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68)

36화

* * *

“한 번에 너무 많이 피우시는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전하.”

“괜찮아. 이 정도쯤은.”

“하나…….”

상선이 무척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언을 바라봤다.

언은 해가 진 뒤로 계속 곰방대를 놓지 않았다.

생각이 너무 많았다. 비우고 싶어 연기를 뿜어내는데, 그 연기를 보고 있으면 또 생각이 차올랐다.

그렇다고 곰방대를 내려놓으면 더 많은 생각이 차올라 온전히 내려놓지도 못했다.

“혹 마음 쓰이시는 일이 있으신지요?”

상선의 물음에 언이 피식 웃었다.

“마음 쓰이는 것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

거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해서 영의정을 살펴야 했고, 들끓는 민심을 마주해야 했으며, 왕위를 이어받을 휼을 위해 준비해 두어야 할 것도 많았다.

하지만 요즘 언을 가장 신경 쓰이게 하는 건 규연이었다.

언제나 그래 왔지만, 요즘은 유독 언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게 했다.

‘떠날 때까지, 떠난 후로도 아무것도 몰라야 하는데. 혹여나 알게 되면…….’

규연이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될까 봐 걱정이 됐다.

아직도 암자에서 형형한 눈으로 자객을 만난 일을 어찌 아냐며 따졌던 모습이 선연했다.

무척이나 총명한 여인이었다. 지금이야 헤매고 있지만, 똑바로 방향을 잡고 파고들면 많은 것을 알아낼지도 몰랐다.

들킬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던 서혜에게는 그럴 일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언의 마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차올랐다.

‘절대 알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규연이 진실을 마주했을 때 일어날 일은 뻔했다. 어떻게 해서든 언이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애쓸 테고,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이 변치 않았음을 알게 되었으니 언을 잊지 못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언이 지금껏 꾸려 왔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다. 그는 슬퍼할 규연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중전마마 생각을 하시는지요.”

곁을 지키던 상선이 넌지시 물었다.

상선은 본래 세자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영의정에 의해 죽은 뒤로는 착실하게 언을 모셨다. 그것이 세자의 유언이기도 했고, 상선이 보기에 언이 참으로 훌륭한 사내였기에 온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다 보니 언의 작은 행동만 봐도 마음이 읽혔다.

폭군의 모습을 만들어 내기 위해 난동을 부릴 때를 제외하고 언은 항상 차분하고 냉철했다. 하지만 규연을 떠올릴 때면, 예외 없이 흔들렸다.

유달리 슬퍼 보이거나, 유달리 행복한 기억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이면, 언은 늘 규연을 떠올리고 있었다.

“상선.”

“예, 전하.”

“두렵구나. 혹여나 저 가여운 여인이 다 알게 될까 봐.”

상선은 한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언을 바라봤다. 상선 역시 언이 그리는 그림을 전부 알고 있었다.

언이 모든 것을 끌어안고 가라앉으려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규연에게 못난 짓을 하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언의 마음도 넝마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도, 모두 알았다.

“전하. 아직도 마음이 변치 않으셨는지요?”

상선이 조심스럽게 묻자 허공을 바라보던 언이 상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상선은 언제나 언에게 살아남으시라 청했다. 꼭 그렇게 죽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분명 살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상선.”

“예, 전하.”

“내가 이전에도 말하지 않았더냐. 내가 살아 있으면 지금 눈밭에 모인 자들의 마음이 흩어질 것이라고.”

언의 대답에 상선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언은 항상 단호하게 상선의 말을 부정했다.

언이 살아남은 상태에서 휼이 왕위에 오르면, 지금 요새에서 언을 위해 일하고 있는 자들의 마음이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언의 뜻을 따르던 이들이었다. 휼에게 만족하지 못하면 자연스레 언을 찾아올 테고, 설령 언의 뜻에 반하더라도 세력을 꾸려 부담을 안길지 모른다.

언은 요새에 모인 젊은 선비들을 온 마음으로 아꼈고, 그들의 능력을 귀히 여기며 철석같이 믿었지만, 권력은 언제나 사람의 신뢰를 저버렸다.

누구든, 언제든, 힘에 홀려 그답지 않은 일을 벌일 수 있었다. 언은 이런 싹을 잘라 내고 싶었다.

조선의 폐단을 다 끌어안고 도려내지겠다고 다짐한 이상, 언은 온전하게 세상을 떠나야 했다.

“새봄을 맞이하려면 각자 주어진 역할을 다해야 하네.”

“…….”

“겨울과 함께 사라지는 게 내 몫이야. 마지막 서리까지 전부 끌어안고서.”

상선이 슬픔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언은 그런 상선을 보며 부드럽게 웃고는 다시 곰방대를 물었다.

“전하. 상평 대군 대감께서 드셨사옵니다.”

피어오르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마침 휼이 찾아왔다.

“들라 하라.”

언은 곰방대를 내려놓고, 그가 떠난 땅에서 봄이 될 동생을 기다렸다.

* * *

“오랜만이구나.”

“예, 전하. 오랜만에 금강산 주변을 돌고 왔습니다.”

“경치가 가장 좋을 때지.”

“예. 시선이 닿는 곳곳이 절경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입궐한 휼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언은 오랜만에 보는 동생을 찬찬히 살폈다. 안 만난 새에 더 자라 이제는 완연한 사내 티가 났다. 앳된 기운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게 줄 선물이라도 사 온 게야? 좀처럼 나를 찾지 않는 너를 이리 보니 참 반갑구나.”

휼을 반가워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언은 아주 어려서부터 제 아래에 있는 막내를 무척이나 잘 챙겼다. 쏟아지는 애정을 아는 휼 역시 언을 가장 좋아하며 잘 따랐다.

“선물을 챙겨 오지 못했습니다, 전하. 송구합니다.”

“농이다. 어찌 그리 받아들이느냐.”

씩 웃은 언과 달리 휼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전혀 웃지 않았고, 언을 반가워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심각한 얼굴로 언을 바라볼 뿐이었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언은 웃음을 거두고 동생을 마주했다.

“혹시 궐 밖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저 밖이 얼마나 엉망인지 아시냐 감히 여쭙습니다, 전하.”

휼의 눈에 이글거리는 불꽃이 타올랐다. 한가로운 말을 나누러 왔을 리 없음을 잘 알았지만, 막상 이렇게 실망으로 가득 찬 동생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언의 마음이 복잡했다.

“지방의 수령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과도하게 세를 매겨 제 배만 불리고 있고, 감사로 내려간 암행어사들은 수령에게 뇌물을 받으며 부정을 눈감아 주고 있습니다.”

“…….”

“성문 바로 옆 빈촌이 어떤 상황이신지는 아시는지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반은 역병으로 죽었고, 반은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아직도 죽어 가고 있고요. 이런 적은 난생처음이라며 환갑이 넘은 매골승이 한탄하는 소리를 듣고 왔습니다.”

“…….”

“그뿐인 줄 아십니까? 군포를 거두는 관리들이 웃돈을 주지 않으면 할당량을 두 배로 올려 버리는 바람에 이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백성들이 가득합니다. 고리대는 말할 것도 없고요.”

“…….”

“매일같이 방이 붙고 있습니다, 전하. 전하와 영상의 폐단을 지적하는 방이 매일같이 붙고 있어요. 수많은 백성들이 전하께 등을 돌리고 있사옵니다. 어찌 주색과 양귀비에 취해 정사를 돌보지 않는 왕으로 남으려 하십니까?”

휼은 작정하고 찾아온 듯 말을 쏟아 냈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며 호소하러 온 모양이었다.

언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모를 리 없었다. 방의 내용을 작성한 것도, 그 방을 붙인 것도, 전부 언이었으니.

“아시지 않습니까, 전하. 아바마마께서 어찌 승하하셨고, 큰형님과 작은형님이 어찌 떠나셨는지요. 그 뒤에 누가 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

“이를 갈고 복수를 다짐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어찌 그 뒤에 숨어 이리……. 이리 한심하게 구신단 말씀입니까.”

“…….”

“제가 기억하고 있는 형님은 대체 어디로 사라지신 겁니까? 지금 형님의 모습을 보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물론이고 두 형님도 땅을 치실 겁니다.”

가족들이 땅을 친다는 말이 언의 귓가에 맴돌았다.

‘차라리 그렇게 땅을 칠 만큼 정말 폭군으로 살았다면 마음이라도 편했을까.’

시답지 않은 생각이 스쳤으나 이내 접었다. 언의 성정으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말씀이라도 해 주십시오, 형님. 이리 간청드립니다.”

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이 보였다. 아마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언을 설득하러 온 모양이었다.

휼은 수면 아래에서 반역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언이 계속 동태를 살피고 있어 잘 알았다. 하나 원체 잘 따르고 좋아했던 어린 날의 기억이 있으니, 바로 쳐 낼 자신이 없어 이리 찾아온 듯했다.

언은 그런 동생의 한결같음에 웃음이 나면서도 속이 쓰렸다. 이제 휼과의 관계 역시 다시는 어린 날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나 전하. 상평 대군 대감께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대군 대감만은 전하의 노고를…….〉

〈내게 검을 찔러 넣든, 내 목을 베라 명하든, 사약을 내리든, 죽음을 고해야 하는 게 상평이다. 네가 상평이라면 진실을 알고도 그리 명할 수 있겠느냐?〉

〈하나…….〉

〈상평에게 나는 끝까지 폭군이어야 한다. 그 아이가 죄책감을 끌어안는 건 원하지 않아.〉

형제를 죽이는 일이었다. 언은 휼에게 조금도 진실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하면 전하께서 너무……. 너무 가엽지 않으십니까.〉

윤성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건넨 말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언만 놓고 보면 참 가여운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운명이었고, 거부하는 대신 순응한 것 역시 언의 선택이었다.

언 한 사람만 가여워지는 것이 나았다.

“형님!”

옛 기억에 잠겨 있을 때, 휼이 소리 높여 언을 불렀다. ‘전하’가 아닌 ‘형님’이었다. 휼이 어떤 마음으로 달려와 언을 마주하고 있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언은 천천히 휼에게 다가가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그와 눈을 맞췄다.

“휼아.”

참 오랜만에 듣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휼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하면 네가 왕이 되거라. 네가 이 조선의 주인이 돼.”

여러 가지 진심을 담아 전한 말이었으나, 사정을 모르는 휼에게는 지독한 절망으로 다가갔을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를 들은 휼의 눈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이제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겠다는 듯, 차갑게 가라앉으며 경멸하는 감정이 그대로 비쳤다.

“우를 범했습니다, 전하. 소신,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텅 빈 눈으로 일어나 허리를 숙인 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편전을 빠져나갔다. 언만 그 모습을 찬찬히 시야에 담았다.

“평생 나를 미워하거라, 휼아. 그래야 네가 나아갈 테니까.”

언은 닿지 않을 외침을 전하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