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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68)

22화

언의 향이었고, 언의 온기였다.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치는 규연의 심장이 그 증거였다.

“전…….”

“마마!”

떨리는 목소리로 언을 부르려 할 때,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이었다.

“마마!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이경이 나타나자 규연의 눈을 가렸던 사내는 곧바로 규연에게서 멀어져 나무 틈으로 사라졌다.

규연이 소리 내 부를 틈도 없었다. 사내는 검에 베인 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게 산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마마. 소신을 보십시오. 다치신 곳은요?”

“나는……. 나는 괜찮습니다.”

이경은 사색이 되어 규연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빠르게 규연을 살핀 뒤, 그녀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자객의 시체를 둘러보았다.

“이게 대체…….”

어떤 상황인지 빤히 보이는 광경에 이경이 경악스러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찾아야 합니다.”

“예?”

“나를 구한 사내가 검에 베였어요. 보진 못했지만 아마 등을 베인 것 같습니다. 위험할 거예요. 당장 찾아야 합니다. 저기, 저쪽으로 갔어요. 무조건…….”

“마마가 우선입니다. 지금 그 사내를 챙기실 때가 아니에요. 마마께서 목숨을 잃을 뻔하신 상태란 말입니다.”

“그 사내를 구해야 한다니까요! 검에 베였다고요! 나를 지키려다가 그리되었단 말입니다!”

언이었다. 분명 언이었다. 그런 언이 베였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자객을 이만큼 상대했다면 이미 검에 능한 자입니다. 그자를 걱정하실 때가 아니에요. 마마께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누군가 지금도 마마를 노리고 있을 수 있어요. 소신이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소신을 믿으십시오, 마마. 지금은 마마가 우선이십니다. 제가 데려온 병사들이 몇 있으니 그자들에게 찾으라 일러두겠습니다.”

이경은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검에 능한 자라는 그의 말에 너무도 수려하게 움직이던 언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걱정이 줄어든 건 아니었지만, 언이 베여 가면서까지 구한 목숨이라 생각하니 이곳에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경의 말마따나 영의정이 지금도 규연을 노리고 있을지 몰랐다. 최대한 빠르게 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갑시다.”

“예, 마마. 바로 모시겠습니다.”

규연은 이경의 부축을 받으며 산길을 벗어났다.

* * *

“윽…….”

“조금만 버티십시오, 전하. 거의 다 왔습니다.”

언을 둘러메듯 부축한 흑이 최대한 조심하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요새가 코앞이었다.

“전하!”

“전하! 아니 이게 무슨!”

흑이 요새 안으로 들어가자 그 안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모두 사색이 되어 언에게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전하께서 어찌!”

“마마를 지키시려다가 검에 베이셨습니다.”

“마마께 가셨다니. 마마께서 궐 밖에 계셨단 말이냐?”

“말씀드리려면 내용이 깁니다.”

“하……. 그래 우선은 전하를 치료하는 게 먼저다.”

흑이 언을 눕히고, 요새에 상주하는 의원 하나가 곧바로 다가와 언의 옷을 벗겼다.

까만 무복이 사라지니 등의 긴 자상이 드러났다. 탄탄한 근육 위로 수많은 흉터가 있었는데, 지워지지 않은 상처 위로 생겨난 새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다.

“전하. 정신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의원은 곧바로 약을 바르고 면포로 몸을 감았다. 약이 스며들 때마다 찾아오는 극심한 통증에 언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말해 보거라. 마마께서 왜 이 시간에 궐 밖에 계셨던 게고, 전하께서는 또 왜 그곳에 찾아가신 건지.”

제일 처음 흑과 언을 맞이했던 윤성이 심각한 얼굴로 흑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는 언이 아끼는 무관 윤식의 형이자 요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선비였다.

“마마께서 아버지의 기일마다 찾으시는 절이 있습니다. 매해 잠행을 나가셨는데, 전하께서 올해는 영상이 손을 쓸지도 모른다면서 따라가셨습니다.”

흑이 차분하게 전말을 설명하니 윤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은 규연의 일이라면 항상 이성이 마비됐다. 언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윤성이 보기에는 분명 그랬다.

“급한 치료는 끝났습니다, 전하. 하나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크게 움직이셔도 안 되고요.”

의원이 치료를 마치자 윤성이 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의원에게 짧게 고마움을 전한 언이 여전히 일그러져 있는 얼굴로 윤성을 바라봤다.

“잔소리를 하려는 게냐.”

“하지 않게 생겼사옵니까.”

윤성의 한마디에 언이 피식 웃었다.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검에 베이셨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뻔하신 일입니다, 전하.”

“이리 살아 돌아오지 않았느냐. 그거면 되었지.”

“앞으로도 이리하실 것이옵니까? 마마의 일이라면 이렇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달려가시어 검에 베여 돌아오실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답답해 미치겠다는 마음이 여실히 전해지는 말이었다. 언은 말없이 잠시 시선을 내렸다.

“잊을 여인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해서 그리 열심히 밀어내고 계시고요. 한데 어찌 그리 마음을 접지 못하시는 겝니까. 가장 중요한 건 전하시지 중전마마가 아니십니다.”

언은 윤성의 마음을 잘 알았다. 게다가 그의 말이 전부 옳았다.

죽어라 밀어내며 상처를 주고 있고, 절대 언의 여인이 되어서는 안 되니 그부터가 규연을 잊어야만 한다고 몇 번이고 되뇌면서도, 좀처럼 마음이 거두어지지 않았다.

“잊을 여인이다. 그 여인도 나를 잊게 만들 테고.”

“…….”

“하나 살려야 한다, 윤성아. 그 가여운 여인은 반드시 살아야 해.”

언의 눈에 비친 간절함에 윤성이 입을 꾹 닫았다. 해야 할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저 눈을 보고 나면 그저 조용히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잔인한 길을 걷고 있는 사내에게서 규연마저 사라지고 나면, 안 그래도 불지옥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그가 어떻게 무너질지 훤히 보였다.

“중전의 일이 우리의 거사에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게다. 장담하마.”

“…….”

“이리 긴 시간, 이리 간절히 준비해 왔는데 이 일을 어찌 망치게 두겠느냐.”

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방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궁의 북쪽에 이어진 산 깊숙이 숨어 있는 요새의 꼭대기, 가장 닿기 힘든 곳에 있는 이 방에는 그간 언과 그의 사람들이 모아 둔 수많은 정보와 증거가 쌓여 있었다.

〈형님!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제 혼례와 관련해 아바마마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 형님께 도움을 청하려 했습니다.〉

방을 둘러보던 언은 4년 전, 운명의 소용돌이가 그를 처음 덮쳤던 순간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규연과의 혼례를 성사하려는 생각만 가득 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였다.

〈꼭 혼례를 치르고 싶은…….〉

〈언아.〉

〈예, 형님. 혹시 무슨 일이 있습니까? 낯빛이 어찌 그리 어두우십니까?〉

〈아바마마께서 오늘을 넘기지 못하실 것이라 한다. 어의가 확언했다는구나.〉

〈그게 무슨…….〉

〈한데 형님 역시 안위가 위태로우시다.〉

〈저하께서요? 저하께서 위태로우실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누군가 목숨을 노리는 것이라면 당장…….〉

〈모든 배후에 영상이 있어. 영상이 아바마마께 독을 썼고, 저하의 목숨 또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갑자기 찾아온 둘째 형님은 믿기 힘든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당시에도 영의정의 세력이 상당했지만, 지금처럼 강하지는 않았다. 주상에게 독을 먹이고, 세자의 목숨을 노리는 엄청난 짓을 감행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그리 여겼다.

그게 실수였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하면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이렇게 우리끼리 말을 할 게 아니라요.〉

〈막을 길이 없다. 영상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깊숙한 곳까지 궁을 먹어 치웠어. 영상의 사람이 아닌 자가 손에 꼽을 정도야.〉

〈그게 무슨…….〉

〈아바마마께 독을 드시게 한 것이 분명한데, 이를 증언해 줄 자가 하나 없다. 상선조차 넘어갔어.〉

세자도, 다른 형제들도 알아채지 못했으나 궁은 이미 영의정에게 먹힌 뒤였다.

〈나도 곧 죽을 게다.〉

〈형님 그 무슨!〉

〈영상이 왕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는 너야. 평생을 숨죽여 살아오지 않았더냐. 네 명석함도 감추고, 그저 조용히만 살았지. 영상은 그런 왕을 원한다. 저하나 나처럼 강성인 자들을 죽이고, 너를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려 해. 휼이는 아직 너무 어려 뻔한 수가 보이니까.〉

언은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한 얼굴로 형제를 바라봤다. 왕이라니. 멀리하기 위해 평생을 애쓴 자리에 가까워진다는 소리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막을 수 있는 방도가 있을 겁니다. 말이 안 됩니다. 저하와 형님 모두를……. 그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 주십시오.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무조건 막아야지요!〉

〈최대한 수를 쓰겠지만 쉽지 않아. 우리가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언아.〉

형제는 후회가 가득한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그날이 오면, 정말 영상이 우리를 죽이고 너를 왕으로 만들면.〉

〈…….〉

〈휘둘려서는 안 된다, 언아.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 내야 해. 그래야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 간신배에게 종묘사직이 먹히는 일은 없게 해야 해. 알겠느냐?〉

그때의 언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당황스러웠고, 그만큼 이루어질 리 없다고 생각했고,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하늘은 언에게 그리 자비롭지 못했다.

오늘을 넘길 수 없으리라는 어의의 말은 정확했다. 아비는 독을 이겨 내지 못하고 앓다 죽었고, 세자는 이레 뒤에 목숨을 잃었다.

대비의 지휘 아래 급히 둘째 대군이 궁으로 들어가 빈자리를 채웠지만, 그 또한 찰나였다.

〈……방금 무어라 했느냐.〉

〈호산 대군께서 승하하셨습니다, 대감.〉

언에게 찾아와 경고했던 호산 대군까지 궁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소식을 들은 순간, 온몸이 차갑게 식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세상은 언이 바라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영상이 바라는 대로만 돌아갔을 뿐.

그게 시작이었다.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운명의 소용돌이에 갇힌 언이 불지옥을 걷게 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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