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송구합니다, 마마. 소신이 요 근래 공사다망하여 찾아올 길이 없었습니다.”
영의정은 여유롭게 웃으며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규연은 헛웃음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게 무던히도 애썼다. 영의정이 요즘 틈만 나면 성빈의 처소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제는 주상뿐만 아니라 영의정도 중전을 버리려는 모양이라는 소문이 궁에 가득했다.
말을 옮기는 자를 전부 잡아들여야 한다며 정 상궁이 노발대발할 정도로 궐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
“용종을 품지 못하셨다 들었습니다.”
영의정은 쓸데없는 말을 전부 치워 내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규연은 눈앞의 숙부를 빤히 바라봤다. 달거리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용종이 찾아오지 않았음을 알아낸 게 분명했다. 어의를 통해 규연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출 마음이 없어 보였다. 어찌나 이렇게 뻔뻔한지 경이로울 정도였다.
“소신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용종을 품지 못하면 힘들어지실 것이라고요.”
“…….”
“그리 약을 쓰고, 공을 들였는데도 이리되었으니 참으로 야속합니다.”
가면을 벗었을 때 보이는 뱀 같은 눈이 규연에게로 향했다.
규연은 소름 끼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 냈다.
“요즘도 간간이 상소가 올라옵니다, 마마. 종묘사직의 대가 위험한 상황인데, 중전은 무얼 하냐는 상소 말입니다. 왕후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중전이 말이 되냐, 뭐 이런 것들도.”
엄연한 압박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영의정의 손에서 규연을 내치겠다는 뜻이었다.
“하나 마마께서는 제 소중한 형님의 따님이시지요. 누가 뭐래도 저의 소중한 질녀시고.”
“…….”
“그러니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마마. 이게 마지막일 겁니다. 이 이상의 다음은 없어요.”
다음이 없다는 말이 전해졌을 때, 규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는지, 영의정의 얼굴에 묘한 균열이 생겼다.
“감읍하다 해야 할까요. 제게 그리 마지막을 또 주셔서 말입니다.”
점점 떠나가는 언의 마음을 느끼고, 이경과 서혜가 제법 다정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어깃장을 놓고 돌아왔을 때, 규연은 또 한 번 깨닫고 다짐했다.
‘뺏기지 않을 거야. 절대 쉽게 내어 주지 않아.’
언에게서든, 서혜에게서든, 영의정에게서든, 규연은 지금껏 지켜 온 중전이라는 자리를 넋 놓고 내어 줄 마음이 없었다.
무엇이 규연을 뒤흔들든 간에, 규연은 이 자리를 지킬 생각이었다.
“아마 숙부님께서는 잊으셨겠지만, 혼례를 준비하기 위해 별궁으로 들어왔을 때, 제게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라. 그 자리를 다른 이에게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
규연은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머금은 뒤, 형형한 눈으로 영의정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 말씀을 지킬 생각입니다, 숙부님.”
“…….”
“하니 마지막이 무엇이든, 그 기회를 놓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장담하지요.”
버틸 생각이었다. 규연에게 허락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 * *
“무슨 일이기에 그리 사색이 되었더냐?”
“마마, 전하께서…….”
“전하께서?”
“편전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찾아온 김 내관이 간절한 표정으로 걸음을 청했다.
규연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를 바라봤다. 언의 광증이 이유라면 그렇다고 이야기를 할 터인데,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으니 이상했다.
‘게다가 요 근래는 광증이 일 때마다 내가 아니라 성빈을 찾은 것으로 아는데.’
언의 광증이 일면 부리나케 찾아오던 내관들은 이제 그 방향을 바꿔 서혜에게로 달려갔다.
“전하께서 나를 직접 찾으신 게냐?”
“그것은 아니옵니다. 한데…….”
“하면 무슨 일인지부터 말하거라.”
“그것이……. 말씀드리기가……. 상선 영감께서 꼭 모셔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김 내관은 어찌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규연은 알겠으니 길을 잡으라 명하고 그 뒤를 따랐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말도 온전히 전하지 못하는 건지 확인해야 했다.
“……아.”
편전에 도착했을 때, 규연은 말을 잃었다. 왜 상선이 규연을 찾았는지, 왜 서혜를 부르지 못했는지 바로 깨달았다.
어찌나 피워 댄 건지, 지금은 연기가 보이지 않는데도 양귀비 향이 남아 맴돌았고, 술과 향에 취한 여러 광대와 기생이 바닥에 뒤엉기어 널브러져 있었다.
악공 몇도 불려 나왔는지 잔뜩 얼어붙은 채 음악을 연주하는 중이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바닥에 검과 활도 놓인 것이 보였다.
언은 또 익선관을 던져 버렸고, 용포의 앞섶도 전부 풀어진 채였다. 몸을 늘어뜨리듯이 기대어 앉아 한쪽 손으로 머리를 괴고 있었다.
“중전마마.”
이 난장을 어찌 수습해야 할지 난감해 보이는 상선이 규연에게로 다가왔다.
“송구합니다. 하나 말씀을 올려야 할 듯해 이리…….”
“자네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만 날 찾는군.”
규연의 뼈 있는 한마디에 상선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규연은 멍하니 엉망이 된 편전 안을 바라봤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광대 몇이 여전히 날뛰고 있었고, 기생들의 웃음소리도 간간이 퍼졌다. 눈앞에 중전이 나타났건만, 누구도 예를 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규연의 마음을 미어지게 하는 건 언의 텅 빈 눈이었다.
〈매를 대신 맞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렇다 하더군요. 형을 대신 당하는 것이니 그 값이 비싸 너도나도 대신 맞겠다며 줄을 선다 합니다.〉
〈세상에…….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다리를 잃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데…….〉
〈그조차 두렵지 않을 만큼 내몰린 사람들이겠지요. 당장 내일 죽을지 몰라 돈이 필요한 자들이요.〉
〈아…….〉
〈걱정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상황에 놓인 백성들이 많다는 뜻이니까요. 구휼미를 푼다는 소문은 도는데, 창고가 열릴 기미는 안 보이고.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요.〉
그 시절 언은 민생에 관심이 많았다. 종종 규연에게도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언제나 따뜻했다.
규연은 그런 언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렇게 하면 해결될지도 모른다며 말하던 방법 역시 치열하게 고민하고 지켜보며 내놓은 결과인 게 눈에 보였다.
그랬던 사내가 편전에 광대와 기생을 부르고, 틈만 나면 양귀비 향에 취해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규연을 씁쓸하게 했다.
꼭 이제 규연이 사랑하던 그 사내는 세상에 없다고 소리치는 것 같아서, 이미 넝마가 된 마음이 또 해어졌다.
그런데 그런 언을 보고 있으니,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됐다.
규연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실히 보였다.
“다들 물러가거라.”
규연은 편전 안에 있는 이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나 음악도 멎지 않았고, 춤도 멎지 않았고, 듣기 싫은 웃음소리도 멎지 않았다. 편전 안의 모두가 꼭 규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자 규연의 시선이 발밑에 있는 활로 향했다. 규연은 활을 다룰 줄 알았고, 아버지를 놀라게 할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잊고 있던 기억이 밀려들자 규연의 손이 자연스레 활과 화살을 쥐어 들었다.
“마마?”
놀란 상선이 조심스럽게 규연을 불렀지만, 규연은 신경 쓰지 않고 활시위를 당겼다.
“으헉!”
“꺄아악!”
순식간이었다.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춤추던 광대의 모자를 화살이 뚫고 지나간 건.
화살은 모자를 지나 화병 하나를 깨뜨렸고, 그 파열음에 곳곳에서 비명이 들리며 음악이 뚝 멎었다.
고요해진 편전의 시선이 모두 규연에게로 향했다.
“모두 물러가거라. 당장.”
평소의 규연에게서는 쉬이 들을 수 없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크게 내지도, 소리 높이지도 않았건만, 음성에서 전해지는 위압감이 엄청나 모두가 움츠러들었다.
편전을 채우던 자들이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나같이 겁에 질린 채였다.
규연은 쥐었던 활을 바닥에 내던지고 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여전히 비어 있되 조금은 놀란 듯한 눈이 규연을 마주했다.
“신첩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왜 갑자기 이리 변하신 건지, 왜 신첩이 이 자리에 이골이 나게 만들려 하시는 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궁에 들어온 이후로 매일같이 생각하고, 매일같이 이유를 찾아 보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이유를 찾지 않으려 합니다. 전하께서 무엇을 하시든, 신첩은 신첩의 길을 갈 겁니다.”
“…….”
“전하께서 무슨 일을 벌이시든 예전의 전하로 돌아오실지 모른다고 믿는 제 기대가 싫다 하셨지요. 지금 이 순간부터 그 기대를 접겠습니다.”
규연은 차분하고 또렷하게 그녀의 뜻을 전했다.
“하나 중전이라는 이 자리는. 이 자리 하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겁니다.”
“…….”
“전하께서 성빈을 얼마나 총애하시든, 신첩의 숙부가 어떤 꿈을 꾸든, 이 나라 온 백성이 용종을 품지 못하는 석녀라며 손가락질하든, 이 자리는 제 것입니다.”
내내 비어 있던 언의 눈이 옅은 빛을 되찾은 채로 흔들렸다.
“성빈을 이 자리에 앉히고 싶으시겠지요. 사랑하는 여인에게 무엇이든 쥐여 주고 싶은 것이 사내이니.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내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
“…….”
“전하의 마음을 성빈에게 다 주세요. 상관없습니다. 총애받는 후궁. 거기까지가 성빈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일 테니까요.”
규연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고 단호하게 언에게 말했다.
“그리 많은 꼴을 보며 이를 악물고 버텨 왔는데, 신첩도 이 정도는 욕심내도 되지 않겠습니까.”
“…….”
“이리 버텨 온 제가 가여워서라도 내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 하니 전하께서도 견디십시오. 지금껏 신첩이 전하를 견뎌 온 것처럼요.”
말을 마친 규연은 곧바로 편전 밖으로 향했다.
이제는 정말, 온전히 규연만을 위해 싸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