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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24/68)

24화

* * *

규연은 이경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궁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따라붙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안전한 곳에 다다른 뒤로도 빠르게 내달리는 심장은 좀처럼 제 속도를 되찾지 못했고, 규연의 머릿속에는 그녀를 구해준 검은 무복의 사내만 가득했다.

한숨도 자지 못한 채 해를 맞이하고, 입궐이 시작되는 시간이 되자마자 이경을 불러들였다.

“마마, 강녕하신지요? 혹 간밤에…….”

“그 사내에 대해서는 알아보았습니까?”

이경이 들어오자마자 규연의 상태를 살폈지만, 지금 규연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규연은 말을 뚝 끊어 내고 혹시 어제 그녀를 구한 사내에 대해 알아낸 게 있는지 물었다.

“송구하옵게도 찾지 못했습니다. 주위를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흔적이 전혀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혹 그자가 칼을 맞았기에 염려하시는 것이옵니까?”

이경의 물음에 규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객을 홀로 그만큼 베어 냈다면, 어지간한 부상에는 도가 튼 자일 겁니다. 급소를 피하는 법도 알 테고요. 쓰러져 있는 자는 없었으니 무사히 돌아갔을 겁니다.”

이경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규연을 안심시켰다.

그저 평범한 사내 같았다면, 이름 모를 고마운 이였다면, 규연이 이리 마음 졸일 리 없었다.

‘전하셔. 분명 전하셨어.’

하지만 그자는 보통 사내가 아니었다.

분명 언이었다.

규연의 모든 감각이 그 사내는 언이라며 거세게 아우성쳤다.

“별장. 아니, 이경.”

잠시 고민하던 규연은 조심스럽게 이경을 불렀다. 이경은 조금 긴장한 채로 규연을 바라봤다.

규연이 그를 별장이 아닌 이름으로 부를 땐, 언제나 의미심장한 말이 흘러나오곤 했다.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하문하십시오, 마마.”

운을 뗐으나 규연은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헷갈렸다. 이경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고 솔직히 물어도 되는 것일지, 솔직히 물어도 언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일지.

이경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경이 얼마나 진실된 자인지, 그리고 충직한 벗인지는 누구보다도 규연이 잘 알았다.

그러나 궁은, 그리고 권력과 정치는, 강한 믿음에도 숱하게 물음표를 던지게 만들고는 했다.

게다가 언과 이경의 사이가 이전만큼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위장하는 것이었지만, 이를 모르는 규연으로서는 둘의 관계가 이전과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경도 아직 나처럼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까. 아직 등을 돌리지 않았을까?’

두려웠다. 이제 이경의 눈에도 언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려서 이경조차 언을 포기하고 그를 적대시할까 봐 겁이 났다.

만일 이경이 그리 여기고 있다면, 규연이 그 사내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밝히는 건 독이었다.

“마마. 편히 말씀하십시오. 정말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이경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온도가 참 따뜻하다는 어제도 이경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문득 한 가지 물음이 떠올랐다.

‘이경은 어제 어떻게 그곳에 있었지? 그 시간에?’

워낙 깊은 곳에 있는 절이라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곳이었고, 심지어 통행도 금지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이경이 마침 나타나 규연을 지켰다.

‘혹시 이경이 전하의 명령을 받은 거라면? 혹시……. 혹시 전하께서 내가 모르는…….’

이경마저도 언을 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대신 다른 생각이 차올랐다.

어쩌면 언이 이전의 모습을 잃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그래서 이경과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는, 그런 기대 어린 생각이 피어났다.

“그 사내가 전하십니까?”

규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마마, 그 무슨…….”

이경은 질문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단호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사실 이경도 어제 규연을 구했다는 사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누가 움직인 건지 살펴보겠노라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규연의 질문을 듣는 순간, 어제 언이 내렸던 명령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경아.〉

〈예, 전하.〉

〈너는 오늘 눈밭으로 오지 말고 보성사로 가거라. 인경이 친 이후에.〉

‘눈밭’은 요새를 뜻하는 암호였고, 보성사는 규연이 어제 찾아간 그 절이었다.

〈혹 가져올 물건이나 만나야 할 이가 있는지요?〉

〈아니야. 그런 건 없다. 그냥 그 주위에 있거라. 내가 살필 것이 있는데, 그 일을 위해 네가 필요해서. 혹 동이 틀 무렵까지 내가 보이지 않거나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거라.〉

〈예, 전하. 그리하겠습니다.〉

그리도 깊은 밤에 인적 없는 절 주위에 이경이 있던 이유였다.

어제 규연을 보고 너무 놀라 까맣게 잊고 말았는데, 상황을 곱씹어 보니 모든 게 딱딱 들어맞았다.

‘영상이 마마를 노리실 것을 알고 나를 그곳으로 보내셨구나. 설령 어제처럼 전하께서 자객을 막으신다 한들, 마마를 직접 궁으로 모셔다드릴 수는 없으니.’

정해진 대로라면 언은 어제 요새로 향해야 했다. 제법 중요한 대화가 오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래서 이경은 언이 직접 규연을 지키러 나왔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마께서 그 절로 향하시라는 건 어떻게 아셨지? 그전에 마마께서는 또 왜 그곳으로…….’

이유가 무엇인지 곱씹던 이경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어제가 규연의 아버지가 떠나간 날임을 깨달은 탓이었다.

‘전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구나. 마마께서 기일을 챙기러 궁 밖으로 나오고, 영상이 이를 놓칠 리 없다는 걸.’

이경은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당시 호판이었던 규연의 아비를 참 자주 만나고, 귀여움도 많이 받았건만, 정작 몇 번 마주하지도 않았을 언보다도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어제 나를 구한 그 사내가 전하가 맞습니까?”

이경의 침묵이 길어지자 규연이 다시 한번 물었다.

이경은 말없이 규연을 바라봤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공허해지고 있다고 생각한 눈동자에 희망의 불꽃이 피어나는 게 보였다.

“아닙니다, 마마. 전하이실 리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이 뒤따랐지만, 규연의 눈은 여전했다.

“하면 이경은 어제 왜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 늦은 시간에, 산 깊숙이 숨어 있는 작은 절에 어찌 왔냔 말입니다.”

솔직한 답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경은 점점 타오르기 시작하는 눈을 마주하며 잘 지어낸 거짓을 전했다.

“보성사가 어떤 곳인지 압니다. 마마께서 어릴 적, 돌아가신 호판 대감께서 마마를 데리고 종종 찾으셨던 곳이지요.”

“…….”

“어제가 기일이지 않습니까. 저 또한 대감과의 추억이 많습니다. 해서 찾아간 것입니다. 함께한 병사들은 잠시 볼일이 있어 동행한 것이고요.”

기일을 새까맣게 잊은 자가 건네기에는 지독히도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경으로서는 이렇게 꾸며 낼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다행이지요. 덕분에 마마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요.”

어긋나는 곳 없이 들어맞는 말에 규연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불꽃이 조금 사그라들고, 확고했던 태도가 잠시 흔들렸다.

“어찌 전하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우습게도, 조금은 궁금했다. 들키지 않기 위해 언이 무척이나 안간힘을 썼을 텐데, 어떻게 그 어둠 속에서 언을 알아본 건지 알고 싶었다.

“코웃음 치리라는 것을 알지만, 느낌이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느낌이라는 것이 있어요. ‘아, 전하시구나.’ 하는 느낌이요.”

“…….”

“연모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스쳐 가는 향이나 온기도 오래도록 붙잡아 두지요. 해서 못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규연이 말한 이야기는 누구보다도 이경이 잘 알았다. 그래서 듣고 있기 더 괴로웠다.

사랑. 규연이 밝힌 이유는 결국 사랑이었다.

“잘못 느끼셨습니다, 마마. 전하가 아니십니다.”

“어찌 그리 확신합니까? 하면 어젯밤에 전하께서는 어디서 무엇을 하셨답니까?”

언이 요새로 향한 날, 이를 감추기 위한 핑계는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성빈 자가를 찾으셨습니다, 마마. 어제도 주위의 모든 궁인을 물리셨다 했습니다.”

궁인을 물린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알기에 규연의 눈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니 이경의 마음이 또 갈기갈기 찢겼다.

규연이 외명부의 부인들을 부른 날 이후, 그녀가 바라던 대로 궁의 소문이 전부 뒤집혔다. 중전이 더 이상 주상의 총애를 갈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이경은 그 말을 믿었다. 제발 사실이기를 바랐다.

‘여전히 마음을 바라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마.’

그러나 이렇게 마주한 규연은 여전히 언의 마음을 바라고 있었다. 언의 일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규연을 뒤흔들 수 있었다.

“무엇을 기대하시는 것이옵니까, 마마. 전하께서 이전의 모습을 잃지 않으셨노라 믿고 싶으신 것입니까?”

허를 찌른 질문에 규연의 눈동자가 또 한 번 잘게 떨렸다.

“그런 생각은 이제 버리십시오, 마마.”

이경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마와 소신이 기억하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단언해 드릴 수 있어요.”

“…….”

“그때의 연성 대군 대감은 이제 없습니다, 마마.”

맑은 눈에 보이던 불꽃이 사라지고, 짙은 슬픔이 연갈색 눈동자를 가득 적셨다.

이경은 입 안 가득 퍼진 쓴맛을 느끼며 슬픔에 잠긴 규연의 모습을 바라봤다.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사내가 언이 아니라고 잡아떼기만 해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이제 더 이상 연성 대군은 없다’는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언의 가면이 벗겨져서는 안 되니 쐐기를 박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되뇌었지만, 사실 언은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 언의 진실이 드러나서는 안 되기에 한 말인지, 희망이 보이는 언을 향한 규연의 마음이 더 부푸는 게 싫어서 그리한 게 아닌지.

정말 조금도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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