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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5/68)

25화

* * *

이경은 절대 언이 아니라며 단호히 확언하고 떠나갔지만, 규연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분명 전하셨어. 정말 너무나도…….’

죽음을 예감한 순간 눈가에 닿았던 커다란 손의 온기도, 규연을 끌어안았던 품에서 나던 향도, 아주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던 숨소리도, 모두 언을 가리켰다.

얼굴도 복면으로 가려져 있었고 어둠에 숨기 위해 새까만 그림자를 온몸에 뒤덮고 있었지만, 규연은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연모라는 것은 참으로도 잔인해서, 한번 마음에 품은 순간 남들은 보지 못하는 사소한 것들까지 모조리 눈에 담을 수 있게 만들었다.

다른 이들은 속일 수 있어도, 규연은 속일 수 없었다.

한없이 그리워한 품을, 또 한없이 그리워한 온기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 그렇게 한 번에 변할 이유가 없어. 그럴 분도 아니셨고.’

아직도 초야를 치르기 위해 기다리던 밤에 마주했던 언의 모습이 생생했다.

규연이 알던 사내가 아니었다. 규연과의 기억을 모조리 잊은 것처럼 굴며 영의정의 질녀는 품에 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가례가 원체 길고 피로하다 보니 까무룩 잠이 들어 지독히도 생생한 악몽을 꾸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언은 보지 못한 사이에 너무나도 망가져 있었다.

‘다들 양귀비를 이유로 들지만, 만일 그게 연막이라면?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이라면?’

언이 광증을 일으킬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를 물으면 대부분 양귀비 때문일 것이라며 입을 모았다. 규연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언이 양귀비 향에 취해 있을 때면 더욱 속이 상했다.

그런데 언이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연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니 양귀비조차 전부 연막처럼 보였다.

‘직접 확인해야 해. 자상을 입으셨으니 반드시 티가 날 거야.’

어쩌면 규연이 기억하는 연성 대군이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넘실넘실 피어올랐다.

규연은 어떻게 하면 언의 등에 새겨진 상처를 확인할 수 있을지 하루 온 종일 고민했다.

함께 밤을 보내는 사이도 아니고, 무작정 달려들어 왕의 등을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딱히 묘수가 없어 보여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을 때, 언의 생일이 떠올랐다.

‘탄일을 위해 옷을 짓겠다고 하자. 전하의 천수를 위해 옷을 짓고자 하는데, 딱 맞는 옷을 만들어야 하니 상의원에서 치수를 재야 한다고.’

몸을 가까이서 살피기에는 이만한 수가 없었다.

“중전마마.”

“치수는 내가 직접 잴 것이니 겁먹을 필요 없네. 가만히 자리만 지키도록 해.”

“예, 마마. 그리하겠사옵니다.”

편전 앞에서 규연을 기다리고 있던 자는 다름 아닌 상의원의 첨정이었다.

규연이 걱정 말라며 이야기했으나 첨정의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언은 옷을 짓기 위해 치수를 잴 때마다 역정을 내거나 행패를 부리곤 했는데, 그 기억이 또렷한 첨정 입장에서는 규연의 말을 들어도 그리 안심되지 않았다. 규연이 치수를 직접 재겠다는 말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고하거라.”

“중전마마 드셨사옵니다, 전하.”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규연이 편전 안으로 나아갔다.

“전…….”

인사를 올리려던 규연이 말을 잇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으로 언을 바라봤다.

“뭘 그리 놀랍니까. 내가 이리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면서.”

언은 편전에 있으면서도 용포 대신 침의를 입고 있었다. 새하얀 비단이 그를 감싼 모습이었는데, 술 때문에 잔뜩 열이 오른 탓인지 앞섶을 다 풀어 헤쳐 맨몸이 다 보였다.

‘……면포가 안 감겨 있어.’

탄탄한 근육이 훤히 보였다. 아무것도 가려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감겨 있지 않았다.

장검에 맞은 상처였고, 고작 이틀이 지났다. 면포를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중전이 상의원의 관원을 줄줄이 달고 들어올 일이 무엇이 있지?”

“곧 탄일이시지 않습니까, 전하. 신첩이 전하께 옷을 하나 지어 올리려 합니다. 해서 첨정을 불러 이리 데려왔습니다.”

“옷?”

술병을 쥐고 있던 언의 인상이 한껏 찌푸려졌다.

“내가 옷을 짓는 일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텐데. 일부러 이럽니까?”

“신첩이 직접 잴 것이옵니다, 전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섬세히 살필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규연이 직접 하겠다고 하자 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이글거리는 눈으로 다가와 어디 한번 해 보라며 양팔을 벌렸다.

규연은 침정으로부터 건네받은 줄을 들고 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고작 이틀 전이야. 장검에 베인 상처가 이틀 만에 아물 리 없어. 면포를 일부러 풀어 놓은 것이라면…….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흐를 텐데.’

언은 새하얀 침의를 입고 있었다. 면포를 풀어 둔 채로 지금처럼 움직이면 분명 상처가 벌어져 피가 새어 나올 터였다.

규연은 일부러 등 뒤쪽으로 먼저 다가갔다. 어디서든 티가 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

그런데 침의는 깨끗하기만 했다. 피가 묻어 나오지 않았다.

‘약 냄새도 나지 않아. 면포를 풀었다고 해도 약을 안 바를 수는 없었을 테니 분명 향이 나야 하는데.’

그런데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약초 특유의 향이 나지 않았다.

언이 병째 들이켜고 있는 술 내음만 규연의 코끝을 간질였다.

‘술도……. 검에 베였으니 지금은 절대 마시면 안 될 터인데.’

규연의 시선이 언이 쥐고 있는 술병으로 향했다.

술은 상처를 덧나게 했다. 그런데도 언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고, 그 행동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아니야. 분명히……. 분명히 전하셨는데. 내가 분명히 느꼈는데.’

확신에 가득 차 걸음을 옮겼건만, 막상 이렇게 언을 마주하고 나니 규연의 마음이 흔들렸다.

작은 생채기도 아니고, 장검에 베여 생긴 자상이었다.

살피고자 하면, 또 찾아내고자 하면,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분명히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지금의 언에게서는 이틀 전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되레 규연의 짐작이 틀렸음을 확인시키는 것만 같았다.

〈마마와 소신이 기억하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단언해 드릴 수 있어요. 그때의 연성 대군 대감은 이제 안 계십니다, 마마.〉

이경이 단호한 목소리로 전했던 몇 마디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제 그때의 언은 찾을 수 없다며, 기대를 버리라고 말하던 슬픔 서린 눈동자도 아른거렸다.

‘정말일까. 정말 내가 잘못 짚은 것일까.’

믿기 힘들었다. 규연을 휘감은 모든 감각에서 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언이 이렇게 멀쩡하다니 이상했다.

“저, 전하!”

생각에 잠겨 굳어 있을 때, 언이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줄을 쥔 규연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고는 꽉 쥐었다.

“아픕니다!”

강한 악력 때문에 전해지는 통증에 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치수를 재려는 겁니까, 아니면 엄한 상상을 하는 겁니까?”

매서운 눈동자가 규연을 마주했다.

규연은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하며 이틀 전의 밤을 떠올렸다. 오로지 규연을 지키기 위해 등을 내주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래서 더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니 자신의 세상에 규연 하나만 존재하는 것처럼 굴던 연성 대군이 떠올랐다.

‘한데 어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언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다시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언이기를 바랐던 열망이 새어 나와 착각을 만들어 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피어올랐다.

“중전이 주는 선물은 필요 없습니다. 조금도 받고 싶지 않으니 이상한 짓 벌이지 말고 이만 돌아가요. 술맛이 뚝뚝 떨어지지 않습니까.”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지치지도 않습니까?”

툭 던져진 물음에 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다 이내 맑은 눈에 짙은 슬픔과 허망함이 번졌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신기하지요.”

규연 자신도 참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자조 어린 말이 둘 사이로 흩어졌다.

허탈해하는 목소리가 닿고 나서야 언의 손에 힘이 풀렸다. 꽉 잡혔던 손목이 자유로워지자 규연이 당의 아래로 손을 감추고 언으로부터 멀어졌다.

“우를 범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전하.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한없이 공허한 목소리로 인사를 전한 규연은 그대로 편전을 빠져나갔다. 언과 눈을 맞추지도, 그가 다시 몸을 돌려 규연을 바라볼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다.

“전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규연이 편전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을 때, 언이 몸을 휘청거렸다.

“당장 약을 바르겠습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쥐고 있던 술병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지고, 통증을 버텨 내지 못해 주저앉은 몸이 가쁜 숨을 골랐다.

사색이 된 상선이 곧바로 약과 면포를 들고 다가와 언의 침의를 벗겼다.

“…….”

새하얀 침의에 피가 묻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그 위에 작은 천을 덧대어 붙여 놨다.

언은 향이 나면 들킬 테니 약도 발라서는 안 되고, 면포를 감으면 어제 검에 베였노라 자랑하는 꼴이니 절대 안 된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러다 상처가 덧나 큰일이 난다고, 통증을 어떻게 참으시려고 그러냐는 상선의 말은 언에게 닿지 않았다.

“……전하.”

피 묻은 천을 빠르게 떼어 내고, 약을 바른 뒤 면포를 두른 상선이 안쓰러움 가득 묻은 목소리로 언을 불렀다.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미 많이…….”

상선은 안타까운 마음에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들키지 않으려면 더한 것도 해야지.”

“…….”

“흔들려 쉬이 들켜 버리면, 그게 더 가엾지 않더냐.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던 나도, 나 때문에 밀려나느라 마음이 넝마가 된 중전도.”

언은 눈을 감으며 부디 규연이 다시 기대를 버리고 얼마 전처럼 그를 향한 마음을 접길 바랐다.

그래야 규연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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