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 * *
“마마. 소인과 너무 멀어지시면 안 됩니다. 최대한 따라붙어 거리를 유지할 것이나, 인파가 몰린 거리에서는 마마를 놓칠 수도 있으니 너무 빠르게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래. 그러도록 하지.”
금세 이틀이 지나고 도깨비불이 피어오르는 날이 찾아왔다.
이경이 붙여 준 새 호위무사의 이름은 정영이었는데, 실력이 무척 뛰어났다.
“자네의 무공이 보통이 아님을 잘 알아. 그러니 별일 없을 걸세. 나도 무리하지 않을 테고.”
“예, 마마. 하나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오늘 같은 날은 보통 인파가 아닙니다. 자칫하면 그 틈에 휩쓸려 길을 잃거나 일행을 놓치기 쉽습니다.”
“조심할 테니 너무 염려 말게.”
규연은 정영을 보며 옅게 미소 짓고는 준비한 각시탈을 쓰고, 쓰개치마를 머리 위로 둘렀다.
빠른 걸음으로 통명전을 지나고, 후원과 이어진 숨겨진 통로를 이용해 궁 밖으로 나왔다.
어둑한 길을 지나 골목으로 접어드니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대로가 아닌 좁은 거리인데도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왜 정 상궁과 정영 모두 인파를 걱정했는지 이해가 됐다.
본격적인 축제의 시작은 인경이 친 이후부터였다. 그런데 인경이 치기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벌써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겠어. 정영이 나를 놓치면 큰일이니.’
궁에서는 그저 여유로웠건만, 직접 인파를 마주하고 나니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쓰개치마를 뒤집어쓴 규연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대로로 나갔다.
“우와! 도깨비다, 도깨비!”
“꺄악!”
큰길로 나서니 잔뜩 신이 난 어린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불이 달린 줄을 빙빙 돌리면서 돌아다녔다.
아이들 말고도 작은 등불이나 초롱불을 쥐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도깨비불이 피어나는 날’이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였다.
규연은 주위를 둘러보며 저자의 분위기를 살폈다.
날이 날이다 보니 남사당패를 비롯해 여러 광대가 거리를 누비며 주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몇몇은 길가에서 공연을 하는 중이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들어 보니 하나같이 전부 언에 대한 이야기였다.
“글쎄 우리 나라님이 한 번에 여인 일곱을 안으신다더이!”
“에구머니나!”
“이리저리 누비며 탐험할 아래가 일곱이나 되는데, 아 어찌 정사(政事)를 살피시겠는가? 아, 정사(情事)를 나누기 바쁘시지 않겄어?”
여인에게 빠져 있는 언을 비꼬는 내용이 하나.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 나라가 오얏나무의 나라가 아니란 말이여?”
“이 사람아! 어디 딴 세상에 다녀왔어? 이제 조선은 한씨의 나라라고! 아 청주 한씨가 권력을 잡은 지가 몇 해인데! 떼잉!”
영의정에게 휘둘리고 있는 상황을 꼬집는 내용이 둘.
“하하하, 저 꼴을 보라지!”
“나라님이 개만도 못하구먼!”
‘王’ 자를 크게 써 붙인 광대가 무척이나 과장되게 엉덩이를 흔들거나 넘어지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자아내면 이를 보며 온갖 조롱을 쏟아 내는 게 셋.
가면으로 정체를 감추게 되자 광대들은 한껏 더 대담해져 언을 욕했다.
몇 해째 이어진 흉작은 올해 가장 극심했다. 물가도 급격히 올라 어지간한 돈이나 물건으로는 쌀을 구하기 어려웠다.
군인들의 녹이 틈만 나면 밀렸고, 뒷돈을 챙기지 않는 관리가 없어 사방이 곪아 갔다.
상황이 이러하니 민심이 무척이나 흉흉하여 하루에도 수백 개씩 상소가 쏟아졌다.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그렇지만…….’
규연은 너무도 씁쓸하게 저자의 민심을 지켜봤다.
아무것도 부정할 방도가 없다는 점이 규연을 가장 슬프게 했다. 가면을 쓰고 뒤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언은 참으로 지독한 폭군이었다.
나라는 점점 더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고, 언은 이를 해결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민본이라 하지 않습니까. 백성이 근본이라고요. 나는 그 말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합니다. 백성을 위한 나라에 희망이 있어요.〉
언이 대군이던 시절 건넸던 말이 아직도 선연하게 기억났다. 그는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꽤 자주 전했고, 아버지나 형님이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백성을 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따뜻하던 사내였다. 규연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래서 궁에 막 들어갔을 때, 더 괴로웠던 것도 있었다.
규연을 향한 마음은 물론이고, 그녀가 알고 있던 바른 사내의 모습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아서. 꼭 다른 영혼이 언의 육체에 깃들어 버린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달라져 버려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더욱 고통스러웠다.
“하…….”
크게 한숨을 내쉰 규연은 인파 틈에 섞여 광대 무리로부터 멀어졌다.
가만히 듣자니 마음만 계속 심란해졌다. 민심이 어떤지는 이미 충분히 전해졌고, 더 듣고 있는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굳이 머물 필요가 없었다.
“누가 흑의적이 붙인 방을 이렇게 다 모아 놨군, 그래.”
“어휴. 양이 이리 많았던가? 새삼 대단하군.”
방이 다닥다닥 붙은 벽 앞에 멈춰 서자 ‘흑의적’이라는 단어가 규연을 사로잡았다.
규연은 뚝 멈춰 서 흑의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들의 대화를 훔쳐 들었다.
“털어 버린 곳간이 벌써 다섯 군데래.”
“벌써?”
“그래. 거기서 훔쳐 다시 나누어 준 쌀이 몇 석이라 했더라? 아, 듣고 입이 떡 벌어졌는데 왜 기억이 안 나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보통 양이 아니었어.”
“참으로 대단해. 그리 대담하게 누비는데도 한 사람도 못 잡았다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말이야. 뭐 하는 자들인지 모르겠어. 어쨌든 다행이지. 덕분에 쌀독에 쌀 채운 이들이 한둘인가?”
탈을 썼어도 서로 누구인지 아는 듯한 두 사내는 흑의적을 칭찬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를 규연이 차지했다. 규연은 사내들이 서 있던 곳에 똑같이 서서 벽을 뒤덮은 흑의적의 방을 찬찬히 읽었다.
‘숙부와 전하를 같이 묶고 있어.’
무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언을 떠올려 보았을 때, 규연은 언이 흑의적의 뒤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이 이루고자 하는 게 개혁이라면, 엉망이 되어 가고 있는 이 나라를 뒤엎고자 한다면, 영의정과 함께 엮여서는 안 됐다.
그가 가장 내치고자 하는 이가 영의정일 터였다. 게다가 영의정이 씌우기 시작한 폭군의 가면을 벗어 던지려면 그를 적폐로 지적하고 대적해야 했다.
‘그런데 왜…….’
하지만 흑의적은 언과 영의정을 같이 묶어 나라의 폐단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전하께서 뒤에 계신 게 아닌가? 하면 이들은 누굴까. 전하와 따로 움직이는 자들인가?’
규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규연은 언이 가면이 벗을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온전한 그의 모습을 드러내며 영의정과 그의 무리를 몰아내고, 선정을 펼치려 하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궁 밖에 나와서 지켜보니 폭군의 가면을 벗었을 때를 대비한 장치들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부터 드러내기 시작하면 숙부가 손을 쓸 테니 이를 막기 위함인가? 하지만 이대로 가면 전하께서 숙부를 쳐 내더라도 민심을 얻긴 힘들 터인데…….’
생각을 거듭하던 규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언의 뜻이 어렴풋이 가늠이 되다가도 막상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면 의문투성이였다.
‘똑같은 문장이 방의 마지막 줄에 반복되고 있어.’
규연은 다시 방을 들여다봤다. 한 문장이 모든 방마다 적혀 있었다.
“겨울을 참고 견디어 내니 재앙의 빌미가 되는 악의 무리가 흩어지고, 봄의 수풀이 우거지는구나.”
규연은 소리 내 천천히 문장을 읽었다. 곧 겨울이 끝나게 되리라는, 곧 변화가 있으리라는 암시였다.
‘뭔가 이상해. 어딘가……. 일단 몇 장 챙겨 가야겠다.’
규연이 벽에 붙어 있는 방을 몇 장 떼어 내 품에 넣었다. 아무래도 더 시간을 들여 살펴봐야 할 듯했다.
“…….”
이제 육전 주변으로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린 순간, 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벽에 붙은 여러 방을 구경하는 인파 틈에서 익숙한 형상이 보였다.
군청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하회탈을 쓰고 흑의적의 방을 읽고 있었다.
‘전하. 전하시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었고, 용포를 입지도 않았지만,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육척을 훌쩍 넘는 키도, 떡 벌어진 넓은 어깨도, 곧은 자세도, 분명 언이었다.
다른 이는 알아보지 못할지 몰라도, 규연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방을 훑던 언은 이내 몸을 돌리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규연은 홀린 듯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
‘놓치면 안 돼. 오늘이 기회야.’
언과 규연의 사이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규연은 혹여나 언을 놓칠까 초조해하며 그를 따라가기 위해 애썼다.
육전으로 향하는 큰길을 걷던 언은 방향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갔다. 규연은 거의 달리듯이 걸으며 사람들을 헤치고 언의 뒤를 밟았다.
놓쳤나 싶으면 멀찍이 형상이 보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골목으로 들어가니 확실히 인파가 줄어들었다. 점점 언을 뒤따라가기 수월해졌다.
“꺅!”
“아이고, 괜찮으십니까? 가면이 너무 커 눈을 가리는 바람에…….”
잘 따라가고 있던 와중에 사내 하나가 규연과 부딪쳤다. 규연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질 뻔한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언이 보였던 방향으로 달려갔다.
“아…….”
그런데 언이 보이지 않았다. 잘 따라붙고 있었건만, 사내와 부딪치면서 언을 놓치고 말았다.
멀리 가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어디에도 남색 도포가 보이지 않았다.
‘아, 정영.’
한숨을 푹 내쉬며 아쉬워하고 있는데, 문득 정영이 떠올랐다. 인파가 너무 많아 놓치기 쉬우니 절대 멀어져서는 안 된다던 그의 당부가 이제야 생각났다.
언을 잃은 규연처럼 정영 역시 규연을 놓친 듯했다.
상황이 안 좋았다. 규연은 저자의 지리에 어두웠고,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 이런.’
아직 영의정의 위협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난 상황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또 위협을 겪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밀려들어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나 바글바글하던 사람들이 규연이 서 있는 골목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언을 쫓아오느라 몰랐는데, 인적이 드문 깊은 골목까지 들어와 버렸다.
“누구냐.”
어떻게 해서든 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큰길로 나가려던 순간, 뒤를 도니 따라붙은 여인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 앞을 막아선 언을 마주했다.
“……중전?”
탈 너머의 시선이 맞닿았을 때, 언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규연을 불렀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소나기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