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68)

23화

* * *

〈대군 대감은 참으로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소식은 들으셨지요?〉

호산 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 지 채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영의정이 언의 궁가를 찾았다.

뱀 같은 사내에게서는 일말의 슬픔도, 일말의 죄책감도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직전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기뻐하는 티가 났다.

그를 마주하고 있는 언만 이가 갈려 손이 하얘질 정도로 주먹에 힘을 주었다.

〈왕이 되실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이리 갑자기요. 한데 어찌 그리 여유롭고 평화롭습니까?〉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요. 소신의 마음도 찢어집니다. 선왕 전하로도 모자라 세자 저하께서도 금세 떠나가시고, 이제는 호산 대군 대감께서 이리 변을 당하셨으니까요.〉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아바마마도, 형님들도 그렇게 갑작스레 떠나간 것이? 조정이 조용한 게 말이 되냐는 말입니다.〉

〈모두가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있지요. 하나 원인이 명백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두 분은 아프셨고, 호산 대군 대감 역시 급작스레 낙마하신 탓이 아닙니까.〉

궁이 전부 넘어간지라 영의정을 막을 수 없다던 형제의 말이 언의 귓가에 맴돌았다.

예견된 죽음이 빗겨 가지 않고 그대로 아비와 형제들을 덮쳤다. 분노가 들끓고 화가 차올랐다. 이제 언에게는 어린 남동생 하나만 남은 상황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대감. 그래야 이 종묘사직을 지킬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이제 왕위에 오를 사람은 대감뿐이십니다.〉

치가 떨렸다. 당장 찢어 죽일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갈기갈기 찢고 싶었다.

〈소신은 대감이 예전부터 대감께서 왕이 되실 재목이라 생각했지요. 사람 보는 눈 하나로 이 자리까지 오른 자입니다. 그러니 확신할 수 있습니다.〉

〈…….〉

〈편안히 많은 것들을 누리실 수 있을 겁니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언이 주먹으로 상을 내리쳤다.

〈장난합니까? 아비와 형제들을 연이어 잃은 자에게 찾아와 왕으로서 많은 것들을 누릴 것이라 이야기하다니 이 무슨 금수만도 못한 짓이냐는 말입니다.〉

〈진정하시지요, 대군 대감.〉

〈어디 하나 물어봅시다. 그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뭡니까? 영상의 눈에 어긋나면 나도 죽일 겁니까?〉

치기 어린 언의 말에 영의정이 씩 웃었다.

〈소신은 그 어떤 분의 죽음에도 책임이 없습니다, 대감. 그리 오해하시면 참으로 섭섭합니다.〉

〈…….〉

〈하나 어쩌면……. 그러니까, 이 종묘사직의 대를 잇기 위해 노력하는 소신의 의지를 꺾으려 하신다면 그때는 손을 쓸 수도 있지요. 소신은 이 나라 조선이 가장 우선인 사람이니까요.〉

〈…….〉

〈하하. 그리 보지 마십시오. 소신이 대감을 죽인다느니 하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옵니다. 이것 참 억울해 무어라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모든 음절에서 영의정의 숨겨진 뜻이 드러나고 있건만, 영의정은 시치미를 떼며 언을 상대했다.

〈하나 대감께서 아끼시는 자들에게 찾아가 청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감께서 마음을 잡지 못하시는 것 같으니 조금만 도와달라 말입니다.〉

〈…….〉

〈예를 들면, 소신의 질녀 같은 자에게 찾아가서요.〉

규연의 이야기가 나온 순간, 언의 눈이 요동쳤다.

자신을 진작부터 감시하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다치게 하거나 죽일지 모른다는 대상에 규연이 끼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 질녀도 죽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죽이다니요, 대감. 아까부터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오해십니다.〉

당연했다. 규연은 영의정의 질녀였다. 설마 제 조카를 건드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청을 하러 갈 수는 있다는 게지요. 청을요.〉

영의정이 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 순간, 언은 그가 영의정의 덫에 완전히 걸려 버렸음을 깨달았다.

규연을 볼모로 잡는다면, 모든 것을 잃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마저 영의정의 손에 들어간다면, 언은 그를 거스를 수 없었다.

* * *

〈조선 꼭대기에 오르신 기분이 어떠하신지요, 전하?〉

즉위는 너무나도 빠르게, 그리고 너무나도 허술하게 이뤄졌다.

여러 상(喪)을 치른 뒤 이뤄진 즉위식이었건만, 영상은 슬픈 분위기를 지워 내고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판을 깔았다.

언에게 비난이 쏟아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비와 형제가 연이어 죽어 차지하게 된 자리인데, 왕의 권력에 취해 슬픔도 잊고 그 자리를 만끽하고 있으니 패륜아가 분명하다며 저자에 말을 흘렸다.

영의정은 완벽한 허수아비를 원했고, 언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규연에게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로 궁 안으로 끌려왔다. 서찰 하나 남기지 못했다.

뜻을 전할 수가 없었다. 이리 갑작스레 왕이 되어 규연을 만나러 갈 수도, 항상 꿈꾸던 혼례를 치를 수도, 함께 미래를 그릴 수도 없다는 잔인한 사실을 전할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두려웠다. 만일 언이 영의정 몰래 그녀에게 연락하거나 찾아가면, 언을 쥐고 흔들 약점이라 확신하고 규연에게 해코지를 할까 겁이 났다.

여유 또한 없었다. 익선관을 썼으나 매 순간이 칼 앞이었다. 예리하게 벼려진 칼끝이 틈만 나면 언의 목숨을 노리는 듯했다.

‘나는 버틸 수 있지만, 휼은 아직 안 된다. 만약 내가 이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휼이 이 고초를 겪게 돼.’

만약 언이 어설프게 저항하며 대적하다가 목숨을 잃게 되면, 이다음은 휼이었다. 아직 열넷밖에 되지 않은 휼에게 이 짐을 넘길 수는 없었다.

‘수그려야 한다. 대군 시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저 두렵기만 한 척, 우선은 수그려야 해.’

영의정에 의해 궁에 철저히 고립되었을 때, 언은 이 상황을 기회로 바꾸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능력을 감추어 아무도 몰랐을 뿐, 언은 형제들 중에 가장 명석하고 강한 자였다.

그는 전각에 갇혀 있는 동안 아주 은밀히 그의 벗들과 스승을 움직였다. 믿고 신뢰하는 자들이 아직 영의정에게 넘어가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이 언에게 남은 유일한 행운이었다.

〈이 정도로 다 넘어갔단 말이더냐.〉

〈예, 전하. 소신도 놀랐습니다.〉

그중 하나가 이경이었다. 언은 이경이 수집한 여러 정보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궁이 넘어간 것은 물론이고, 곳곳에 폐단이 심각했다. 언이 북촌에 머물며 얼핏 보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곳곳에서 썩은 내가 진동했다. 조정에는 간신배만 가득했고, 전국 각지에 있는 관리 중 8할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였다. 온 나라가 엉망이었고, 그 뒤에는 영의정이 있었다.

탐욕스러운 사람 하나가 나라를 이토록 망가뜨려 놓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전하. 최대한 사람을 모아 봤습니다. 목숨을 걸 만큼 의지가 강한 자들로요.〉

〈고맙습니다, 스승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도대체 어디부터 건드려야 하는지 엄두조차 나지 않을 때, 우선은 제 사람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은 스승을 통해 사람을 모았다. 그의 스승이 바로 서혜의 아비인 대제학이었다.

〈지금 뭐라 했느냐?〉

〈의금부에서 대제학 대감을 추포했다고 합니다.〉

〈내가 윤허한 적이 없는데 어찌 의금부가 움직인다는 말이냐!〉

꼬리가 길었다. 영의정은 냄새를 맡았고, 이를 알아챈 대제학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감추면서 목숨을 잃었다. 언이 온 산을 뒤져 서혜를 거둔 이유기도 했다.

대제학을 잃은 뒤, 언은 내리 닷새를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잠들 만하면 고문을 받다 죽은 스승이 생각나고, 먼저 떠나간 부모와 형제가 떠올랐다. 가까스로 생각을 지우고 다시 잠을 청하려 하면 그때는 규연이 떠올랐다.

규연과의 미래를 그리며 행복해하던 그 시절이 그립고, 매일 품에 안고 싶었던 사랑스러운 여인이 아른거려 가슴이 찢겼다.

〈전하, 며칠째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셨다 들었습니다. 어의가 올린 귀비탕도 듣지 않고 있다고요.〉

〈…….〉

〈한번 피워 보십시오. 자주 들이마시는 건 위험하지만, 정말 필요할 때 한두 번 손대는 것은 괜찮습니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영의정이 양귀비를 가져왔다.

정신을 파괴할 게 분명한 향을 가져와 씩 웃는 영의정을 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환멸이 언을 덮쳤다.

그리고 동시에, 언이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혔다.

영의정을 피한답시고 숨죽여 사람을 모으려고만 하면 아무것도 이뤄 낼 수 없었다. 대제학을 잃었듯, 언의 소중한 이들만 더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가 그리고자 하는 그림을 뒤엎었다. 갈기갈기 찢은 뒤, 새 화선지 위로 완전히 달라진 그림을 그렸다.

〈이경아.〉

〈예, 전하.〉

〈그림을 바꿔 보려 한다.〉

까만 구름이 달을 꼭꼭 감추어 버린 밤, 언은 이경을 불러 새로 그린 그림을 보여 줬다.

〈조용히 사람을 모으고, 힘을 기르려 하는 건 소용없어. 영상의 마수가 뻗쳐 있는 범위가 너무 넓어 아무것도 뒤엎지 못할 게다.〉

〈하나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 아니옵니까.〉

〈아니야. 그게 최선이 아니다.〉

며칠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죽은 형제는 포기하지 말고 조선을 지켜야 한다 말했고, 언 역시 그의 백성들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조선은 썩을 대로 썩어 버렸으며 사방이 폐단이고 적폐였다.

전부 갈아엎어야 했다. 부분을 건드려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썩은 부분을 전부 도려내고, 또 전부 잘라 내야 했다.

모든 환부를 도려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개혁할 수 없었다.

〈내가 환부가 되려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영상은 내 힘이 커지지 않도록 막고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어코 나를 폭군으로 꾸며 낼 게다.〉

〈하나 그것은…….〉

〈그걸 이용하면 되겠더구나. 내가 진실로 폭군이 되고, 내가 곧 폐단이 되는 것으로.〉

〈전하, 설마…….〉

〈모든 폐단을 끌어내 나에게 묻힐 게다.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이 연결될 수 있게.〉

하나하나 도려내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영의정이 그대로 두고 볼 리도 없었으니 더욱 힘들었다.

〈내가 피고름이 될 게다. 나를 도려내면 그 모든 폐단이 함께 도려질 수 있게.〉

〈전하!〉

그래서 언은 스스로 환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영의정이 그토록 바라는 대로 폭군이 되어서, 수많은 부정이 언 하나로 이어지게 만들어서, 폐단과 함께 도려지고자 했다.

〈되어야겠다. 이 나라 역사에 길이 남는 폭군이.〉

지옥에 서 있던 언은 그날로 불지옥에 뛰어들었다.

양귀비에 손을 대며 취한 척 연기하고, 정사에는 아무 관심도 갖지 않는 척 주색만 탐닉하고, 거짓 광증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폭군의 가면을 쓴 채 살다 밤이 찾아오면, 가면을 벗고 온전한 언이 되어 요새로 향했다.

그곳에서 영의정의 비리를 모으고, 탐관오리를 내칠 수 있는 여러 정보를 모으고, 부정하게 돈을 취한 자의 곳간을 털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면서 긴 시간 공들인 이 거사가 완성될 날을 차분히 기다렸다.

〈전하. 아니되십니다. 그 말씀은 곧…….〉

〈그래. 죽을 게다.〉

언이 어떻게 해서든 규연을 왕비로 들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이유이자, 지금껏 그녀를 밀어내는 이유였다.

언은 조선을 위해 죽고자 했다. 그래서 규연을 안을 수 없었다.

온 세상을 속여야 했으니 규연에게도 폭군이어야 했고, 그녀가 언이 없는 세상에서도 그리움 없이 살아가길 바라 자신을 미워하기를 바랐다.

언은 규연을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규연의 ‘연성 대군’이 아닌 적 없었다. 그저 두꺼운 가면을 썼을 뿐이었다.

언제나, 규연의 언이었다.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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