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 *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말 안 해도 잘 알겠지만.”
쓰개치마를 뒤집어쓴 규연이 정 상궁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이날이 오면, 규연은 깊은 밤에 몰래 궐 담을 넘었다.
궁의 여인이 되고 나면 함부로 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왕의 허락이 필요했고, 대신들의 동의가 필요했고, 정치적으로 아무런 탈도 없어야 했다.
안 그래도 쉬이 나갈 수 없는데, 규연의 경우 영의정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려 들었으니 더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잠행이었다. 규연은 하늘이 두 쪽 나는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의 기일에 불공을 드리고 싶었고, 이 뜻 하나만은 죽어도 굽히기 싫었다.
“왜 그리 표정이 어두워?”
몇 해째 이어지고 있는 일이건만, 오늘따라 정 상궁의 표정이 유독 어두웠다.
나갈 채비를 마친 규연은 무슨 일이냐며 그 연유를 물었다.
“호위라도 하나 더 붙이심이 어떠신지요?”
“함께 나가는 사람이 많을수록 눈에 띌 위험이 더 크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예, 물론 압니다, 마마. 한데…….”
무척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 규연이 몰래 담을 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 후폭풍이 클 터였다.
그러니 호위 하나만 데려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정 상궁이 이를 무척 불안해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일이라도 있는 게야? 자네답지 않게 왜 그러는가.”
“꿈자리가 너무 뒤숭숭합니다, 마마.”
규연이 조금 놀란 눈으로 정 상궁을 쳐다봤다.
“우습게 들린다는 것 압니다, 마마. 하나 유달리 느낌이 좋지 않아서……. 꾸고 일어났을 때부터 영 불안했는데, 마마께서 이리 나가셔야 하니 자꾸만 마음에 걸립니다.”
늘 불공을 드리러 가는 절에 규연이 등을 보이고 서 있었는데, 정 상궁이 소리 내 부르니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그런데 정 상궁을 보는 규연의 얼굴에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정 상궁이 곧바로 규연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답답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순간, 규연의 심장에 화살이 박혔다.
끔찍한 꿈이었다. 정 상궁의 눈앞에서 규연이 죽어 갔다. 본래 꿈에서 목숨을 잃으면 길몽이라 하지만, 이번 꿈만큼은 아니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깨어난 게 그 증거였다. 눈을 뜨고도 한참이나 가슴이 쿵쾅거렸다.
“별일 아닐 거야. 자네도 요 근래 일이 많아 피로해서 그런 꿈을 꿨을 테지.”
“마마…….”
“무사히 잘 다녀올 테니 너무 걱정 말게. 꼭 나가야만 하는 날이지 않은가.”
규연은 정 상궁의 두 손을 꽉 잡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전해지는 온기에도 정 상궁의 불안함은 가라앉지 않았다. 너무나도 불안했다. 너무나도.
* * *
“매해 이리 정성 들여 불공을 드리시니 분명 극락으로 가셨을 겁니다.”
“그리되었으면 소원이 없습니다.”
매해 마주하고 있는 스님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규연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규연을 반가의 흔한 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들어가 보시는지요?”
“예. 오래 머물 여유는 없습니다.”
“부디 돌아가시는 길이 평안하시길 빕니다.”
“고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탑 주위를 더 돌며 기도하고, 절이라도 몇 번씩 더 올리고 싶었지만, 그만큼의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규연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돌렸다. 기일에 절을 찾을 때마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짙어져 마음이 먹먹해졌다.
떠나보낸 지가 어언 5년이었다. 그런데도 기일에 절을 찾을 때마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짙어졌고, 요즘은 되레 더 보고 싶어 마음이 먹먹했다.
〈시집이요? 가기 싫습니다.〉
〈가지 않으면 어떡해. 너도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냥 아버지랑 평생 살래요. 그것이면 다 됩니다.〉
〈내가 안 된다. 사랑해 줄 줄 아는 사내와 만나 너처럼 예쁜 아이도 낳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이 아비가 마음이 놓이지 않겠어?〉
사랑해 주는 사내를 만나라던 아버지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하늘에서 속이 터지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불효녀가 따로 없지요.’
입 안 가득 번지는 쓴맛을 느끼며 규연이 천천히 절 밖으로 향했다. 호위 하나가 곁을 지켰다.
“마마. 잠시 멈추시지요.”
그런데 산길을 내려가던 중, 갑자기 무사가 그의 뒤로 규연을 숨겼다.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규연이 조금 당황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무슨 일인가?”
“누군가 따라붙은 것 같습니다.”
규연의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깊은 산에 있는 작은 절이었다. 본래도 사람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인데, 이리 깊은 밤에는 더욱 찾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이 시간에 따라붙었다면, 누구를 노리는지는 명백했다.
“뛰십시오, 마마!”
주위를 살피던 무사가 규연의 팔을 잡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둘이 달리기 시작하자 숨어 있던 자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규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를 살폈다. 새까만 무복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이 넷이나 있었다.
“꺄악!”
그런데 둘이 더 나타나 규연과 무사의 앞을 막았다. 무사가 빠르게 하나를 베어 넘겼지만, 그래도 다섯이 남았다.
“마마. 소인이 시간을 끌겠습니다. 무조건 앞으로 달리시어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절대 이 산에 갇히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아, 알겠네.”
무사는 시간을 끌겠다며 자객들에게 달려들었고, 규연은 그의 말대로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자객 하나가 곧바로 규연에게 따라붙으려 했지만, 무사가 이를 막았다. 이 모습을 확인한 규연은 그녀가 달릴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음박질쳤다.
무사가 자객 다섯을 다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의 말대로 조금이나마 시간을 버는 게 전부였다.
빨리 달아내지 않으면 금세 따라잡힐 터였다.
“하아,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부푼 것 같았다. 다리에도 점점 힘이 풀리는 게 느껴지는데, 좀처럼 산길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제발……. 꺅!”
간절함을 담아 달리고 있을 때, 규연이 돌부리에 걸려 그대로 넘어졌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규연을 따라잡고 있던 자객들이 금세 규연을 빙 둘러쌌다.
“누가 보낸 자객이냐. 어서 말하거라.”
네 개의 검이 규연에게로 향했다. 규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들을 노려봤다.
물음에 아무런 답이 따라오지 않았지만, 규연은 그 배후에 누가 있을지 빤히 알았다.
‘숙부.’
영의정뿐이었다. 이렇게 규연의 뒤를 캐고, 어디를 갈지 예상해 자객을 심어 둘 사람은 영의정밖에 없었다.
‘중전의 자리를 지키겠노라 한 게 그리도 거슬리셨습니까.’
규연이 감추고 있던 날을 드러냈으니 영의정도 이전보다 더 견제하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목숨을 노리는 단계로 넘어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수를 써야 해.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규연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이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잃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규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이렇게 비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빌기라도 해야 했다. 규연은 어떻게 해서든 목숨이 붙은 채로 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죽어라!”
도와줄 이가 없는 상황에서 자객 하나가 기어코 검을 들었다. 누가 봐도 규연을 베려는 움직임에 본능적으로 눈이 질끈 감겼다.
“흐억!”
그런데 그 순간, 자객의 비명이 들렸다.
떨고 있던 규연은 곧바로 눈을 뜨고 무슨 상황인지 살폈다.
자객처럼 똑같이 검은 무복을 입고, 검은 복면을 쓴 사내 하나가 규연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자객 하나를 베었다.
“누구냐!”
다른 자객이 살짝 뒤로 물러서며 정체를 밝히라 말했지만, 사내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기합 한 번 넣지 않고 조용히 검을 휘둘렀다.
자객 역시 보통 무공을 가진 사내가 아닌 것이 보이건만, 갑자기 나타나 규연을 구한 사내는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그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수려한 동작으로 자객을 상대했다.
하나가 그의 검에 고꾸라지고, 곧이어 몇 번 검이 부딪치더니 다른 둘도 바닥에 쓰러졌다.
규연은 넋을 놓고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규연을 뒤에 두고 지키면서 자객을 베어 넘기는 모습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으헉!”
기어코 마지막 자객까지 베어 내자 정체 모를 사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곳에 나타나 규연을 구했는지, 누가 보낸 것인지, 물어야 할 것도 많았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좀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규연이 어떤 상태인지 돌아볼 법도 하건만, 그저 숨을 고르기만 할 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으아악!”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득해 하고 있을 때, 다 쓰러진 줄 알았던 자객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규연의 뒤쪽에 쓰러져 있던 자였다. 그의 검이 규연을 노리고 있었다.
규연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위치상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정체 모를 사내가 규연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분명 검이 닿으리라 생각했는데, 규연에게 닿은 건 검이 아니었다.
“윽.”
칼에 베이며 터져 나온 사내의 낮은 신음이 귓가에 닿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눈가에 닿았다.
규연이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맞이한 건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사내가 누구인지 볼 수 없었다.
사내는 규연의 눈을 가린 채 그녀를 끌어안고 대신 검에 베였다. 그러고는 규연을 안은 채로 몸을 돌려 자유로운 팔로 자객을 다시 베는 듯했다.
“으헉!”
“하…….”
자객의 비명이 들리고, 동시에 사내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규연은 멍하니 사내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갑자기 들이닥친 자객도, 그래서 벌어진 이 상황도, 규연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하지만 그녀를 가장 아득하게 만든 건, 품에서 전해지는 익숙한 향과 느낌이었다.
‘……전하?’
언이었다. 이 사내는 분명, 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