 영상의 위협 때문이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였다.
그러나 그 위험이 사라진 지금, 만일 규연이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면 언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폐비를 앞당겨야지. 궁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대로, 구중궁궐로부터 규연을 해방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