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68)

32화

* * *

“누가. 어디가 털렸다고?”

“정 씨요. 정 씨의 곳간이 털렸습니다, 대감.”

“이탕의 행수네가?”

“예. 그자의 곳간이 털렸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영의정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상단 ‘이탕’의 행수인 정 씨는 영의정에게 온갖 뇌물을 바쳐 여러 물건의 유통권을 홀로 쥔 자였다.

한양에서 장사로 먹고사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정 씨 뒤에 영의정이 있음을 알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두터웠다.

“또 그 도적 떼 놈들의 짓이냐? 흑의적인지 뭔지 하는 놈들?”

“예, 아버지. 그렇습니다.”

영의정의 미간이 더 구겨졌다.

요즘 도성의 가장 큰 화두는 흑의적이었다. 둘 이상이 모이면 무조건 흑의적 이야기를 나눈다고 할 정도로 세간의 관심이 쏟아졌다.

고리대로 장난치는 자들을 솎아 내고,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거둬들이는 군포를 배로 늘린 관리를 처리하고, 악독하게 부를 쌓은 자들의 곳간을 털어 쌀을 뿌렸으니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난세에 난 영웅이라며 이름 그대로 의적이 나타났다고 추켜세웠다.

“의적이라니 당치 않지. 그놈들은 모두 도둑놈들 아니더냐. 쥐새끼 같은 도둑놈들.”

“맞습니다. 버러지 같은 놈들일 뿐이지요.”

“아직도 배후가 누구인지 찾아내지 못했느냐?”

“사방에서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좀처럼 꼬리가 밟히지 않습니다.”

“하면 사람을 더 풀어서라도 당장 알아내! 알아보라 명했던 게 대체 언제냔 말이야!”

“송구합니다. 당장 사람을 더 풀겠습니다.”

영의정이 혀를 끌끌 차며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영의정은 요 근래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곁에서 일하는 자들도 전부 성에 안 찼다.

언의 마음을 얻어 영의정을 기쁘게 했던 성빈에게서는 좀처럼 회임 소식이 들리지 않았고, 한양을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흑의적은 계속해서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

“이번에도 그놈들이 내 이름을 적었느냐?”

“예, 아버지. 정 씨가 부정하게 상권을 쥐고 시장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이 뒤에는 영의정이 있다. 영의정이 이렇게 횡포를 부릴 수 있는 건 주상이 매일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은 방을 붙였습니다.”

난데없이 나타난 흑의적은 매번 방을 붙였는데, 틈만 나면 영의정과 언을 거론했다.

“왜 잡지도 못하는 게야? 한성부는 대체 뭘 한단 말이냐. 순라군은 무얼 하냐고!”

“사람을 늘리라 말해 두었으니 곧 한 놈이라도 잡힐 겁니다, 아버지. 소자를 믿어 주십시오.”

한두 번이야 날뛰게 내버려 둔다지만, 흑의적은 그 선을 점점 넘고 있었다.

지금처럼 말이 쌓이면 민심이 더욱 흉흉해질 테고, 영의정의 입지에도 균열이 생길 수 있었다.

‘주상이라도 언급하지 않으면 폭군인 주상이 충신인 영의정을 모함하려 든다며 말이라도 꾸며 낼 수 있건만. 이렇게 계속 주상과 나를 묶어 대니 선을 그을 수도 없고.’

영의정이 이를 빠드득 갈았다. 자꾸만 그와 언을 묶는 탓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온 백성이 언이 지독한 폭군임을 알았다. 영의정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탓에 지금 영의정 자신이 피해를 입는 꼴이 되었다.

“젠장.”

영의정은 낮게 욕지기를 뱉었다.

“아버지. 한 가지 올릴 말씀이 더 있습니다.”

“무엇이냐?”

“어젯밤에 전하께서 중전마마의 침전에 드셨다고 합니다.”

“중전의 침전에?”

“예. 게다가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시지도 않고, 동이 트고 나서야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뭐라?”

들리는 소식이 하나같이 예상 밖이었다.

규연과 관련된 이야기에 영의정의 눈매가 더 날카롭게 벼려졌다.

“성빈의 처소에 들 때처럼 주위까지 전부 물렸다고 했습니다. 아마 밤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언은 여인을 들인 밤에는 늘 주위를 물렸다. 궁인들이 그 곁을 지키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러니 언이 주위를 물렸다면, 중전을 안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영의정은 심각한 얼굴로 그의 수염을 살살 쓸어내렸다.

‘정말 밤을 보냈단 말인가.’

점점 기어오르는 규연을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다짐했던 영의정이었다. 그런데 규연이 어떤 연유에서든 언의 품에 안긴다면, 그래서 용종이 배 속에 자리한다면, 영의정에게는 이보다 더한 이득이 없었다.

서혜 역시 영의정의 사람이었지만, 그의 아비는 이판이었다. 서혜가 아이를 가진다면 국구는 이판의 몫이었다.

영의정은 작은 권력도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 탐욕스러운 자였다. 규연과 성빈 중 모든 권력을 그에게 안겨 줄 수 있는 건 분명 규연이었다.

‘조금 더 두고 봐야 하는 겐가.’

영의정은 당장 이번 주 안으로 통명전에 자객을 보내려던 계획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좀 지켜봐야겠구나. 주상과 중전이 어찌 되는지.”

규연의 작전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 * *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안 알려 주실 것이옵니까? 섭섭하옵니다, 마마.”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내가 푹 잔 것 외에는.”

“하면 전하께서 왜 면포와 대야를 청하셨단 말입니까?”

“그냥……. 정말 별일 아니었으니 그만 묻게.”

정 상궁이 한껏 아쉬워하며 규연을 바라봤다. 그러나 규연은 단호하게 입을 꾹 닫았다.

잠든 줄도 모르고 잠들었다가 아침을 맞았다. 눈을 떴을 때, 언은 곁에 없었다. 다만 규연의 눈에 덮였던 면포가 가지런히 개여 대야 위에 놓여 있었다.

규연은 가만히 앉아 그 면포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면포를 타고 느껴졌던 언의 다정함이 너무도 생생했다.

“궁에 벌써부터 말이 가득합니다.”

아침을 떠올리고 있을 때, 정 상궁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전하께서 나를 찾으셨다는 말?”

“예. 전하와 마마께서 합방하셨다는 말이요.”

규연이 원했던 바였다. 궁에 말이 퍼지면, 이는 반드시 영의정의 귀로 흘러들어 갔다.

그도 언과 규연이 밤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살펴야겠다며 잠시 기다릴 게 분명했다.

‘시간을 조금씩 벌고 있으니 이제 전하께서 무얼 감추시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정확히 알아내야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었다.

언이 폭군의 가면 뒤에서 정확히 무얼 하려고 하는지, 무얼 하려고 하기에 규연을 그토록 모질게 밀어내려고 했는지, 전부 알아내야 했다.

“궁 밖의 소식은? 내가 알아보라 했던 것은 알아 왔는가?”

“예, 마마. 오라비에게 물어 아주 상세히 듣고 왔습니다.”

정 상궁의 오라비는 역관으로 일하는 자라 알고 지내는 상인들이 많았는데, 덕분에 여러 소문과 소식에 빨랐다.

이를 아는 규연은 정 상궁을 통해 궁 밖 소식을 살피고자 했다. 무복을 입고 궐 담 너머를 누비는 언의 모습을 본 이상, 궁 밖의 상황도 놓칠 수 없었다. 그곳에도 단서가 있을 터였다.

“요즘 가장 화두가 되는 것이 ‘흑의적’이라 합니다.”

“흑의적?”

“까만 옷을 입은 의적이라 하여 흑의적이라 불린다고 했습니다. 부패한 관리를 벌하고, 부정하게 돈을 번 자들의 곳간을 털어 백성들에게 나눠 주고 있어 환심을 사고 있다고 합니다.”

까만 옷의 의적이라는 말이 강렬하게 규연의 뇌리에 꽂혔다. 온몸에 그림자를 뒤덮은 그날의 언이 떠오른 탓이었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 자들 대부분이 까만 무복을 입고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님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부정한 자를 벌하고 백성들을 달래고 있다는 부분도 눈에 띄었다.

‘직접 살피고, 직접 듣고 싶은데.’

흑의적에 대해 도는 여러 가지 말을 직접 듣고 싶었다. 직접 궁 밖의 분위기를 살펴야 조금 더 감이 올 것 같았다.

“……도깨비불.”

“예?”

“도깨비불이 피어나는 날이 언제지? 항상 이맘때가 아니었나?”

“맞습니다, 마마. 모레입니다.”

5월의 두 번째 보름달이 찾아오는 날, 도성에서는 ‘도깨비불이 피어나는 날’이라 하여 신기한 축제가 열렸다.

1년 중 유일하게 인경이 친 뒤로도 통행이 허락되는 날이었는데, 이날만큼은 한양에 있는 모든 이가 탈로 얼굴을 가리고 거리로 쏟아져 밤을 즐겼다.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덕에 반가의 여인들까지도 쉽게 대문을 넘고 나와 저자를 구경하는 게 가능한 몇 안 되는 기회였다.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어. 정체를 숨기고 궁 밖의 상황을 편하게 살필 수 있을 거야.’

탈을 쓰고 돌아다녀도 수상하지 않은 날이니 언 역시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주된 목적은 흑의적을 비롯해 궁 밖의 이모저모를 살피려는 것이지만, 저자를 누비는 언을 마주치게 된다면 그보다 좋은 게 없었다.

언이 궁 밖에서 무엇을 하는지, 혹시 의적의 뒤에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할 방도가 생길지도 몰랐다.

“그날 나도 밖으로 나가야겠네.”

“예? 아니 되옵니다, 마마. 절대 아니 되십니다.”

“정 상궁.”

“너무 위험합니다, 마마. 그날은 온 한양 사람들이 전부 저자로 쏟아져 나옵니다. 게다가 얼마 전에 궁 밖에서 변을 당하실 뻔하지 않았습니까.”

정 상궁은 사색이 되어 규연을 말렸다.

“별장이 붙여 준 호위가 있지 않은가. 무예를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뛰어난 자야. 나를 잘 지킬 걸세.”

“하나 마마, 인파가 몰리면…….”

“내 지옥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지도 몰라서 그래.”

규연이 정 상궁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조금도 뜻을 굽힐 마음이 없었던 정 상궁의 눈이 흔들렸다.

“아직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정말 찾을지도 몰라.”

“…….”

“그러니 막지 말게. 자네는 누구보다도 내 눈물이 멎기를 바라는 고마운 사람이 아니던가.”

규연의 진심 어린 말에 결국 정 상궁이 한 걸음 물러섰다. 애초에 상전의 말이니 무조건 따라야 했지만, 규연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더더욱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조심하셔야 합니다, 마마.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걱정 말게. 꼭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규연은 싱긋 미소 지으며 정 상궁에게 약조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히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래야 언의 비밀을 들출 수 있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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