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 *
“당분간은 밤마다 너를 찾지 않을 게다.”
서혜의 방을 찾은 언이 나지막이 말했다.
“영상 대감이 중전마마를 죽이려 한 것 때문이십니까?”
“그래. 맞다.”
언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은 늘 제 권위에 도전하는 이를 견디지 못하지. 처음으로 중전이 제대로 반기를 들었으니 어지간히 괘씸해하고 있을 게다. 그래서 바로 치워 버리겠다고 결심했는데, 살아남기까지 했으니 더 속이 끓을 터.”
언은 영의정이 어떤 자인지, 어떤 심리로 움직이는지 잘 알았다.
내리 몇 해를 영의정이라는 사내의 뒤를 캐고, 그로 인해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자들의 이름을 모으고,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이라며 매일같이 이를 갈고 있으니 당연했다.
영의정은 규연을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한 번의 실패와 궁이라는 장소의 특성 탓에 조심스러운 것일 뿐, 언제고 검을 휘두르며 규연에게 달려들지 몰랐다.
그러니 지켜야 했다. 언이 움직여야만 했다.
“하나 중전이 아직 쓸모 있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을 접을 게다. 아니, 접기보다는 미루겠지. 제게 이득을 줄 수 있으니.”
서혜의 회임을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언의 마음이 서혜에게서 조금씩 뜨고 있는 것 같다는 소문이 돌면, 영의정은 반드시 규연에게로 시선을 돌릴 터였다.
언은 이를 이용하고자 했다. 영의정의 손에 있는 규연이라는 패가 아직 효용이 다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야 했다.
서혜를 이용해 언을 향한 규연의 마음을 죽이고, 그녀의 입지를 좁히려 했던 자가 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모순인 상황이었다.
“신첩, 아니 소인을 궁 안으로 들이신 의미가 없어지는 게 아닌지요.”
서혜가 이 점을 정확히 짚어 내 물었다.
“내가 처음 그렸던 그림과는 분명 다르다. 많이 다르지. 하나 의미가 없어지진 않아. 네가 들어오고 나서 중전이 바뀌지 않았더냐.”
“…….”
“나를 향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접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어.”
규연이 절대 중전의 자리를 뺏기지 않겠다며 웅크렸던 어깨를 펴고 영의정이 이를 견제하며 그녀를 죽이려 드는 상황은, 분명 지독한 변수였다.
이로 인해 언이 처음 세웠던 계획과는 많이 달라졌다.
언이 서혜를 통해 조금 더 빨리 얻어 내고자 했던 건 규연의 폐비였다.
그는 혼란스러운 궁으로부터, 그리고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폭군 지아비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기를 바랐다.
잠시 강화도로 보내 쉬게 만든 뒤, 모든 혼란이 다 잠재워지면 그때 아무런 기록도 남지 않은 새 삶을 살게 해줄 생각이었다.
언은 그 모습을 볼 수 없을 테지만, 규연이 안전하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한데 이리될 줄이야.’
그러나 일이 틀어졌고, 당분간은 함부로 규연의 폐비를 추진할 수 없었다. 영의정이 규연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지금, 규연을 궁 밖으로 내보내는 건 그녀를 사지로 내모는 것과 같았다.
“……마마께서 마음을 접어 가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전보다는. 확실히 덜 맹목적이니까.”
서혜는 언과 의견이 달랐다.
서혜가 보기에 규연의 마음은 그저 잠시 지쳐 시들었을 뿐, 죽지 않았다. 물을 주면 언제고 살아나 생기를 되찾을 게 분명했다.
“마마께서 아직 쓸 만한 패라고 생각하면, 정말 영상 대감이 마마를 위협하지 않을까요?”
“분명 그럴 게다.”
언은 확신하며 대답했다.
“영상은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판단하면 절대 버리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
“게다가 흑의적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요새의 움직임이 커질수록 영상의 심기가 엉망이 될 테니, 그곳에 신경 쓰느라 중전에게는 관심을 덜 두기도 할 게야.”
“…….”
“이경에게 말해 실력 좋은 호위를 하나 더 붙여 두기도 했고.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게다. 반드시 버티게 해야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규연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언의 눈에서 활활 타올랐다.
서혜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요새의 움직임이 커진다는 것은 거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고, 이는 곧 언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뜻했다.
그런데도 언은 제 죽음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규연의 안위를 생각하느라 바빴다.
‘참 이상하지. 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까. 전하의 시선 끝에는 늘 마마가 계시는데. 항상 티가 나는데. 거짓으로 만들어 낸 광증에 다들 깜빡 속아 넘어가서 발견하지 못하는 겐가. 그저 광인이라고만 생각해서?’
궁 안에서 바라본 언의 시선 끝에는 늘 규연이 있었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도, 심지어는 규연조차도 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서혜는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
‘아니지. 당장 오라버니만 해도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계시지 않더냐.’
깨닫고 나니 입 안이 썼다. 며칠 전 이경 때문에 규연에게 한마디 쏘아붙였던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전하. 한 가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묻거라.”
그날의 기억은 자연스레 규연과 나눈 대화로 흘러갔다.
“혹시 오른 다리에 흉터가 아직 남아 계십니까? 혼례를 치르시고 얼마 가지 않아 마마께서 실수로 차를 쏟으시는 바람에 생겼다는 흉터요.”
“아직 남아 있지만,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다.”
언의 답을 듣자마자 서혜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오른 다리에 있는 흉터 말일세. 여전히 크게 남아 있나?〉
규연은 분명 ‘오른 다리’라고 이야기했다. 그게 함정이었다. 규연이 서혜의 답을 듣고도 크게 내색하지 않아 도박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니.
‘아…….’
서혜가 언과 밤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리라는 생각에 아찔함이 밀려왔다.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게지?”
“……며칠 전에 마마와 다과를 나누었는데, 그때 말이 나와서 궁금해 여쭈었습니다.”
거짓은 아니었으나 가려진 게 너무 많은 답이었다.
어쩌다 이 흉터 이야기가 나왔는지, 규연이 왜 미끼를 던졌는지, 어떤 상황에서 틈이 보였는지 밝히려면 서혜가 이경을 향해 품고 있는 마음을 언에게 말해야 했다.
에둘러 가려 보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규연이 왜 어딘가 이상하다는 점을 발견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니 솔직히 전할 수 없었다. 아직 이경도 알아채지 못한 마음을, 서혜의 입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낱낱이 고하고 싶지 않았다.
서혜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마마께서 무언가 낌새를 알아차리신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무언가를 감추셨을지 모른다고요.”
그러나 규연이 냄새를 맡았다는 사실은 반드시 전해야 했다.
“보성사의 일이 있었으니까. 구해 주던 찰나에 의혹을 품은 것 같더구나. 신기하지. 새까만 무복으로 온몸을 가리고, 혹여나 보게 될까 두려워 중전의 눈도 가렸는데. 그 짧은 순간에 나를 느끼고는 의심하게 되었다는 것이.”
언이 씁쓸함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생각해 두셨습니까?”
“무엇을?”
“마마께서 진실을 알아채셨을 때 어찌하실지요. 들켰을 때의 상황도 대비해 두셔야 합니다, 전하.”
“그럴 일은 없다. 중전이 온전히 사실을 알아낼 방도는 없어.”
불안해하는 서혜와 달리 언은 단호했다.
“다시 기대는 품을 수 있지. 아니, 이미 아마 기대하고 있을 거다. 중전이 알고 있던 예전의 나로 돌아올지 모른다고 말이야.”
“…….”
“하나 그뿐이야. 그 너머를 알아낼 수는 없을 게다. 증거를 찾지 못할 테니.”
“…….”
“중전의 마음만……. 그 기대로 인해 한동안 더 아프겠지. 빨리 그 마음을 접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없다.”
규연이 덜 아파하려면 한시라도 빨리 언을 향한 기대를 접어야 했다. 규연이 알고 있는 좋은 사람으로 돌아오리라는 기대도 접어야 했고, 어쩌면 언이 규연을 아직도 연모하고 있으리라는 희망도 꺾여야 했다.
두 가지 모두 거짓 없는 진실이었지만, 규연이 알아서는 안 됐다.
“아무튼. 한동안 너를 찾지 않을 게다. 그리 알고 있거라. 내 총애가 식은 것 같아 조바심이 나는 기색을 비치는 것도 잊지 말고.”
언이 서혜가 해야 할 일을 다시금 상기시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편하게 밤을 보낼 필요 없이 한동안 편히 잘 수 있으니 네게는 다행이로구나. 푹 쉬거라.”
언은 당장 오늘부터 조금씩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일 생각이었다. 여느 때와 달리 이곳에 아침까지 머물지 않고 대조전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전하! 주상 전하!”
그런데 그 순간,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전 주위에 누구도 남지 말라 했거늘 감히 누가 어명을 어기고 함부로 들어온 게냐?”
언은 서혜를 찾을 때마다 전각의 주위를 전부 물렸다. 궁에 붙은 귀로부터 안전해지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명령을 어기고 전각 안으로 들어왔고,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정 상궁이었다.
“죽여 주시옵소서, 전하. 하나 너무도 급박한 상황이라 소인이 이리 명을 어겼사옵니다.”
“너는 중궁전의 상궁이 아니더냐.”
규연을 모시는 중년의 여인이 아이처럼 엉엉 울며 말을 잇고 있었다. 정 상궁을 바라보는 언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정 상궁이 이렇게 운다는 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울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하거라. 무슨 일이 있기에 이곳에 찾아왔지?”
“마마를 살려주십시오, 전하.”
“……중전을 살려 달라니?”
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마께서 죽고 말겠다며 목을 매려 하고 계십니다.”
“……뭐라?”
“좀처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죽겠노라 자해를 멈추지 않…….”
규연이 목을 매려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동시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졌다.
언은 정 상궁의 말을 채 다 듣지도 않고, 그대로 방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시야에 들어차지 않았다.
오로지 규연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 하나.
그 생각 하나만이 언을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