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 * *
“내게 호위를 하나 더 붙이겠다는 말입니까?”
“예, 마마.”
규연은 조금 놀란 눈으로 이경을 바라봤다.
“사가에서부터 모시던 자도 아니고, 궁의 병사도 아니니 당황스러우시다는 것 압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신뢰하는 벗 중 하나이고, 실력 또한 월등히 뛰어납니다. 하니 마마께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언이 부탁한 대로, 이경은 규연에게 그가 믿을 수 있는 부하 하나를 호위로 붙이는 게 어떠냐며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궁의 병사가 아니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이경이 호위로 쓰려는 자는 호위청에 소속된 그의 부하였다.
“당황스럽진 않습니다. 하나 그리 귀한 인재를 내 호위로만 붙여도 되는 건가 싶어 그렇지요. 요즘 전하의 신변을 향한 위협이 늘어 호위청이 무척 바쁘다 들어서요. 그리 뛰어난 자면 나보다는 전하를 지키게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규연의 말이 또 이경의 가슴을 찢었다.
오로지 규연을 지키기 위해 호위를 데려오겠다고 말하는 상황에서조차 규연의 머릿속에는 언만이 가득했다.
“전하는 소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호위할 것입니다. 호위청의 모두가 그렇게 일하고 있고요. 인력이 부족한 상황은 아닙니다, 마마.”
“아. 호위청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리 들렸다면 미안해요.”
“아닙니다, 마마. 저도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이경은 서둘러 덧붙이고는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도 중요하십니다.”
“네?”
“마마의 안위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마마께서도 지난번에 목숨을 잃을 뻔하셨어요.”
“아…….”
규연이 탄식을 뱉었다. 이경의 말이 맞았다.
뛰어난 인재라는 말을 듣고 본능적으로 언을 떠올려 버린 자신의 모습에 규연마저도 한숨이 났다.
그녀를 구한 사내가 언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뒤로는 어떻게 해서든 기대와 마음을 내려놓으려 애썼다.
여전히 그 사내가 언이라는 생각을 지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제 마음을 바라는 짓은 그만두고 중전이라는 자리에 집중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런데 언을 향한 연정은 지금처럼 틈을 비집고 흘러나와 규연을 당황하게 했다.
꼭 영원히 접을 수 없는 마음 같았다.
“하면 마음을 고맙게 받겠습니다. 일도 있었으니 뛰어난 사람이 내 뒤를 지켜 주면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예, 마마.”
절대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반드시 버텨 내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이를 악물고 살아남아야 했다.
“두 분께서 무척 친근해 보이십니다.”
규연이 이경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있을 때, 하늘색 당의를 입은 서혜가 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궁의 여인이 젊은 별장과 시시덕거리면 어떤 말이 돌겠냐며 주의를 주신 것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새 마마께서 생각을 바꾸신 듯합니다.”
싱긋 웃고 있었지만, 건네는 말에 적개심이 가득했다.
규연은 살짝 미간을 구기며 서혜를 바라봤다. 두 여인 가운데에 서게 된 이경 역시 무척이나 당황한 기색으로 서혜를 쳐다봤다.
서혜가 규연에게 이 정도로 적개심을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언의 총애를 즐기며 규연을 무시하려 할 때도 선을 넘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늘 똑똑하다고 생각했고, 쉽지 않은 상대라고 여겼다.
‘한데 왜…….’
그런데 지금 규연이 마주하고 있는 서혜는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여전히 언은 규연이 아닌 서혜를 찾고 있었고, 왕의 총애가 누구의 몫인지 모르는 자가 없으니 규연에게 날을 세울 이유도 없었다.
“자가.”
이경이 나직하게 서혜를 부르자 그녀의 시선이 이경에게로 향했다.
그저 부른 것뿐이었지만, 많은 말이 담긴 게 규연의 눈에도 보였다. 왜 이러냐는 듯한 타박이 있었고,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의아함이 있었다.
규연은 그런 이경을 바라보는 서혜를 유심히 살폈다.
“…….”
이경의 한마디에 서려 있는 여러 의미가 그저 야속하다는 듯, 그저 아프기만 하다는 듯, 눈에 상처가 가득했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외면당해 아파하는 눈이었다.
누구보다도 규연이 잘 알았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자신의 눈이니까.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성빈이 이경을?’
그 마음을 읽어 내고 나니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규연이 아는 서혜는 언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이였다. 언을 바라보며 수줍게 미소 짓고, 언의 마음을 바라며 그의 시선이 닿을 때를 기다렸다.
‘그때와는 다른 눈이야. 지금이 진심이야. 그런 수줍음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혼란의 소용돌이가 규연을 덮쳤다.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좋아하는 이가 사실은 이경이라니.
“저번부터 궁금했던 것이 있는데. 별장과 성빈은 이전부터 아는 사이입니까? 꽤 친근해 보여서.”
“아, 자가께서 사가에 계실 때 저와 오누이처럼 지내셨습니다. 하나 그뿐입니다. 마마께서 오해하실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이경이 단호하게 선을 긋자 서혜의 눈에 비쳤던 야속함이 서글픔으로 변했다.
그 변화를 본 순간, 규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별장. 잠깐 자리를 물려 주겠습니까? 내 성빈과 긴히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에요.”
“아……. 예, 마마.”
확인해야 했다. 어쩌면 규연의 머릿속에서 잔뜩 엉켜 버린 실타래를 풀 단서가 될지도 몰랐다.
* * *
“사실 그날은 내가 실수를 했네. 되도 않는 트집이었지. 금방 따로 불러 마음을 풀었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마마. 송구합니다. 소첩이 모자랐사옵니다.”
규연과 서혜는 통명전에 다과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앉았다.
규연이 먼저 물꼬를 트자 서혜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사과했다.
본인이 모자랐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서혜는 조금 전 이경이 있는 자리에서 욱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규연에게 한마디 쏘아붙인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서혜는 언이 시킨 일을 하는 와중에 틈틈이 이경을 좇았다. 언을 호위하는 게 이경의 일인지라 자주 마주칠 수는 없었지만, 사가에 머물 때보다는 훨씬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전보다 가까이서 이경을 마주하고 보니, 규연을 향한 그의 마음이 더 절절히 느껴져 괴로웠다.
이경은 규연이 있을 때면 항상 그녀를 바라봤다. 바로 옆에 있는 서혜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오로지 규연만을 위해 움직였다.
그게 너무 야속했다. 내내 그를 바라보고 있는 서혜의 마음은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는 바보 같은 모습이 마냥 답답했다.
‘실수야. 그래도 참았어야 했는데.’
서혜는 계속해서 자신을 탓했다.
차곡차곡 쌓인 야속한 마음은 규연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이경의 모습을 본 순간 터져버렸다.
그래서 참지 못해 심술을 부렸고, 결국 긁어 부스럼만 만들고 말았다.
“궁에 들어오면 외로워지지. 그러니 어릴 적부터 알았던 별장이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 사연을 알았으면 그날도 그리 굴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우리 둘 다 한 번씩 실수를 했으니 이 일은 그냥 없는 셈 치지.”
“이해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규연은 너그러이 넘어가는 척 차를 머금으며 서혜를 유심히 살폈다.
서혜가 이경을 마음에 품은 듯한 모습을 보자 ‘만약’이라는 글자가 새롭게 피어났다.
만약 이경과 서혜가 어려서부터 오누이처럼 자란 이유가 따로 있다면. 만약 서혜가 이경을 좋아하는데도 후궁 첩지를 받고 궁에 들어와야 했던 이유가 있다면. 만약, 그 이유에 언이 관여했다면.
언과 이경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이경은 더 이상 예전의 언은 없다며 확언했으나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여전히 그를 언의 측근이라 여겼다.
언이 무언가 감춘 채 꾸미는 중이라면, 이경 역시 깊이 엮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서혜 역시 규연이 모르는 ‘무언가’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이판의 여식이야. 숙부의 사람일 수밖에 없어. 이경의 집안은 북촌 두루두루 친분이 있으니까. 그저 집안의 연으로 오가다 성빈 홀로 좋아하게 됐을 수 있지. 하나 궁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왕의 총애가 필요하니 전하께 매달린 것일 수 있고.’
언의 개입이 전혀 없는 마음이라는 것이 하나.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전하께서 나를 밀어내려는 연유이시든, 또 다른 목적이시든 간에 무언가 이루기 위해 일부러 들여온 여인이라면?’
언의 뜻에 따라 궁에 들어온 여인이라는 것이 둘.
‘전자라면 전하께서 무조건 안으셨을 테고, 후자라면 건드리지 않으셨겠지.’
이경을 향한 진심이 따로 있을 뿐, 언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상태라면 그의 품에 안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총애받는 후궁의 허울을 꾸며 내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규연은 이를 확인하고자 했다.
“성빈.”
“예, 마마.”
“내가 이전부터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알려면 자네밖에는 도움을 청할 자가 없어서 말이야.”
“무엇이신지요?”
아직 이경과의 일에서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서혜가 조금 지친 기색으로 되물었다.
“내가 이전에 전하의 허벅지에 뜨거운 차를 쏟은 적이 있네. 당연히 실수였고. 하나 나 때문에 전하께 흉터가 남았네. 무척 아파하셨고 말이야.”
“…….”
“그때는 전하의 자비로 문책 없이 넘어갔지만, 내 마음이 멀쩡했겠는가? 흉이 다 나으셨는지, 덧나지는 않으셨는지, 항상 확인하려 애썼는데 전하께서는 신경 쓰지 말라며 역정만 내시어 더 여쭐 길이 없었네. 그 뒤로 계속 말이야.”
“…….”
“이리 말하기 참으로 면이 서지 않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전하께서는 나와 밤을 보내지 않으시니까. 그 흉터가 남았는지, 없어졌는지 알 길이 없어.”
규연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서혜와 눈을 맞췄다.
“혹시 그 흉터가 남아 있는가? 다른 게 아니라, 어젯밤 꿈을 꾸었는데 그날 일이 나와서 말이야.”
“…….”
“전하께서 무척 괴로워하셨는데,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 흉흉한 꿈을 꾸고 나니 자꾸만 그 흉터가 떠올라.”
이전에 서혜가 규연에게 망신을 준 방식이었다. 규연은 그 방법을 그대로 이용해 서혜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다.
“오른 다리에 있는 흉터 말일세. 여전히 크게 남아 있나?”
거짓말이었다. 규연이 실수로 차를 엎어 생겼던 언의 흉터는 왼 다리에 있었다.
함께 밤을 보냈다면 절대 모를 수 없는 방향이었다. 그만큼 흉터의 범위가 넓었으니까. 온전히 사라졌을 리도 만무했다.
“묻지 않는가. 보았어?”
규연이 서혜가 잠긴 호수에 낚싯대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