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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30/68)

30화

언은 무슨 정신으로 통명전까지 내달린 건지 알지 못했다. 그저 규연을 살려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을 품은 채로 달리고 또 달렸다.

호롱불을 들고 길을 잡는 내관도 제쳐 버리고, 언이 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계속 달음박질했다.

‘제발. 중전. 규연, 제발.’

언제 마지막으로 불러 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이름을 곱씹으며, 언은 절실하게 빌고 또 빌었다.

규연을 잃는다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식었다.

중전의 자리를 반드시 지키겠노라 형형하게 눈을 빛내던 여인이 왜 갑자기 목을 매겠다는 건지, 왜 삶을 놓아 버리겠다며 애쓰는 건지 따져 볼 겨를이 없었다.

그저 살려야 한다는 일념만 남아 언을 움직였다.

“중전!”

언은 큰 소리로 규연을 부르며 통명전 안으로 들어갔다. 침방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중전?”

심장이 터질 기세로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왔건만, 막상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가니 너무나도 평안한 얼굴의 규연이 앉아 있었다.

그 어디에도 목을 매려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다른 자해의 흔적 역시 보이지 않았다.

“뭡니까?”

언의 물음에도 규연은 땀에 젖은 언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묻지 않습니까. 이게 뭐냐고.”

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낮게 가라앉았다. 꼭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에는 분노가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대답하세요!”

계속 침묵이 이어지자 기어코 언이 언성을 높였다.

규연이 다치지도 죽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다행이었지만, 죽음을 빌미로 언의 심장을 내려앉게 한 이 상황에 화가 났다.

통명전으로 달려오는 내내 펼쳐졌던 지옥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전하를 이곳으로 꼭 모셔야 했습니다. 해서 소란이 난 것처럼 꾸몄습니다. 정 상궁에게 그리하라고 명령했고요.”

“장난하자는 겁니까?”

“전하께 배웠습니다. 광증이 났다 속이시어 신첩을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언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규연은 말없이 굳어 버린 언을 가만히 바라봤다.

침의는 흐트러져 있고,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부리나케 달려온 흔적이 곳곳에 가득했다.

밭은 숨을 고르는 지금의 모습에 새까만 무복을 입고 대신 검에 베이던 과거의 모습이 겹쳐졌다.

‘제 목숨에 이리도 진심이시면서 어찌…….’

지금의 언은, 그리고 그때의 언은, 누가 봐도 규연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밀어내고, 그렇게나 모질게 굴었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규연을 살리려 했다.

모순이었다. 몇 번을 들여다봐도 그랬다.

‘마음이 분명 있으면서 대체 왜…….’

겨울밤 앵두를 쥐여 주며 진심으로 안위를 걱정했던 눈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그 눈은 보일 때마다 규연을 흔들어서 괜한 기대를 품게 했다.

그때는 규연의 착각이라며 눈을 감았는데, 이제야 그 눈의 의미가 또렷이 보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억누르지 못해 새어 나온 진심이었다.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겝니까? 하면 마음대로 하세요. 하나 나는 오늘 이후로 절대 중전을 찾지 않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언은 아직도 떨리는 손을 주먹 쥐어 감추며 침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규연의 한마디가 언의 발목을 잡았다.

“전하께서 그대로 전각 밖으로 나가시면, 신첩은 곧 죽을 겁니다. 반드시요.”

허튼 말이 아니었다. 규연은 영의정의 성정을 잘 알았다. 그녀를 빨리 해치우려 애를 쓸 게 분명했다.

나가려던 언이 몸을 돌려 규연을 바라봤다. 언과 규연의 시선이 한참 동안 맞닿았다.

“숙부께서 신첩을 죽이려 합니다. 더 이상 신첩이 중전인 꼴을 보고 싶지 않으신가 보더군요.”

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도 신첩을 이 자리에서 치워 내고 싶어 하시는 것 압니다. 신첩을 향한 마음이 없으시다는 것도 압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과 반대되는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갔다.

궁에 들어와 달라진 언을 마주한 순간부터, 규연은 늘 언에게 매달렸다. 과거의 다정한 사내를 알았기 때문이었고, 그 다정한 사내가 규연에게 어떤 마음을 내어 줬는지 알았기 때문이었고, 그랬기에 그가 예전으로 돌아올 수 있다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이 저를 얼마나 밀어내든 그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언이 두 발자국 멀어지면, 규연은 세 발자국 다가가는 삶을 내내 살아왔다.

그런데 언이 폭군의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며,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뜻을 숨기고 있다는 정황을 알고 나니 그간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내가 그렇게 다가갔기 때문에 매번 더 과하게 밀어낸 것이라면. 전하 역시 내게 상처 주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규연이 그토록 간절히 매달렸기에 더욱 모질게 밀어낸 것이라면, 사실은 규연에게 상처를 줄 마음이 없다면, 언이 이미 멀쩡해 그에게 다가가 제발 이전으로 돌아오시라고 간청할 필요가 없다면.

규연은 언이 원하는 대로 그에게서 마음을 접은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그래야 언이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규연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바짝 세운 가시를 죽일 것 같았다.

“하나 말씀드린 대로 신첩은 이 자리를 절대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래도록 지켜 온 자리를 쉽게 내어 줄 마음이 없습니다, 전하.”

“…….”

“해서 감히 거래를 청할까 합니다.”

거래를 하자는 말에 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늘 이곳에 머물러 주십시오, 전하. 안아 달라 청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따로 해 달라고 청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곳에 머물러만 계셔 주세요. 다른 이들이 전하와 신첩이 합방을 했노라 믿을 수 있게만요.”

규연은 언에게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차분하게 전했다.

그냥 나를 위해 남아 달라고, 내 목숨을 지킬 수 있게 한 번만 도와 달라고, 나를 향한 마음을 보여 달라고 청하면 언은 언제고 통명전의 문을 박차고 나갈 터였다.

하지만 그저 딱딱하게 거래를 청하면, 언이 거부하지 못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손을 내밀면, 못 이기는 척 규연의 청을 들어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그리 계셔 주시면 신첩이…….”

규연은 크게 숨을 고른 뒤, 언과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만큼 양귀비를 드리겠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을 들은 언의 눈동자에서 커다란 파도가 일었다. 규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당연히 진짜 양귀비를 언에게 안겨 줄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언을 잡아 둘 만큼 그를 흔들려면 양귀비만 한 물건이 없었다.

양귀비라면 유독 치를 떨던 규연이었다. 제발 양귀비만은 건드리지 말라며 간청하고 울었던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랬던 규연이 네가 원하는 만큼 양귀비를 안겨 준다고 말하면, 언으로 하여금 규연이 정말 마음을 접어 가고 있다고 믿게 하기 딱 좋았다.

“양귀비를 얻는 것보다 신첩을 내쫓고 성빈을 중전의 자리에 앉히시는 게 중요하다 하시면 미련 없이 보내 드리고 알아서 죽겠습니다.”

규연이 배수진을 치고 언을 쳐다봤다. 규연은 언이 그녀의 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장치를 여럿 만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꼭 중전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 같습니다.”

언은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며 규연을 바라봤다.

‘서혜의 말대로 무언가 알게 되어 갑자기 이렇게 변하는 겐가. 아니면 정말 마음을 접고 중전이라는 자리를 지키겠노라 굳게 다짐해 이리하는 겐가.’

이전의 규연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언을 불러들이지도 않았을 테고, 양귀비를 넘겨줄 테니 협조해 달라는 말 역시 절대 꺼내지 않을 터였다.

‘흔들리고 있어. 이전과 달라.’

언이 당황하며 상황을 살피는 동안, 규연 역시 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전처럼 매달렸다면 또 모진 말을 내뱉고 떠나갔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규연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하나 전하. 원하시는 만큼 다 드릴 것입니다. 원하시는 만큼, 전부요.”

“…….”

“양귀비인데,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양귀비는 언제나 사람을 홀렸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건 물론이고, 양귀비만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팔아넘길 수 있을 것처럼 굴게 만들었다. 가족도, 연인도, 벗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 양귀비에 늘 홀려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언이었다. 여기서 거절하면 그림이 더 이상해졌다.

규연은 그 부분을 노렸다. 언을 몰아넣고, 그가 가면을 쓴 이상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선택지를 내밀었다.

“…….”

언은 바로 답하지 않고 규연을 빤히 쳐다봤다. 여전히 규연의 머릿속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건지 살피는 티가 났다.

규연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냈다.

“좋아요. 거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중전이 원하는 대로 오늘 여기에 머물지요.”

“…….”

“하나 반드시 내놓아야 할 겁니다. 그 양귀비.”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무거운 침묵이 깨지고, 언이 규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약조하겠습니다, 전하.”

규연이 답하자 언이 다시 방 안쪽으로 들어왔다.

원하는 대로 목적을 이룬 규연은 안도의 숨을 삼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아채고 한 걸음만 물러났더라면 것을.’

아픔으로 얼룩졌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 규연의 흉터를 건드렸지만, 규연은 애써 무시하며 앞으로의 일을 준비했다.

이제야 조금씩 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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