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어마어마한 비였다.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먹구름이 미친 듯이 비를 뿌렸다.
하얗게 보일 정도로 빗줄기가 거세지자 언이 규연의 손을 잡고 그녀를 골목 뒤와 이어진 숲길로 데려갔다.
언은 열심히 달려 숲속의 작은 암자로 향했다.
“하아…….”
비를 피해 들어오자 규연이 가쁜 숨을 골랐다. 쓰개치마는 홀딱 젖고, 쓰고 있던 각시탈에도 빗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언 역시 갓과 가면에 빗방울이 묻어 있고, 남색 도포 역시 검게 보일 정도로 잔뜩 젖어 버렸다.
그는 곧바로 탈을 벗어 던지고 규연을 마주했다. 바짝 다가간 그는 규연의 탈 역시 벗겨 냈다.
“…….”
“…….”
서로의 민얼굴을 마주한 순간, 규연은 떨리는 눈으로 언을 바라봤고, 언은 지금 이 상황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경악했다.
“미쳤습니까? 중전, 정말 미쳤어요?”
언은 잠시 이마를 짚더니 화를 꾹꾹 억누르는 목소리로 규연에게 말했다.
“오늘이 어떤 날인 줄 알고 궁 밖으로 나옵니까?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요?”
“…….”
“당신 중전입니다. 궁 안에서 내명부를 살피기도 바쁜 여인 아니었습니까? 대체 왜 자꾸 궁 밖으로 나와 위험을 자초하냐는 말입니다. 영상이 중전을 죽이려 해 내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대체 왜!”
곱씹을수록 아찔해 언성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언이 발견하지 않고 영상이 보낸 자객이나 흑심을 품은 누군가가 규연을 먼저 봤다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지난번에는 규연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명확히 알고 영상의 수가 빤히 보여 규연을 지킬 수 있었지만, 오늘처럼 사방이 변수인 시공간에서는 달랐다.
“궁 밖은 위험하단 말입니다. 지난번에도 겪지 않았습니까? 자객을 만날지도 모르고, 오늘처럼 길을 잃고 헤매게 될지도 몰라요. 제발 궐 담을 함부로 넘지 마세요.”
언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키려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끝나기 직전에 규연이 자꾸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니 속이 탔다.
말을 쏟아 낸 언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규연으로부터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상황을 설명하든, 야속하다며 슬퍼하든, 무언가 대답이 들려야 하는데, 사방이 고요했다.
“신첩이 궁 밖에서 자객을 만났다는 것을 어찌 아십니까? 신첩은 전하께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규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언의 말을 짚어 냈다.
언이 다소 당황한 눈으로 규연을 바라봤다. 실수였다. 규연을 잃을 뻔했다는 아찔함에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뱉어 버렸다.
“어찌 아시는 것이옵니까, 전하?”
보성사에서 규연을 구한 사내가 언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등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확신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이렇게 그날의 일을 똑똑히 알고 있는 언을 보니 규연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무엇을 하려 하시기에 신첩을 향한 마음을 그리 접으려 하시는 거냔 말입니다.’
아직 전할 수 없는 물음이 자꾸만 차올랐다.
“이경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이경이 보성사에 갔다가 그대를 구한 이야기를 들어 알아요.”
“정말 전해 들어 아시는 것이옵니까?”
“하면 그 자리에 없던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정말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대가 더 잘 알 터인데.”
규연이 슬퍼하는 눈으로 물었지만, 언은 단호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대신 검을 맞은 사내가 언이라는 사실은 죽을 때까지 밝혀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하면 오늘은 어찌 궁 밖으로 나오셨습니까?”
절대 언의 입에서 진실을 들을 수 없음을 알기에 규연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양귀비를 구하러 왔습니다. 그대가 약조한 양귀비를 내게 넘기지 않아서.”
언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양귀비 이야기가 나오자 규연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사실 언은 요새로 향하기 위해 궁을 빠져나왔다. 사람들 틈에 숨어 살필 수 있는 것이 많으니 저자를 둘러보다가 요새로 들어가 거사를 위한 여러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했다.
그런데 누군가 그의 뒤를 바짝 쫓고 있음을 알아챘고, 요새로 가는 대신 골목으로 접어들어 누가 미행하고 있는지 그 정체를 밝히고자 한 것인데.
‘중전이었을 줄은…….’
규연이 그 정체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터라 그녀의 눈을 마주하자마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언가 낌새를 알아챈 것이 분명하다는 서혜의 말도 떠올라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만약 그의 예상을 깨고 규연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면, 더 이상 그녀를 언 곁에 둘 수 없었다.
“중전은 대체 왜 나온 겁니까?”
“도깨비불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뿐입니다, 전하.”
언이 거짓을 말했듯, 규연 역시 거짓을 고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둘 모두 각자의 이유가 진실이 아님은 다 알고 있었다.
“…….”
도대체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나 싶어 암담해하고 있을 때, 언의 눈에 파랗게 질린 규연의 입술이 들어왔다.
쫄딱 젖은 쓰개치마에 가려져 몰랐는데, 원체 많은 양의 비를 맞아서 그런지 저고리와 치마도 제법 젖어 있었다.
이제는 밤에도 제법 따뜻했지만, 비를 맞은 뒤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안 그래도 추위에 약한 규연이었으니, 젖은 옷 때문에 오한이 들 법도 했다.
언은 한숨을 삼키며 규연 곁에서 멀어졌다. 암자 안에 있는 작은 선반 위에 모포가 있었다.
빨리 비를 피해야 하는 탓에 얼른 들어온 이 암자는 언이 궁 밖으로 나설 때마다 애용하는 곳이었다.
환복할 때 쓰기도 했고, 몸을 피해야 할 때 쓰기도 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포를 집어 와서는 규연의 어깨에 둘렀다. 언이 왜 갑자기 움직이는지 의아해하던 규연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 오들오들 떨면 밤을 못 버팁니다. 어차피 비가 그칠 때까지는 암자 밖으로 나서지 못하니 모포를 덮고 기다리세요.”
체온이 떨어지는 건 치명적이었다. 규연이 어떤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 궁 밖으로 나왔든, 아파서 앓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전하의 도포도 다 젖었습니다. 신첩만 덮기에는…….”
“나는 춥지 않습니다. 그러니 혼자 덮어요.”
규연은 살짝 홍조가 오른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두꺼운 모포가 어깨를 감싸자 몸의 잔떨림이 점점 가라앉았다.
티를 내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언은 너무도 쉽게 규연의 상태를 파악했다. 꼭 옛날 같았다.
아직 함부로 들떠서도, 희망에 젖어 분홍빛 미래를 꿈꿔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언의 다정함이 비칠 때마다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
“…….”
나란히 앉은 둘 사이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암자가 원체 좁은 탓에 공간이 모자라 딱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규연은 살짝 고개를 돌려 언을 힐끗 바라봤다.
그는 땅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두 눈을 감고 벽에 기댄 채였다.
어둠에도 가려지지 않는 훤칠한 미모를 감상하던 규연은 이내 그처럼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살짝 붙은 어깨로 전해지는 언의 온기를 가만히 느끼고 싶었다.
“…….”
닿은 온기 때문인지, 아니면 언이 재워 주던 밤을 몸이 기억하기 때문인지, 시간이 제법 지나자 규연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규연은 언이 면포를 덮어 재워 준 날 이후로 또 내내 잠들지 못했다. 밀려 있는 잠이 쏟아져 규연도 모르게 정신을 잃고 쓰러지듯 잠들었다.
자연스레 규연의 얼굴이 언의 어깨에 닿았다. 언은 그에게 기대어 잠든 규연을 가만히 지켜봤다.
내내 지친 채로 버티다가 언의 곁에서만 그나마 긴장을 풀고 잠드는 게 보이니 마음이 아팠다.
‘떠날 자에게 이리 기대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그대는 나 없이 살아가야 하는데.’
언은 불편하게 기댄 규연의 자세를 고쳐 주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끌어안았다.
규연이 그의 품에 안긴 모양새로 기대 색색 숨을 골랐다.
이렇게 규연이 잠들어 있을 때, 그녀의 기억에 남을 수 없을 때, 언은 조금이나마 솔직해졌다.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은 마음을 미약하게라도 드러냈다.
‘그때 어떻게 해서든 그대가 중전이 되는 것을 막아야 했던 걸까요. 다르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야 맞는 걸까요.’
여전히 야윈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또 옛 기억이 넘실거렸다.
〈절대 안 돼. 영상의 질녀는 절대 안 된다.〉
〈하나 영상의 뜻이 워낙 강경합니다, 전하. 사실상 국구가 되는 길이니 놓치지 않으려는 게지요.〉
〈영상이 무엇이 되려 하는지는 내 알 바 아니야. 그러나 규연은, 그 질녀는 중전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영의정이 규연을 왕비로 만들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 때, 언은 단호하게 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판은 궁에 숨어 있는 몇 안 되는 언의 사람이었고 그의 뜻을 몰래 돕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막을 수 있는 길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궁가에 계실 때, 자주 찾으셨던 여인이라 들었습니다. 어쩌면 중전의 자리에 앉혀…….〉
〈마음을 준 여인이기에 안 된다는 게다. 절대 안 돼.〉
폐단을 끌어안고 가라앉기로 다짐한 후였다. 폭군의 탈을 쓰고 생을 마감하겠다고 결심한 상황에서 규연을 중전으로 들일 수는 없었다.
오로지 연성 대군의 모습만을 알고 있을 규연이 상처 입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고, 폭군의 왕비에게 어떤 끝이 찾아오는지 알았기에 막아야 했다.
언은 부디 규연이 자신을 다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다. 겨울에 찾아온 단꿈이었다 여기며, 갑자기 사라진 언을 마구 욕하면서 전부 잊길 바랐다.
하지만 규연이 중전이 된다면 모든 게 달라진다. 규연이 감내해야 할, 그리고 언이 감내해야 할 고통의 무게가 특히 그랬다.
〈하나 전하. 만일 중전으로 들이지 않으시면 그 규수는 죽을 겁니다.〉
〈……뭐?〉
〈영의정이 제 형을 죽인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동생의 패악을 두고 볼 수 없다고 여긴 호판이 그의 손으로 영상을 처리하려 하자 냅다 형을 죽여 버렸지요. 그래서 그 딸이 홀로 남은 것이고요. 딸을 살려 둔 이유는 하납니다. 중전이든, 후궁이든, 왕의 여인이 되게 하려 살려둔 것입니다.〉
영의정이 규연의 아비를 죽였다. 규연도 몰랐고 세상에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의정을 내치고자 그를 살펴보고 있는 이들은 모두 알았다.
〈만일 전하께서 그 규수를 중전으로 삼지 않으신다면 영의정은 바로 그의 질녀를 죽일 겁니다. 복수의 싹이 자라는 꼴을 보지 못하는 자이니까요.〉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예판의 말이 옳았다. 만일 규연이 영의정이 원하는 대로 중전이 되지 못하면, 그녀를 살려 둘 리 없었다.
〈만약 살리고자 하신다면,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전하.〉
결국 언은 더 이상 반대하지 못하고 규연을 중전으로 들였다. 피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고안했지만, 하나같이 완벽하지 않았다.
‘참 우습지요. 살리기 위해 그대를 궁 안으로 들였는데, 내가 그대를 이렇게 마르게 하고 있다는 게.’
언은 마냥 밝고 생기 넘치던 규연을 기억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모습이고, 그럴 수 없게 만든 것이 자신임을 알기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용서하지 마세요, 중전.”
차오르는 수많은 말을 골라내다 보면, 결국 전할 수 있는 건 이 한마디뿐이었다.
언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럽게 규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디 용서하지 말길. 부디 훗날에라도 언을 다 잊고 행복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