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 *
“마마. 정말 간청드립니다. 제발 당분간은 궁 밖에 시선도 두지 마시옵소서. 소인이 제명에 못 살겠나이다.”
규연은 날이 밝아 눈을 뜨자마자 울먹거리는 정 상궁을 마주했다.
분명 언과 암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건만, 정신을 차려 보니 침방 안이었다.
“내가 어찌 여기에…….”
“전하께서 모시고 오셨습니다.”
“전하께서? 직접?”
“예, 마마.”
규연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젯밤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따로 말씀하신 건?”
“남기신 말씀은 없었습니다, 마마.”
왜 자꾸 언의 곁에만 가면 잠들어 버리는지. 온기에 취해 풀어지는 자신이 한심했다.
〈용서하지 마세요, 중전.〉
용서하지 말라는 언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정말 잠에서 깨어나 들은 말인지 아니면 꿈결에 만들어 낸 기억인지 분간이 안 됐다.
언이 뱉는 모든 말이 단서가 되고, 그가 보이는 모든 행동이 열쇠이건만. 언의 곁에만 가면 녹아내려서 너무 많은 것들이 흐릿해졌다.
물어야 할 것도, 알아내야 할 것도 많은데, 상황이 참 답답했다.
“마마, 혹시…….”
규연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있을 때, 정 상궁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뒤를 흐렸지만, 무엇을 말하려는지 빤히 보였다. 혹시 언의 마음이 규연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묻고 있었다.
혹여나 설레발일까 걱정하면서도 내심 기대하는 마음이 정 상궁의 눈에 비쳤다.
규연은 그 눈을 마주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라 해야 할지 쉽게 말을 고를 수 없었다.
언의 마음이 떠난 적 없었던 것 같다며 말을 전하기에는 비밀이 너무 많았다. 정 상궁이 온 마음을 다해 섬김을 알기에 그녀 앞에서는 늘 솔직해지고 싶었지만, 지금은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기대하지 말게. 그런 일은 아니야.”
“송구합니다, 마마. 소인이 또 괜히…….”
“괜찮아. 그보다 마음 졸였을 텐데 미안하네.”
“심장이 쪼그라드는 줄 알았습니다, 마마. 정영이 얼마나 사색이 된 채 돌아왔는지 아시는지요?”
실수를 했다며 당황하던 정 상궁이 이내 정영의 이야기를 꺼내며 간밤의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다급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규연의 머릿속에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어제 보았던 여러 장면이 잊히지 않아 정 상궁의 말은 한 귀로 흐르기만 했다.
‘붙은 방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정말 흑의적과 아무 상관이 없을까. 내가 따라붙지 않았다면 어디로 가려 하셨을까. 뭘 보기 위해 똑같이 탈을 쓰고 궁 밖으로 나오셨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음이 이어졌다. 언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뒤부터는 매일매일이 물음표투성이였다.
하루하루 질문이 쌓이는데, 답은 하나도 찾지 못했다.
“마마?”
“아, 미안하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꼭 약조해 주십시오. 당분간은 궁 밖에 나서지 않으시겠다고요.”
“위험한 일은 피하겠네. 그리 염려하지 마.”
나가지 않겠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 규연을 보며 정 상궁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 마마. 일전에 말씀하신 어의 영감의 일 말입니다.”
못 말리겠다는 듯이 상전을 바라보던 정 상궁이 문득 떠오른 어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래. 어찌 되었어?”
규연이 바로 눈을 빛내며 정 상궁을 바라봤다.
“의녀들로부터 꽤 심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읽어 보시지요. 가져오라 말씀하신 물건은 전부 채비해 두었습니다.”
“수고했네. 그러고 보니 오늘 날짜가…….”
안 그래도 언을 떠올리며 그가 감춘 진실을 알아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어의의 역할이 무척 중요했다.
날짜를 확인한 규연은 이전보다 결연해진 얼굴로 정 상궁에게 명령했다.
“어의를 불러오게. 이쯤이면 날이 되었으니.”
“예, 마마.”
* * *
“부르셨나이까, 마마.”
“어서 오게. 내 영 몸이 좋지 않아서 말이야.”
어의는 빠르게 통명전에 도착했다.
“속이 좀 메스껍고, 오늘은 눈을 뜨자마자 어지럽더군. 몸에 열도 나는 것 같고 말이야.”
“바로 살피겠나이다.”
규연이 이런저런 증상을 말하자 어의가 바로 맥을 짚었다.
“어떠한가?”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습니다. 옥체가 곤하시어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우신 듯합니다.”
“그래?”
“예, 마마. 소인이 보약을 지어 드릴 터이니 꼭 드십시오. 식사도 거르시면 안 됩니다.”
어의가 규연에게 당부를 거듭하고는 작은 종이에 규연의 상태와 진단을 적어 내렸다.
저 종이가 영의정에게 그대로 전해질 터였다.
“그게 단가?”
규연은 평온한 표정으로 어의를 마주하다가 짧게 물었다.
“예? 아, 그것이……. 예, 마마. 기력이 약하시나 크게 탈이 나신 곳은 없사옵니다. 보약으로 기력을 보충하시면 다 나으실 것이옵니다.”
어의는 무척 당황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차분히 대답했다.
“다시 짚어 보게.”
“……예?”
“맥을 다시 짚어 보라 명했네.”
그런데 뒤이은 규연의 행동이 다시 또 어의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얼른 다가와 규연의 맥을 짚었다.
맥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몇 번을 물어도 답이 같을 수밖에 없었다. 어의는 갑자기 규연이 왜 이러는 것인지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어떤가?”
“송구하오나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기력이 떨어지신 것 외에 큰 탈은 없사옵니다. 혹 또 다른 증상이 있으신지요?”
“내가 조금 전에 말한 것들 말일세. 여인이 회임을 하면 보이는 증상이라 하더군.”
규연이 회임을 입에 올리자 어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마마. 그것은 맞사오나 참으로 송구하옵게도 맥에서는…….”
어의가 한껏 몸을 사리며 회임은 아니라는 말을 힘겹게 전하고 있을 때, 규연이 정 상궁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정 상궁이 화려하게 장식된 상자 하나를 어의에게 내밀었다.
“열어 보게.”
잠시 머뭇거리던 어의는 이내 손을 뻗어 상자를 열었다. 그가 안에 있는 물건을 확인하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알아보니 숙부님께 이 양의 반을 받는다지?”
“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온지……. 소인은 도통…….”
“자네가 아니고서야 숙부님이 내 달거리 소식까지 어찌 아시겠는가.”
규연이 싱긋 웃으며 말을 잇자 어의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겁먹지 말게. 탓하려는 것이 아니니까.”
규연은 혀를 끌끌 차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주상 전하와 나의 상태를 보고하는 값치고는 너무 적은 돈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마, 마마. 소, 소인은…….”
“숙부께 내가 원하는 대로 말을 전하면 이 상자에 담긴 은을 전부 주겠네.”
영의정이 주는 돈의 두 배였다. 게다가 요 근래 은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었으니 그 가치가는 더 컸다.
어의의 눈에 탐욕이 번졌다. 그러다 이내 정신이 좀 들었는지, 무엇을 전해야 하기에 이리 큰돈을 주는 것인가 경계하는 티가 났다.
“내가 회임했다고 전해. 지난번 전하께서 내 침전에 찾으셨을 때 아이가 들어선 모양이라고.”
“마, 마마. 중전마마의 회임은 나라의…….”
“은을 받고 싶지 않은가?”
입을 떡 벌렸던 어의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다른 것도 아니고 중전의 회임이었다. 거짓으로 용종을 품었노라 이야기하면 어떤 벌이 따라올지 안 봐도 선했다.
그러나 외면하기에는 규연이 내민 은의 양이 너무 많았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였다.
‘그리 고한다 말씀드리고 은을 받은 뒤에 영상 대감께 이야기를 전하지 않으면 되는 일 아닌가?’
어의가 괘씸한 생각을 품으며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규연은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여 도저히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자네를 그냥 어르고 달래려는 것으로 보이는가?”
규연의 한마디에 어의가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봤다.
“건드린 의녀가 벌써 다섯이라지.”
규연은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의녀 이야기가 나오자 어의가 어느 때보다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리 몹쓸 짓을 하고서는 비밀이 유지되리라 믿었는가? 오만하기도 하지. 여인들이 얼마나 물로 보였으면 그리했을꼬.”
“소, 송구합니다, 마마. 소, 소인은…….”
“궁에 있는 여인은 모두 전하의 여인이네. 왕의 여인을 탐하면 어찌 되는지 자네도 잘 알지?”
죄가 드러나는 순간, 어의의 목이 잘릴 터였다. 어의는 새하얗게 질려 곧바로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송구합니다, 마마. 용서해 주십시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은 절대…….”
“숙부께 어떤 이야기가 들어갔는지 알 방법은 아주 많지. 하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똑바로 전하게. 중전이 배 속에 용종을 품었는데, 중전께 알리기 전에 먼저 영상 대감께 찾아왔다며 한껏 아부를 해 보란 말이야.”
규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어의를 상대했다.
사실 그간 언과 규연의 일을 영의정에게 쪼르르 일러바친 것을 생각하면 매질이나 옴팡지게 하고 싶었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은값을 하게. 하면 다른 것은 모두 묻을 터이니.”
“…….”
“하나 허튼짓을 하면 자네 목은 바로 날아갈 걸세. 내 장담하지.”
어의가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규연은 가소롭다는 듯이 어의를 보고는 다시 그에게 맥을 짚게 했다.
“다시 묻겠네. 내 맥이 어떠하지?”
규연의 서늘한 눈이 어의를 마주했다.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어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규연이 원하는 답을 뱉었다.
“회임하신 듯하옵니다, 마마.”
“그대로 전하게. 그대로.”
알겠다고 답하고는 도망가듯 뛰쳐나가는 어의를 보며 규연이 크게 숨을 골랐다.
10달. 적어도 10달은 영의정을 피해 언의 비밀을 밝힐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