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 * *
“…….”
“…….”
둘이 이렇게 한 방에서 언쟁 없이 서로를 마주한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언도, 규연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언은 벽에 기대앉아 있었고, 규연 역시 방 중앙에서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신첩의 금침에 누워 주무시지요.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규연이 먼저 침묵을 깼다. 사랑하는 이였지만, 그 이전에 주상이었다. 왕을 벽에 기대 자게 할 수 없었다.
“이걸로 충분합니다. 중전의 금침이니 중전이 누우세요.”
그러나 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이미 벽에 등을 기대고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전하. 그리 주무시면 담이 드십니다. 불편하게 계시지 말고 어서 몸을 누이셔요.”
“되었다니까. 중전이나 누워 자라 하지 않습니까.”
규연을 불편하게 앉혀 두고 언만 편히 잘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규연의 향이 가득할 금침에 들어가는 건 언에게 고문과도 같았다.
“그리 계시면 신첩이 더욱 불편해서 그리합니다. 어차피 신첩은 쉬이 잠들지 못해 누워도 소용이 없으니, 괘념치 말고 누워 주무시지요.”
아직도 쉬이 잠들지 못하냐는 말이 언의 턱 끝까지 차올랐다. 자칫 잘못하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만큼 언을 착잡하게 했다. 근래는 요새의 일로 원체 바빠 유월로부터 보고를 듣지 못했다. 규연이 잠들었는지 확인하고 그녀의 침전으로 찾아갈 수도 없었다.
다만 이전보다 훨씬 나아지셨다는 이야기가 마지막이었던 터라 이제는 지독한 불면에서 벗어났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왜 잠들지 못한다는 말을 그리 아무렇지 않게 합니까. 왜 그 고통이 당연한 것처럼…….’
전할 수 없는 말이 언의 혀끝에 맴돌았다.
언의 시선이 자연스레 규연의 곳곳을 살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헐레벌떡 달려오느라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이렇게 찬찬히 마주하고 나니 잠이 찾아오지 않아 괴로워한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이 더 홀쭉해지고, 살짝 부은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얼핏 보이는 손목도 이전보다 가늘어졌다. 안 그래도 마른 사람이 더욱 살이 내려 언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며칠 쨉니까?”
“예?”
“잠들지 못한 지 며칠 째냐 물었습니다.”
“아……. 정확히 세어 보지는 않았으나…….”
규연이 말을 흐렸다. 센 적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밤에 잠들지 못한 지 어언 이레를 훌쩍 넘겼다.
다만 이 사실을 솔직하게 전하고 싶지 않았다. 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꽤 되었습니다. 하나 염려하실 필요 없사옵니다, 전하.”
“염려는 안 합니다만 얼굴이 흙빛이라.”
거짓을 전하는 건 언도 마찬가지였다. 염려하지 않는다 했지만, 온 마음을 다해 규연을 걱정하고 있었다.
언이 안색 얘기를 꺼내자 규연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마음을 접어 가는 척,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마음의 크기는 여전했다.
언에게 못난 꼴을 보이고 있는 건가 싶어 조금 걱정이 됐다. 거울이라도 한 번 더 봤어야 하는 게 아닌가 괜한 후회가 밀려왔다.
규연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언은 잠시 시선을 내리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작은 다과상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과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어떤 차가 담겼는지 주전자를 확인했다.
“전하?”
갑작스러운 행동에 규연이 언을 불러 봤지만, 따라오는 답은 없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언은 규연에게 설명하는 대신, 밖에 있는 궁인을 찾았다.
“예,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그가 사람을 찾자 정 상궁이 바로 침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드러운 면포와 작은 대야를 가져오거라.”
“예, 전하.”
규연은 의아함을 가득 담은 눈으로 언을 바라봤다.
갑자기 찻주전자를 확인하더니 면포와 대야를 가져오라 명했으니 당연했다. 무엇을 하려는 건지 조금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대령했사옵니다, 전하.”
“여기 두고 밖은 전부 물려라. 침방 밖이 아니라 전각 밖에서 열 보씩은 떨어져 자리를 지키도록.”
“예, 전하. 명 받잡겠사옵니다.”
언은 이에 그치지 않고 침방 밖에 서 있는 궁인들을 모두 밖으로 물렸다.
규연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언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하. 어찌…….”
“누우세요.”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이냐며 물으려던 순간, 언이 규연에게 자리에 누우라 명했다.
“말씀 올렸다시피 신첩은…….”
“어명이라고 한마디 덧붙여야 따를 겁니까?”
규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평소보다 조금 부드러워진 언이 낯설기도 했고, 그가 보는 앞에서 누운 모습을 보이는 것도 괜히 민망했다. 왜 면포와 대야를 가져오라 명했는지도 알 수 없어 더 당혹스러웠다.
“안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냥 누워요.”
“…….”
“어명입니다.”
규연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눈만 끔뻑거리자 결국 언이 한마디 덧붙였다.
살짝 입술을 깨물던 규연은 조심스럽게 금침 위로 자리를 옮겼다.
“무엇을 하시려는 것인지 신첩에게 말씀하시면 신첩이…….”
“되었으니 그냥 제발 눕기나 하세요.”
언은 규연을 저지하며 대야에 차를 부었다.
찻주전자에 담긴 차는 구절초차였다. 잠을 청하는 효과가 좋은 차였다. 익선관을 쓴 뒤, 한창 불면과 싸우던 언을 자주 도왔던 차이기도 했다.
익숙한 향을 맡고, 익숙한 꽃잎을 반가워하며, 언이 차가 담긴 대야에 면포를 적셨다.
준비를 마친 언은 작은 대야를 들고 규연이 앉아 있는 금침 곁으로 다가갔다.
“중전은 앉아서 잡니까?”
“예?”
“언제쯤 누우라는 말을 들을 겁니까. 어명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한 것 같은데.”
“아…….”
결국 규연이 머뭇거리며 몸을 눕혔다.
“눈 감으세요.”
눈을 감으라는 말이 들렸지만, 규연의 눈은 말똥말똥하기만 했다. 아직도 이 상황이 낯설어 언이 하라는 대로 쉬이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짓 하려는 게 아닙니다. 잠드는 데 도움이 될 테니 그냥 눈을 감아요.”
망설이던 규연이 결국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목까지 끌어올린 이불을 꼭 쥔 손에서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티가 났다.
그 손을 본 언은 묘한 감정을 느끼며 규연의 눈 위로 구절초차에 적신 면포를 올려놨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느낄 수 있었다.
“양귀비 값입니다.”
온전한 친절임을, 온전한 다정함임을 들키면 안 됐다. 언은 양귀비를 핑계로 끌어오며 나직하게 말했다.
“…….”
지금까지 보인 언의 갑작스러운 행동의 이유가 규연에게 있음을 깨닫게 되자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이 규연을 휩쌌다.
여전히 다정한 언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 이 다정함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던 과거에 대한 그리움, 제발 이 다정함을 편히 마주하고 누리고 싶다는 간절함이 뒤섞였다.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참아 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감긴 눈 너머로 눈물이 흘렀다.
면포가 길어 귀까지 닿기에 언으로부터 눈물을 가릴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
언은 면포로 눈을 가린 채 가만히 누워 있는 규연을 가만히 바라봤다.
규연이 잠들어 있을 때면 몰래 이곳에 들어와 규연을 보고 갔던 여러 밤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때도, 지금도, 해 주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그러나 무엇도 전할 수 없음을, 그리고 전해서는 안 됨을 알기에 씁쓸함만 차올랐다.
구절초차의 향 덕인지, 언의 온기가 닿았기 때문인지, 규연은 평소와 달리 제법 금방 잠들었다.
내뱉는 숨의 박자가 일정해지고,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중전.”
언은 나지막이 규연을 불러 보았다. 그녀가 확실히 잠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규연은 너무도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고, 언은 조심스럽게 눈을 덮은 면포를 치워 냈다.
규연이 곤히 잠든 모습을 보니 옛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와 언을 덮쳤다.
〈아…….〉
세간의 시선이 있으니 어린 여인이 혼자 살고 있는 저택의 대문을 넘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규연의 저택을 찾을 때마다 숨겨진 쪽문을 이용하곤 했는데, 규연을 돌보던 현주댁에게 딱 들킨 적이 있었다.
〈아, 그러니까…….〉
〈정원에 계십니다. 가 보시지요.〉
〈……고맙네.〉
현주댁은 경계를 풀지 않으면서도 규연이 있는 곳을 알려 줬고, 언은 안도하며 안채의 정원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낭…….〉
다가가 보니 규연이 안채의 대청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언은 싱긋 미소 지으며 잠든 규연 가까이로 다가가 앉았다.
〈아직 날이 쌀쌀한데 고뿔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다가오는 봄이 느껴지는 겨울의 끝자락이었지만, 아직 공기가 찼다. 그런데도 이리 나와 잠든 규연이 걱정되면서도, 곤히 잠든 모습이 유달리 고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언은 멍하니 잠든 규연을 눈에 담았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도 자꾸 미소가 번지고, 보고 있는데도 더 보고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감?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요.〉
〈바로 깨우시지! 계속 기다리셨어요?〉
〈잠든 모습이 너무 고와 깨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전한 마음에 규연의 얼굴이 앵두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날의 우리는 참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는데.”
아련한 기억에 잠겼던 언이 작게 속삭였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작게 한숨을 내쉰 언은 잠든 규연의 얼굴을 찬찬히 아로새기다 그녀의 눈가에 남은 눈물길을 발견했다.
“……다정해도, 그렇지 못해도, 나는 그대를 울리네요.”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규연을 울려 버리는 것만 같아서, 언은 입 안 가득 퍼진 쓴맛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