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 *
“이리 모인 것은 참 오랜만인 듯한데.”
“예, 마마.”
“미안하게 되었네. 궁에 일이 많아 이제야 불러 차를 나누게 되는군.”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마마. 이처럼 불러 살펴 주시는 것만으로도 은혜이옵니다.”
본래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정부인 하나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규연은 고맙다는 듯이 살짝 웃어 보이고는 큰 정자 위에 둘러앉은 부인들을 둘러보았다.
외명부의 여인들을 살피기 위해 궁으로 부인들을 불러 다과를 나눌 때가 종종 있었는데, 오늘이 그날이었다.
종삼품의 숙인까지 부른 터라 꽤 많은 부인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마마. 소첩이 이리 늦어 폐를 끼쳤나이다.”
규연이 막 찻잔을 들어 올리려 할 때, 서혜가 뒤늦게 나타났다. 본래 중전이 외명부의 부인을 불러들일 때는 후궁이 자리하는 법이 없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규연이 서혜를 자리로 불렀다.
“아침에 전하의 용체가 편치 않아 이를 살피느라 이리되었사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유념하겠나이다.”
서혜는 늦은 이유를 밝히는 척, 그녀가 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여러 부인 앞에서 이야기했다.
안 그래도 궁의 힘이 서혜에게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는 부인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서혜를 바라봤다.
“전하의 상태는?”
“나아지셨습니다, 마마.”
“하면 되었네. 앉게나.”
그러나 규연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서혜를 앉혔다.
속이 쓰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로지 규연 자신만을 위해 움직이겠노라 말했다 한들, 여전히 언을 향한 마음이 살아 숨 쉬어 그녀를 괴롭게 했다.
그러나 언의 모든 행동과 서혜의 모든 말에 휘둘리기에는, 지금 규연의 뜻이 너무도 확고했다.
“여식이 곧 시집을 간다 했던가?”
“예, 마마. 이리 기억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서혜가 앉자마자 규연과 다른 부인들의 이야기가 오갔다.
외명부 인사를 전부 꿰고 있는 규연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고, 부인들 역시 공손히 대답하며 규연에게 뜻을 맞췄다.
부인들을 잘 모르는 서혜만 홀로 입을 다문 채 계속 앉아 있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그간 외명부를 챙기지 못했어. 다음에는 보다 큰 자리를 마련해 더 편히 이야기하고 궁 밖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네. 한데, 성빈은 어찌 그리 한마디도 하지 않는가?”
규연의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서혜에게로 향했다.
“외명부의 인사를 몰라서 말을 못 한다기엔 내가 이미 자네에게 숙지해 두라며 일러 준 것들이 많을 터인데.”
서혜가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지만, 규연은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 병풍처럼 앉아 있기만 하면 어찌하는가. 나는 자네의 공을 높이 치하해 그대를 외명부의 일에도 보이고 있는 것인데, 이리 굴면 내 면이 서겠는가?”
“마마, 소첩은…….”
“잘 알아 두어야지. 전하를 모시는 것만 후궁이 할 일이 아니네. 혹여 내가 몸이 아파 한때 일을 보지 못하게 되거나 사가에라도 잠시 다녀와야 할 일이 생기면 그때 내외명부를 이끌어야 하는 건 자네야. 내 바로 밑이 자네 아닌가? 한데 이리 아는 것이 없으면 어찌한단 말이지?”
규연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서혜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둘을 지켜보는 부인들 역시 바짝 긴장한 상태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규연은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살짝 살폈다.
오늘 규연이 외명부와의 자리를 만들고, 굳이 서혜를 앉힌 이유였다.
외명부의 부인들이 보고 들은 장면은 그대로 낭군인 대신들에게 흘러들어 갔다. 여인의 입을 타고 들어간 여러 말은 궐에 도는 수많은 소문을 뒤바꿀 수도, 조정의 분위기를 다르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규연은 이 자리에서 보여 주고자 했다.
지금 규연의 위치가 어디인지, 그리고 그녀가 앞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지.
“그러고 보니 소식이 들리지 않는데. 아직 용종을 품지 않았는가?”
규연이 아이의 이야기를 꺼내자 정자에 있는 모든 이가 눈을 크게 떴다. 지난 몇 해간 규연 앞에서는 누구도 용종이니 아이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다들 피하던 이야기를 규연이 직접 화두로 던졌다.
“……아직이옵니다, 마마.”
“서둘러야 할 걸세.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궁으로 들어온 후로도 지금까지 전하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가 없지 않은가.”
서혜와 부인들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규연이 서혜의 아이를 논하는 것부터가 규연에게는 독이었다. 총애받는 후궁이 용종을 품는 순간, 힘은 그곳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건강하고 튼튼한 아이를 낳아야 종묘사직의 대가 이어지지 않겠는가? 그 아이는 중전인 내 자식으로 클 테니 말이야.”
부인 하나가 너무 놀라 딸꾹질을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정도로 엄청난 말이었다.
“이런. 아직 영상 대감에게 전해 들은 게 없는가? 이 근래 자네를 자주 찾으셨으니 분명 전하셨으리라 생각했는데.”
“…….”
“가서 여쭙게. 알려 주실 터이니.”
규연은 싱긋 웃고는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영의정이 찾아와 건네는 말이라고는 곧 너를 갈아치울지 모른다는 경고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규연은 그로부터 정말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확신에 차 행동했다.
‘돌을 던지면 반드시 물결이 일지. 그게 설령 거짓으로 점철된 돌덩이라고 해도.’
규연이 부인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 이상 여러 대신의 귀로 아이에 대한 말이 흘러들어 갈 터였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영의정이 노발대발 화를 낸다 해도, 한번 귀로 들어간 이야기는 쉬이 잊히지 않는 법이었다.
균열이 일 수밖에 없었다. 영의정과 서혜 사이의 믿음에 생기는 균열이든,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고 있을 다른 대신들의 믿음에 생기는 균열이든, 어딘가는 금이 가게 되어 있었다.
“하루하루 시간을 보낼수록 느끼는 것인데, 이 자리가 참 바쁜 자리라는 생각이 들어. 살필 곳이 많지 않은가.”
“…….”
“한데 달리 수가 있나. 내가 중전이니 그저 성실히 매달리는 수밖에.”
영의정이 규연의 뒤에서 떠난 것도 아니고, 규연이 언에게만 매달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서혜가 규연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인상을 퍼뜨리는 말이었다.
오늘의 자리는 규연이 세간의 말을 뒤엎는 자리였고, 동시에 일종의 선언을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중전이 힘을 잃고 있지도 않고, 설령 성빈이 용종을 품는다 한들 달라지는 없을 것이며, 이 자리의 주인이 바뀌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힘주어 말하는 선언.
* * *
“참 빠르십니다. 그새 들으셨나 보네요.”
규연이 부용지에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영의정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부인들을 돌려보내고 한 시진이 겨우 지난 시간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빠르게 달려온 티가 났다.
“재밌는 말씀을 하셨더군요, 마마.”
영의정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었지만, 그 눈매는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규연이 던진 돌이 영의정의 호수에 꽤 큰 물결을 만들어 낸 듯했다.
“숙부님께도 그리 손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규연은 연못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여유롭게 말했다.
“혹여나 성빈이 총애를 누리며 방자해질까 봐 경계하고 계심을 압니다. 해서 저를 이용해 성빈을 견제할 계획을 이미 세워 두셨을 것도 알고요.”
“…….”
“그 일을 제가 먼저 해 드린 것인데 문제가 될 게 있는지요?”
규연이 천천히 몸을 돌려 영의정을 마주했다. 그의 턱에 바짝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규연에게 한 방 먹었다는 사실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숙부님께서도 아직 줄을 타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인지 성빈인지요.”
“…….”
“하니 숙부님께는 전혀 손해가 아니지요. 그저 재밌게 지켜보시면 될 일인데.”
규연은 일부러 더 해맑게 웃으며 영의정을 바라봤다.
“소신이 제법 마마를 잘 알고 있노라 자부했는데, 참으로 오만했습니다.”
“안타깝네요. 하나 지금이라도 아셨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미약하게나마 미소의 형태를 띠고 있던 영의정의 입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항상 쓰고 다니는 여유로움의 가면이 사라지고, 그 너머에 있는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왜 갑자기 그리 욕심이 생기셨습니까? 전하의 사랑이 고프실 뿐, 중전이라는 자리에는 욕심이 없으신 줄 알았더니.”
언의 사랑이 고팠다는 말이 규연의 귓가에 박혔다. 그러나 찰나였다. 규연은 그저 평온한 얼굴로 영의정을 마주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에 매달리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
“이런저런 말을 들으며 잠시 고민해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들 이리 나를 가여워하고 약하게 보는지요.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규연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전하의 사랑에 매달리느라 가여워 보이는 것이라고요. 매달리지만 않으면 가여울 것 없는 중전이더군요.”
슬프지만 사실이었다. 그간 오로지 언만 보며 매달리느라 알아채지 못했을 뿐, 언을 놓기만 하면 이 정도로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될 일은 없었다.
“해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사랑을 바라는 중전이 아니라 이 자리를 지키는 중전이 되기로.”
언을 향한 마음을 하루아침에 접을 수 없다는 것도, 또 언을 보면 마음이 찢기리라는 것도, 전부 알았다.
오로지 규연만을 위해 이 자리를 지키겠노라 마음먹었지만, 사실 온전히 언만을 생각하는 자가 궁에 필요하니 더욱이 물러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쉬이 벗어날 수 없는 마음의 굴레였다.
‘그래도 이리 버티다 보면 나아지겠지. 내 기대를 내려놓고, 내 욕심을 버리고 나면.’
규연은 당의 아래 겹치고 있는 두 손을 더 꽉 잡으며 영의정에게 한 번 더 이야기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지막이 무엇이든, 저는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요.”
참지 않고 대적하리라는, 강력한 선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