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68)

18화

* * *

“마마. 속은 좀 어떠신지요?”

“훨씬 나아. 약이 어느 정도 효험이 있는 듯하구나.”

병풍 뒤에서 언과 서혜가 몸을 섞는 소리를 들은 뒤, 규연은 틈만 나면 헛구역질을 했다.

최대한 잊고 싶은데, 헐떡이는 숨이 섞인 목소리에 담기던 ‘전하’라는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고, 병풍이 움직이던 장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간만에 깊이 잤으니 그 또한 도움이 되겠지.”

“참으로 다행입니다, 마마. 하나…….”

“걱정 말게. 보통의 귀비탕보다 독하니 조심해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내려앉도록 들었으니.”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탕약 없이 잠을 청하지 못하시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규연은 걱정 말라며 한 번 더 정 상궁을 안심시켰다.

영의정에게 불면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어의를 피해 귀비탕을 들여오고 있었다. 약이라도 들어가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듯해 어제 손을 댔는데, 거짓말처럼 달콤한 잠이 찾아왔다.

“한데 오랜만에 꿈을 꾸니 기분이 이상하더구나.”

“꿈을 꾸셨습니까? 어떤 꿈이셨는지요?”

“……꿈에서도 참 잔인하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꿈.”

마냥 행복하고 좋은 꿈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지난밤 규연에게 찾아온 꿈은 현실과 지독히도 닮아 있었다.

꿈에서 언을 봤다. 그런데 과거의 기억이 아니었다.

규연의 침전이었고, 그녀의 곁에 있던 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게 전부인 꿈이었다. 꿈에서조차 등밖에 보지 못했다. 너른 등이 조금의 미련도 두지 않고 그대로 멀어졌다.

사실 꿈이 아니었다. 언이 침전을 빠져나갈 때, 규연의 잠이 살짝 깨어 그 모습을 본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규연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 순간을 꿈이라 여겼다.

언이 합방일도 아닌 때에 말도 없이 그녀의 침전을 찾아오는 건 현실에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규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꿈에서라도 얼굴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규연은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 * *

“별장?”

대비의 부름을 받고 경춘전으로 향하던 규연의 걸음이 뚝 멈췄다.

멀찍이 이경이 보였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속이 답답하던 차에 믿음직한 벗을 보니 유달리 반가웠다.

규연은 드물게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이경에게 가까이 갔다. 방향이 틀어져 있어 이경은 아직 규연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가던 중에 갑자기 규연이 멈춰 섰다.

“……성빈?”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인물이 이경에게로 향한 탓이었다.

이경은 성빈을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공손히 허리를 숙인 그는 성빈과 무어라 대화를 나눴는데, 그 분위기가 제법 친근했다.

원체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인지라 규연에게는 장난스럽고 능글거리는 밝은 사내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이경은 위엄 있고 냉철한 호위청의 별장이었다.

이 점을 규연 역시 잘 알았다. 이경은 쉬이 제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서혜를 마주하고 있는 이경의 모습은 규연이 알고 있던 소년의 모습과 비슷했다.

이경이 서혜와 제법 친근하다는 방증이었다.

그 순간, 규연의 발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이경을 발견하기 전보다 훨씬 빨랐고, 또 힘이 있었다.

“마마!”

거리가 좁혀지자 이경이 먼저 규연을 발견했다. 그를 마주하고 서 있던 서혜 역시 규연을 보고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앗, 전하!〉

서혜의 얼굴을 보고 나니 병풍 너머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또 속에서 토악질이 차올랐다. 규연은 두 주먹을 꽉 쥐며 가까스로 헛구역질을 참았다.

“나와 계시는지 몰랐습니다. 옥체가 미령하시다 들었는데, 지금은 나아지셨는지요? 소신이 무척 걱정…….”

“성빈은 궁에 붙어 있는 눈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나 보군.”

이경이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티를 내며 말을 잇는데, 규연은 굳은 얼굴로 서혜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경은 물론이고, 서혜 역시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규연을 바라봤다.

“소첩이 부족해 무슨 말씀이신지…….”

“전하를 잘 모시는 후궁에게는 끝도 없이 눈이 붙는 법이지. 한데 그런 여인이 이리 환한 대낮에 별장과 시시덕거리고 있으면 어떤 말이 돌 것 같은가?”

억지였다. 규연도 잘 알았다. 이렇게 따지면 규연 역시 이경과 몇 번이고 말이 돌았어야 했다.

참으로 못난 트집이었다. 말을 하는 내내 규연 스스로가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이경을 보며 웃는 서혜를 본 순간, 이성의 끈 어딘가가 뚝 끊겨 버렸다.

이미 언의 마음을 가진 서혜였다. 규연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다정함을, 서혜는 누릴 수 있었다.

그런 여인이 이번에는 이경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두려웠다. 연모하는 사내의 마음을 훔쳐 간 여인이 규연의 아주 오랜 벗까지 앗아 가는 것은 아닌지, 그마저도 홀려 내는 것이 아닌지 겁이 났다.

참 바보 같은 걱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칠 대로 지친 마음이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마. 송구하오나 오해십니다. 성빈 자가와 소신은…….”

“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근래 전하의 안위를 위협하는 자들이 늘었다 들었습니다. 하면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여야 할 터인데, 호위청의 별장이라는 자가 이리 노닥거릴 여유가 있습니까?”

불똥은 이경에게로까지 튀었다.

규연은 오해라며 다급히 해명하려던 벗에게까지 억지를 부리고 말았다.

“전하께서 지금의 모습을 참으로 좋아하시겠습니다.”

규연답지 않은 비아냥까지 섞여 버렸을 때, 규연이 바로 등을 돌려 이경과 서혜를 지나쳤다.

이경이 다급하게 ‘마마!’를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따라붙은 서혜의 시선 역시 느껴졌지만, 규연은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이렇게나 잔뜩 흔들려 들켜서는 안 되는 못난 모습까지 들키고 나니 더더욱 속이 썼다.

* * *

“마마께 한 소리 들은 것이 그리도 낙담할 일입니까?”

한껏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이경을 보며 서혜가 넌지시 물었다.

하지만 따라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경은 꼭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사색이 되어 근심에 빠져 있었다.

“별장!”

“아, 죄송합니다, 자가. 무어라 하셨지요?”

서혜가 소리 높여 부르고 나서야 이경이 정신을 차렸다.

“……아닙니다. 되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그만……. 말씀해 주십시오. 무엇을 말씀하시려 했습니까?”

겨우 서혜에게 집중하긴 했지만,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이경 본인도 모르는 듯했지만, 서혜에게는 보였다.

“그리 딱딱하고 깍듯하게 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 둘뿐인걸요. 이전처럼 그냥 서혜라 부르세요.”

“아니 될 말씀입니다, 자가. 궁이 어떤 곳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조금 전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자가와 제가 아는 사이임을 드러내는 게 무엇이 좋겠습니까.”

명백히 선을 그으며 규연의 이야기까지 끌고 오는 이경의 모습에 서혜의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찾아왔다.

“마마께서 무척 차분하고 이성적이신 분인 줄 알았는데, 저리 어깃장을 놓으시는 것을 보니 그것도 아닌가 봅니다.”

괜히 심술이 났다. 그래서 규연의 험담을 툭 던지고 말았다.

“그리 말씀하지 마세요. 누구보다 단단하신 분이니까. 하나 지금은 그조차 흔들릴 정도로 괴로우신 상태인 게지요.”

이야기를 들은 이경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심지어 서혜를 바라보는 눈에 살짝의 원망까지 비쳤다. 규연이 괴로워하는 이유가 서혜에게 있다는 듯이.

이경 역시 언의 그림이 무엇인지 아는, 그의 그림의 일부였다.

서혜가 본래 누구인지, 왜 언의 밑으로 들어갔는지, 왜 지금 궁에 들어와 있는지, 모두 알았다.

그런데도 규연의 일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경답지 않게 전후를 따지지 않는 모습이 마냥 아팠다.

서혜라고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님을 알면서, 그녀 역시 그저 이 판 위에서 움직이는 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 서혜를 탓하는 이경이 야속했다.

“저렇게나 옥안이 상하셨을지는 몰랐습니다. 호위청의 일이 바빠 아예 살피지 못했는데 그동안 저리 여위셨을 줄이야…….”

이경은 서혜를 앉혀두고 계속해서 규연의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서혜는 그 모습을 보며 그녀와 이경이 처음 알게 되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자세한 내용은 전해 들었습니다. 세작이 될 낭자시라고.〉

훈련장에서 홀로 검을 휘두르던 그는 서혜를 발견하고는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누구보다도 영상을 죽이고 싶으리라는 것, 잘 압니다.〉

〈…….〉

〈하나 너무 태우지는 마세요. 낭자 자신까지 장작으로 써 버리면, 복수가 끝났을 때 낭자도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릴 겁니다.〉

이경은 그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서혜를 지나쳤다. 눈에 띄게 다정한 말도, 눈에 띄게 세심한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너무 불태우지 말라는 그 말을 들은 순간, 거짓말처럼 서혜가 품고 있던 마음속 흉터 하나가 지워졌다. 동시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영의정을 향한 복수가 아니라 서혜 자체를 먼저 챙겨 준 사내가 처음이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그저 운명이었는지, 아직도 이유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서혜는 이경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 마음은 좀처럼 접히지 못하고 계속 자라나 오늘에까지 이어졌다.

〈제가 후궁이 되어 입궁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궁에 눈이 더 필요하다. 영상과 이판을 같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인이 필요하기도 하고. 너무 염려 말거라. 궁에서의 일은 이경도 도와줄 테니.〉

후궁이 되어 입궐해야 한다는 작전을 처음 들었을 때, 조금도 저항하지 않은 이유에는 이경이 있었다.

궁에 들어가면 호위청 별장인 이경을 더 가까이서 자주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참 지독히도 궁금해 서혜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대체 규연이 누구이기에 언이 제 살을 깎아 내는 고육책을 벌이게 만들고, 이경이 가슴이라도 찢긴 표정으로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지. 서혜는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이경에게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겼을 때, 내심 기대한 적이 있었다. 곁이 비었으니 저 자리를 욕심내면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소중한 벗이시지. 얼마나 소중한지 차마 말로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벗.〉

그런데 이경이 규연을 설명하던 순간, 서혜의 기대는 박살이 나고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경의 세계에서 서혜가 무슨 짓을 하든 규연이 서혜보다 앞에 서 있으리라는 것을.

얽히고설킨 넷의 관계를 곱씹던 서혜는 문득 궁금해졌다.

누가 가장 가여울까.

지독히 연모하면서도 은애하는 여인을 밀어내고 있는 언, 아무런 내막을 모른 채 그저 언을 향한 마음 하나로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규연, 그런 미련한 여인을 연모하는 이경, 그리고 그 여인을 사랑하느라 주위를 조금도 둘러보지 못하는 이경에게 매달리고 있는 서혜.

서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잔뜩 꼬여 버린 인연을 만든 하늘을 원망했다.

‘참으로 우습구나. 정말 우스워.’

정말, 우스운 것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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