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68)

26화

* * *

“전하. 당분간 쉬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혹여나 옥체에 무리라도 가면 큰일입니다.”

“차도가 좋아. 다들 염려 말거라. 슬슬 기지개를 켜는 단계인데 내가 어찌 쉴 수 있겠느냐.”

언은 아직 다 낫지 않은 몸으로 요새로 향했다.

다 낫기 전까지는 절대 찾아오지 마시라는 간청은 언에게 닿지 않았다. 윤성을 비롯한 젊은 선비들이 하나같이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윤을 바라봤다.

“상황은?”

“군량미를 빼돌린 자들은 전부 해치웠습니다. 어떤 짓을 했는지 상세히 적어 방을 붙여 두었고요.”

“낙인은? 우리임을 알 수 있게 확실히 적어 붙여 두었어?”

“예, 전하. 확실히 적어 두었습니다. 민심이 들끓고 있습니다. 다들 한계에 다다르던 참이니까요.”

언이 왕위에 오른 후로 땅을 골라 뿌려 둔 씨앗이 슬슬 열매를 맺고 있었다. 폐단의 꼬리를 잘라 내며 머리를 압박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은 새까만 무복을 입고 그림자 틈에서만 움직인다 하여 ‘흑의적’이라는 이름으로 언의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다.

“휼은? 돌아왔나?”

“예, 전하. 오늘 아침에 궁가로 돌아오셨습니다.”

휼은 언의 동생이었다. 같은 배에서 나온 네 명의 형제 중 막내였고, 군호는 상평이었다.

“휼의 움직임은?”

“명목은 금강산 기행이셨지만, 아시다시피 전국 팔도의 상황을 살피고 오신 듯합니다. 오늘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늘 모이는 곳에 가셨습니다. 아마 이제 흑의적에 대한 소식도 들으시겠지요.”

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언이 요새에서 의적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윤성과 이경을 비롯한 대부분이 언의 계획에 반대했다.

꼬리 몇 개를 잘라 낸다고 사라질 폐단이 아니기도 했고, 영의정의 경계심을 자극해 거사를 성공하기 전에 위기를 마주하게 될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언은 강경하게 꼬리 몇 개를 잘라 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확실하게 일을 해결하기 전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몇이라도 구해야 하는 게 하나, 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휼의 부담을 덜고 그에게 민심이 따르게 하기 위함이 둘이었다.

아무런 사정을 모르는 휼은 언의 폭정을 끝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 역시 물밑에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언만큼 치밀하진 못했다.

그래서 언이 판을 깔기로 했다. 흑의적의 모든 공을 휼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언은 이 요새에 모인 자들의 우두머리를 윤성과 이경으로 정했고, 때가 되면 이 둘이 흑의적임을 밝히며 휼의 휘하로 들어가는 게 그가 그리는 그림이었다.

언이 뿌려 둔 씨앗에서 맺힌 열매를 수확하는 건, 언이 아니라 휼의 몫이었다.

“영상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직 관망하는 듯합니다.”

“원체 신중한 자니까. 그래도 계속 살피고.”

“예, 전하.”

대답을 마친 윤성이 이내 다시 걱정 가득한 눈이 되어 언을 바라봤다.

“그리 보지 말래도. 탈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가벼운 상처가 아니니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제발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전하. 간청드립니다.”

“네가 그리 살갑게 말하니 다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전하!”

“농이다. 내 걱정 할 생각에 거사나 더 염려하며 변수가 없는지 낱낱이 살피거라. 나를 그리 걱정해 무얼 해.”

언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윤성을 달랬다. 그러다 그 뒤에서 윤성과 똑같은 눈으로 언을 바라보고 있는 이경을 발견했다.

“이경아.”

“예, 전하.”

“너는 잠시 나와 이야기를 하자꾸나. 해야 할 말이 있으니.”

* * *

“전하. 혹시 한 가지 먼저 여쭈어도 될는지요.”

요새 밖으로 나온 뒤, 이경이 먼저 입을 뗐다. 언은 먼저 말해 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께서 공격당하시리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보성사로 소신을 보내신 것입니까?”

이경은 규연과 대화하면서 이미 답을 깨우쳤다. 하지만 더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기일마다 그곳으로 나가니까. 중전은 분명 보성사로 갈 텐데, 영상이 그 틈을 놓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

“중전이 외명부의 부인들을 다 불러 놓고 영의정에게 한 방 먹여 가면서까지 중전의 자리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 버려서.”

이경은 몰랐던 일이었다. 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중전이 그 자리를 내놓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상, 영상은 계속해서 중전의 목숨을 노릴 거다. 원하는 대로 쥐락펴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더 발악을 하겠지.”

내내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말을 잇던 언이 고개를 돌려 이경을 바라봤다.

“흑의적의 일로 이미 바쁘다는 것을 안다. 나를 지키는 일도 마찬가지고. 하나 염치 불고하고 한 가지만 청하자꾸나.”

언의 애달픈 눈이 이경을 마주했다.

“네 휘하에 있는 병사 중 가장 신뢰하는 자를 규연에게 붙이거라. 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호위할 수 있게 해야 해.”

“…….”

“중전을 지켜 다오. 나 역시 있는 힘껏 지키겠지만, 내 힘이 닿지 못할 때가 있을 게다.”

거사가 코앞이었다. 지금까지 이를 악물고 견뎌 와 놓고, 고통의 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규연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언은 잠시 시선을 내리고 옅은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이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거사가 끝난 뒤에도. 그때는 더욱. 중전을 지켜 주었으면 한다. 온전하게 홀로 남을 테니까.”

“…….”

“부탁하마.”

목소리 사이사이에 스며든 숨에서까지도 진심이 느껴졌다. 언이 규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녀의 안위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이경은 그 마음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규연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이경 역시 언만큼이나, 아니 언보다도 더 크고 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왜 자꾸 이렇게 한 발자국씩 늦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경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항상 그의 앞에 언이 있었다.

늘 언이 먼저 헤아렸고, 언이 먼저 보호했다.

연정을 깨닫는 것도, 규연의 마음을 얻는 것도, 혼인을 치르는 것도, 그 안에서 규연을 보호하는 것도, 전부 이경이 한 걸음씩 늦었다.

“중전은 네 오랜 벗이기도 하니까. 약조해 줄 수 있겠느냐?”

“소신의 목숨을 바쳐 지키겠습니다, 전하. 맹세합니다.”

언은 고맙다며 이경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옅게 웃었다.

입꼬리는 분명 호선을 그리고 있는데, 언이 머금은 미소는 한없이 슬프게만 느껴졌다.

이경은 그 서글픈 웃음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불지옥에 타고 있으면서 규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무렇지 않게 더한 고통을 감내해 내는 언과, 생기를 다 잃어 가면서까지도 언을 놓지 못하고 그를 여전히 연모하는 규연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

과연 언이 떠난다고 이경이 가장 앞에 설 수 있을까. 과연 언이 생각하는 대로 그가 떠나가고 나면 규연이 그를 잊을 수 있을까.

‘그럴 리 없지 않사옵니까, 전하.’

이경은 들리지 않을 답을 전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 * *

“왜 자꾸 이 시간이 걸리는지 모르겠군.”

요새에서 일을 마친 언은 조용히 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하필 번이 바뀌는 시간에 언의 걸음이 통명전 앞에 닿았다.

언은 어둠에 숨은 채 통명전 뒤쪽으로 향했다. 규연은 여전히 밤마다 잠을 설쳤고, 틈만 나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탓에 언이 그녀의 침전에 몰래 찾을 수 없었다.

한계에 다다르면 몰래 들여온 귀비탕을 마시고 약에 취해 잠드는 게 요즘의 규연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유월을 불러 통명전의 문을 열라고 하고 싶었지만, 규연이 아직 잠들지 않았을지 모르니 함부로 잠입할 수 없었다.

“…….”

침전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상의원의 첨정을 데려와 치수를 재는 척 언의 상처를 확인하려고 했던 규연이 떠올랐다.

언이 들키지 않기 위해 상처를 그대로 내버려 두며 독하게 버텨서 망정이지, 약이라도 발랐다가는 꼼짝없이 들통 날 뻔했다.

‘생각지도 못한 수를 어디서 그렇게 떠올려 오는 겁니까.’

상처를 확인하려 애쓰리라는 점은 진작 예상했지만, 옷을 지어 주겠다며 다가온 기발함에 언이 피식 웃고 말았다.

웃을 일이 아닌데도 그냥 웃음이 났다. 규연의 일은 언제나 이렇게 논리를 벗어났다.

〈그러게 말입니다. 신기하지요.〉

그러다 문득 규연이 속삭이듯 건넸던 대답이 떠올랐다. 허탈함이 가득 묻어나는 음성이 되살아나자 언의 입이 썼다.

언은 씁쓸함을 달래려 천천히 화계로 다가갔다.

규연이 방에서 창을 열면 딱 보이는 곳에 화계가 있었다. 규연이 좋아하는 각가지 꽃이 열을 맞춰 예쁘게 심어져 있었는데, 봄의 한가운데를 지나면서 만개한 꽃이 많았다.

언은 화계를 가득 채운 꽃을 찬찬히 살폈다.

작게 삐져나온 잡초를 하나 뽑고, 흐드러진 흰색 영산홍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 대감께서는 어떤 색 영산홍이 제일 예쁘세요?〉

〈흰색이요.〉

〈정말요?〉

〈네. 어찌 그리 놀랍니까? 아, 대부분 붉은색이나 분홍색을 좋아하긴 하더군요. 그래서 그래요?〉

〈대부분 그런데 저도 흰색을 좋아해서요. 그런데 대감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놀랐어요.〉

〈우리는 통하는 게 참 많네요.〉

통하는 게 많다는 이야기에 수줍게 웃던 규연의 모습이 선연했다. 언은 그도 모르게 살포시 웃고 말았다.

“너는 오래 피어 있었으면 좋겠구나. 중전이 유달리 좋아하는 꽃이니.”

알아들을 리 없음을 알면서도, 언은 흐드러진 꽃잎을 살짝 건드리며 부탁했다.

궁에 들어온 규연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속이 답답해질 때면 바라보며 숨을 트이는 화계는 전부 언이 꾸린 공간이었다.

규연은 그저 성실한 궁인 하나가 부지런히 관리하며 계절에 맞춰 꽃을 바꾸는 정성까지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모두 언의 몫이었다.

누구보다 규연을 괴롭게 하는 게 자신임을 알기에 참으로 우스운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은 차마 화계를 꾸미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쉬어 갈 수 있길 바랐다.

규연이 참 좋아하던 꽃으로 가득 찬 곳에서, 아주 잠시라도 행복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매일이 살얼음판이고, 나날이 말라 가고 있어 알아채지 못했지만, 통명전의 화계에는 규연이 좋아하는 꽃으로만 가득했다.

언이 그렇게 만들었다.

오로지 규연이 좋아하는 꽃만 피어날 수 있도록.

그가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규연과의 추억을 더듬고 더듬어서, 항상 그렇게 꽃을 추려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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