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서혜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규연을 똑바로 쳐다봤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한 듯했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당의 아래에서 너무 꽉 마주 잡은 탓에 새하얗게 질린 손이 그 증거였다.
‘정말 꿈 때문에 묻는 게 아니야. 뭘 알아보려는 거지? 아까 내가 오라버니를 대할 때 실수한 게 있나? 아니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걸. 마마가 무언가를 알아챌 만한 게 전혀 없었는데…….’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전하의 옥체에 대해 묻는다는 건……. 내가 전하와 밤을 보낸 것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것일 텐데. 설마…….’
물음을 곱씹던 서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내 마음을 보았구나. 오라버니를 향한 내 마음을.’
깨달음을 얻은 순간, 조금 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자신을 더욱 책망하게 됐다.
외사랑이 그리도 감춰지지 않을 줄은, 규연이 그 연정을 그리도 쉽게 알아차릴 줄은 알지 못했다.
“성빈. 어찌 답이 없는가?”
규연이 무척이나 여유로운 목소리로 서혜를 보챘다.
서혜는 최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규연이 언에게 차를 쏟았다는 이야기는 이전에 전해 들은 적 있었다. 언이 다쳤던 터라 요새에서도 한번 말이 나왔다.
‘일단 흉터가 있는 건 맞아. 그때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 그러면…….’
언은 당연히 서혜를 안지 않았다. 그러니 서혜가 늘 옷에 가려져 있는 허벅지에 새겨진 흉터에 대해 알 리 없었다.
지난번에 규연을 속이기 위해 박 귀인을 혼내며 했던 말은 서혜가 언의 상처를 치료해 준 적이 있어 알았던 유일한 정보였다.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도박을 걸어야 했다. 규연의 말을 곧이곧대로 인정하며 보았다고 답하거나 어딘가 다른 점을 찾아내 답해야 했다.
뜨거운 물이 쏟아져 생긴 흉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보았습니다, 마마. 여전히 크게 남아 있습니다.”
고민하던 서혜는 미끼를 물었고, 규연은 성공적으로 서혜라는 물고기를 잡아 올렸다.
“……그렇구나. 말해 주어 고맙네. 내 항상 궁금했어. 그 흉터가 어찌 되었는지.”
서혜는 언에게 안기지 않았다.
* * *
규연은 서혜를 내보내자마자 크게 숨을 골랐다. 상 위에 툭 올려놓은 손이 잘게 떨렸다.
‘무엇을 감추고 계신 거지? 무엇을 감추느라 궁에 새 여인을 들여 거짓을 꾸며 내신단 말이냐.’
서혜가 들어오면서 변한 건 규연의 입지였다. 언에게 안기지 못할지언정 내명부의 수장으로서는 흠잡을 데가 없다며 인정받던 규연의 자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언제고 규연이 궁 밖으로 내몰릴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고, 언을 향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접어야 한다며 스스로를 더 다그치게 되기도 했다.
‘전하께서 숨기시려는 건 연성 대군 시절의 모습이겠지. 총명함을 드러냈다가는 숙부가 죽일 테니까. 그건 분명해.’
무복을 입고 궁 밖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던 것만 보아도 언이 가면을 쓴 채 무엇을 감추려 하는지 어렴풋이 그릴 수 있었다.
규연이 아는 언은 절대 폭군이 될 수 없는 사내였다. 폭군인 척 영의정의 눈을 피하며 백성들을 위한 일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규연을 왜 그렇게 병적으로 밀어내고 있는지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영의정을 내칠 예정이라 그의 질녀인 규연을 멀리하려는 것이라기에는 행동이 과했다.
가문이 역적으로 몰려도 원자를 낳거나 내명부를 잘 관리한 공이 있으면 홀로라도 살아남는 게 중전이었다.
규연이 아는 언이라면 영의정을 내쳐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멀리할 리 없었다. 영의정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다 보이며 제 편으로 끌어안았을 이였다.
‘숙부의 눈을 가리기 위한 연막 중 하나였다고 해도 말이 안 돼.’
영의정을 속이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해도 아귀가 맞지 않았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숨죽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영의정이 세운 왕비인 규연과 사이좋은 모습을 보이며 그의 손자를 보는 게 더 유리했다.
어떻게 해서든 규연의 가슴에 대못을 박으려 들던 여러 행동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무엇일까. 대체 왜 나를…….’
몇 번이고 곱씹고 또 곱씹었지만, 명확히 보이는 이유가 없었다. 왜 그렇게 규연의 마음을 접게 하려 애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마. 정 상궁이옵니다.”
“들어오게.”
한창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통명전 밖에서 일을 보던 정 상궁이 규연 곁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오는 빠른 걸음과 살짝 상기된 얼굴에서 꽤 중요한 소식을 듣고 온 티가 났다.
“무슨 일이야?”
“마마께서 분부하신 대로 편전에서 도는 이야기를 모아 왔습니다.”
“특이한 게 있어?”
언의 등에서 상처를 찾지 못한 규연이었지만, 그래도 여지를 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연은 곧바로 정 상궁에게 궁에 도는 이야기를 찾아 모아 오라고 명했다.
“전하의 광증이 날로 다양해지는 듯하다고 합니다.”
“……광증이? 어찌해서?”
“목욕 시중을 드는 궁녀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고, 여인이 욕탕 안에 드는 게 싫다며 갑자기 난동을 부리셨답니다.”
“해서?”
“해서 그 후로 내리 이레를 상선 영감께서 홀로 시중을 들고 계시다 합니다. 목욕 시중을요.”
규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지금 정 상궁이 물고 온 소식은 등의 상처를 확인시켜 주는 말과 똑같았다. 규연이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직접 본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목욕 시중을 받으려면 몸을 다 드러내야만 했고, 궁녀들이 등에 새겨진 흉터를 볼 수밖에 없었다.
궁녀들은 여러 세력이 저마다 붙여 둔 눈과 귀였다. 그들의 눈에 발견되면, 반드시 어디론가 이야기가 흘러들어 갔다.
언이 갑작스레 난동을 부린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는 궁녀들의 시선으로부터 상처를 가리려 하고 있었다.
“상선 영감도 참으로 딱하시지요. 그 연세, 그 품계에 그게 무슨 꼴이시랍니까.”
상전이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지 모르는 정 상궁만 혀를 끌끌 찼다.
“마마? 어찌 안색이…….”
말을 뱉고 나니 아차 싶어 황급히 고개를 돌렸건만, 규연은 되레 안색이 밝아지고 있었다.
규연으로서는 당연했다. 언이 망가지지 않았다는 사실, 언이 웅크리고 있을 뿐이라는 증거가 나오고 있는데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 내가 포기하지 않은 게 옳았어.’
규연은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껏 규연이 버텨온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언이 정확히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그리고 왜 규연을 이토록 밀어내려 하는지 알아내야 했다.
“정 상궁.”
“예, 마마.”
“성빈에 대해 낱낱이 알아보게.”
단서가 될 수 있는 건 모두 뒤져야 했다. 그중 하나가 서혜였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 관련된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모조리 가져오게. 이판과 집안 전체로 확대해 알아보아도 되고.”
이판은 영의정의 측근 중에서도 측근이었다. 어쩌다 그 여식이 언의 휘하로 들어간 건지, 이경과의 관계에서 혹시 더 알아볼 수 있는 건 없는지, 무엇이든 다 살펴야 했다.
‘시간이 필요해. 무엇이든 알아내려면, 무조건 시간을 벌어야 해.’
언의 비밀을 알아내려면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미 규연을 죽이려 했던 영의정이 그녀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규연은 누구보다도 그녀의 숙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그는 한번 문 사냥감은 놓아주는 법이 없었다. 계속해서 호시탐탐 규연의 목숨을 노릴 터였다.
이경이 가장 신뢰하는 자라며 뛰어난 호위를 붙여 주었지만, 그 무사가 모든 위험을 막을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더 확실한 방법으로 규연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원래도 중전이라는 자리를 내어 줄 마음이 없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더더욱 내어 줄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지키고, 또 버텨야 했다.
‘어떻게 해야 시간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속여야 할까. 숙부가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뭘까.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건 또 뭐고?’
규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손가락으로 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을 거듭했다.
기발한 수가 필요했다.
“……정 상궁.”
“예, 마마.”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어의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어의 영감에 대해서 말씀이십니까?”
“그래. 의녀 사이에서든, 궁녀 사이에서든, 분명 도는 말이 있을 거야. 숙부님에게서 받은 돈만 해도 보통이 아닐 테니까. 함께 일하는 이들도 이 사실을 대부분 알 테고. 아니꼬워하는 자도 많으니 약점이 될 만한 이야기가 있을 게다.”
규연의 명령을 들으면 어지간해서는 되묻는 법이 없는 정 상궁이 다소 의아하다는 듯이 상전을 바라봤다.
“마마, 어찌하여 어의 영감의 뒤를 캐시는 것인지요?”
“역으로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규연이 정 상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무슨 약을 먹는지, 어디가 안 좋은지, 심지어는 달거리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조차 숙부님께 일러바치는 자가 아니더냐. 그 점을 이용해야겠어.”
“…….”
“숙부님께 흘러들어 갈 이야기를 꾸며 낼 생각이다. 내가 회임을 했다고.”
정 상궁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규연은 경악하는 정 상궁을 보며 싱긋 웃었다.
영의정이 규연을 죽이지 않는 법, 그래서 규연이 시간을 벌 수 있는 법.
그건 바로 회임이었다. 규연의 배 속에 용종이 들어섰다는 소식 하나면, 너무 많은 것들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