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 *
“오셨습니까, 전하.”
“그래. 궁은?”
“별일 없었습니다.”
새까만 무복에 얼굴까지 복면으로 가렸던 언이 숨겨진 통로를 통해 궁으로 돌아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상선이 익숙하게 새까만 옷을 받아 냈다.
“일은 전부 보셨습니까? 다 괜찮은지요?”
“그럭저럭. 앞으로가 더 중요하겠지.”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언과 상선이 주고받고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상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언이 침의를 걸칠 수 있도록 환복을 도왔다. 순식간에 언의 온몸에 묻었던 그림자가 사라지고, 새하얀 비단이 언을 가렸다.
“앵두는?”
“오늘은 드디어 잠드셨다고 합니다. 고생하셨다는 기간이 지나치게 길어져서 안 그래도 염려하고 있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드디어 잠들었다는 소식에 언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래. 다행이군.”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잠들었나 싶으면 깨어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는 소식을 들은 지가 어언 보름이었다.
간만에 온전히 잠들었다 하니 마음이 놓일 수밖에 없었다.
“곧 통명전 호위의 번이 바뀌는 시간입니다.”
언이 잠시 생각에 잠기자 상선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잠드셨으니 그 아이가 문을 열어 두고 있을 겁니다, 전하. 길을 잡을까요?”
상선은 항상 귀신같이 언의 마음을 읽었다. 아비와 다름없는 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언은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고, 곤히 잠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와야만 언이 보러 갈 수 있는 통명전의 앵두.
규연이었다.
* * *
“확실히 잠들었느냐?”
“예, 전하.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통명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눈이 잠시 사라지는 순간, 유월이 활짝 열어 둔 문을 통해 언이 침전 안으로 들어왔다.
유월은 언이 심어 둔 궁녀였다. 규연이 하루 동안 무엇을 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혹시 아픈 곳은 없는지,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해 언에게 보고했다.
원체 잘 훈련된 궁녀인지라 몇 년이 지나도록 정체를 들키지 않았고, 정 상궁은 물론이고 규연의 신망도 얻었다.
“…….”
방 안으로 들어오니 유월의 말대로 규연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언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규연이 잠들고 나서야 이렇게 찾아올 수 있었다. 침전에 든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되니 깨어 있을 때는 절대 오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마주하는 게 어언 보름만이었다. 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잠든 규연을 살폈다.
“어의는? 오늘도 다녀갔느냐?”
“예, 전하. 기력이 많이 쇠하신 상태이오나 크게 상하신 곳은 없다 하였습니다. 끼니마다 챙기셔야 한다며 보약을 잔뜩 짓고 갔습니다.”
“식사는?”
“양이 크게 늘진 않으셨으나 궁인들이 원체 살뜰히 챙기고 있어 끼니를 거르시는 법은 없습니다.”
언은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규연의 침전에 찾아오면 항상 이렇게 유월로부터 규연의 상태를 보고 받곤 했다. 규연이 중전이 되어 입궁한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얼굴이 어찌 이리 상했습니까.’
곤히 잠든 얼굴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수척해진 규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언은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규연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원인은 모조리 언에게 있었다.
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고달플 이유가 없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가여웠고, 그래서 미안했고, 그래서 언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사실 이렇게 찾아오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았다.
밀어내야만 한다는 이유로, 규연까지도 속여야 한다는 이유로 그렇게나 괴롭히고 있으면서, 보고 싶다는 이유로 찾아와 이렇게 바라보다 가는 게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지 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라도 보지 않으면 언을 짓누르고 있는 무게에 깔려 죽을 것만 같아서, 이렇게라도 규연에게 닿지 않으면 일을 다 끝내기도 전에 언이 먼저 죽어 버릴 것 같아서, 이리 찾아와 밤마다 죄를 쌓고 있었다.
‘입술이 어찌…….’
규연의 입술이 유난히 부르터 있었다. 언은 인상을 찌푸리며 살짝 몸을 숙였다. 왜 이리 상한 것인지 가까이서 살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바짝 다가가니 규연의 입술이 젖은 것이 보였다. 말라 갈라진 입술에 무언가 묻어 있었다.
꼭 입을 맞출 것처럼 다가가 보니 알싸한 향이 났다. 보통의 약에서 나는 향이 아니었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에 기억을 되짚던 언은 이내 향의 정체를 알아내고 유월을 바라봤다.
귀비탕. 불면을 다스리는 탕약의 향이었다. 한때 언이 달고 살았던 약이기에 똑똑히 기억했다.
“중전이 약으로 잠을 청하는 게냐?”
“아닙니다. 마마께서 따로 청하시는 약은 없습니다. 어의께서도 잠드는 약을 처방한 적은 없습니다.”
“하면 어의가 아닌 밖을 통해 약을 가져온다는 뜻이군.”
“예?”
유월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언과 규연을 번갈아 바라봤다. 규연이 궁 밖에서 약을 들여온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소인이 마마의 모든 사정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사오나 분명…….”
“네가 놓친 부분이 있는 게다. 정 상궁을 통해서만 들여왔거나 다른 방법을 썼겠지. 그리 오랜 기간 잠들지 못한 여인이 어떻게 오늘 이리 쉽게 잠들었나 했더니.”
언은 마음이 무너진 얼굴로 규연을 바라봤다.
‘혹여나 궁에 말이 돌까 걱정되어 어의에게서 약을 얻지 못하는 겁니까. 아니면 영상의 귀에 들어가 불안함을 들키는 게 걱정되어 감추려는 겁니까.’
어의는 영의정의 입김 아래에 있는 자였다. 그래서 언의 건강과 관련된 이야기까지 모조리 영의정에게로 흘러들어 갔다.
언은 이를 알기에 궁 밖에서 치료를 받았고, 가벼운 상처나 흉은 상선의 선에서 해결했다.
그런데 이제는 규연마저도 그녀의 상태를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입이 썼다.
규연이 얼마나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인지,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내가 벌인 일이다. 내가 정한 일이야. 그런데 왜 이리…….’
여기까지 온 이상,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규연을 밀어 버리는 것도 언의 역할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규연을 궁 밖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런데 그 벼랑 밑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여인을 보니 속이 문드러졌다.
우습다는 것도, 이럴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마음이 찢어지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대는 왜…….”
나라는 놈이 무엇이라고 나 하나 놓지 못해 이리 더 고생을 하냐는 말이 또 혀끝에 맴돌았다.
생기라고는 없는 규연의 얼굴을 살피던 언은 문득 이 궁에서 처음으로 규연과 재회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영의정이 규연을 중전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을 동원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혼례를 치르는 날 그녀를 마주했다.
〈…….〉
〈…….〉
면복과 적의를 입고 서로를 마주한 순간, 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재회한 규연은 여전히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화려한 적의를 입고, 대수 머리를 올리고, 곱게 화장을 하고서 언을 바라보고 있는 규연을 마주하는 게 꼭 꿈만 같았다.
매일 저택을 찾고, 매일 수줍게 감정을 전하고, 그러다 언이 갑작스레 자취를 감춘 상황이었다.
그동안 규연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언이 궁가에서도 사라져 버렸으니,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런 시간을 견뎌 온 여인이 아무런 원망도 보이지 않고, 그저 언을 다시 만나 다행이라는 듯한 맑은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이렇게라도 만나서 다행이라고, 결국 이렇게 닿아서 다행이라고, 입을 다물고 있는데도 눈을 통해 그리 말하는 게 느껴졌다.
〈대감!〉
〈기다렸습니까? 늦어서 미안해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오늘은 오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깟 눈이 무엇이라고 낭자에게 오는 길을 포기하겠습니까.〉
그 눈을 본 순간, 언은 규연과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마냥 설레고 기뻤던 기억이었다.
〈볼이 붉으십니다. 코끝도요.〉
〈금방 가라앉습니다. 춥거나 아프지 않으니 염려 마세요.〉
〈그래도…….〉
규연은 그래도 걱정이 된다며 한숨을 푹 쉬고는, 언을 화로 앞으로 데려갔다. 그의 몸이 다 녹기 전까지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비장한 얼굴로 곁을 지키는 모습에 언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당장 내일 찾아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봄을 많이 좋아하나 봅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그래요? 그곳이 어디입니까?〉
〈비밀이에요.〉
〈너무합니다. 낭자만 알려고요?〉
〈네. 아직까지는요. 그렇지만 저 홀로 가지는 않을 거랍니다.〉
장난스럽게 웃던 규연이 이내 수줍어하는 얼굴로 언을 바라봤다.
〈이전에 아버지를 기다리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 있는데, 벚꽃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거든요.〉
〈그 아름다운 곳에 같이 갈 자가 누구입니까?〉
〈이미 답을 아시지 않습니까.〉
〈직접 듣고 싶어서 그럽니다.〉
〈대감이요. 대감과 함께 가고 싶어서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달리 춥고, 유달리 눈이 많이 오던 겨울밤, 화로를 사이에 두고 행복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그날까지만 해도, 그리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궁가로 돌아갔을 때까지만 해도, 언은 그날의 대화가 ‘연성 대군’으로서 규연과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꿈에도 그리지 못했다.
하지만 운명의 소용돌이가 기어코 언을 잡아먹었고, 그는 규연에게 아무런 기별도 넣지 못한 채 왕이 됐다.
너무도 짧은 시간에 하늘과 땅이 뒤바뀌면서 연성 대군이라는 사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미 장안에도 새 왕이 지독한 폭군이라는 소문이 가득 퍼진 뒤였다.
그런데도 규연만은, 맑은 눈을 빛내는 이 고운 여인만은 그때의 대군을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대감. 아, 송구합니다. 이제는 전하라 불러야지요.〉
언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짧은 틈을 놓치지 않은 규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듣는 청아한 목소리에 언의 가슴이 뛰었다.
〈그날 신첩이 말씀드렸던 그곳, 사실 이 궁의 담과 이어진 길이었습니다.〉
〈…….〉
〈이리 가까워졌으니, 한 번쯤은 전하와 함께 갈 수 있겠지요.〉
규연이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잊지 않았음을 깨달은 순간, 그리고 수줍게 웃으며 둘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음을 비친 순간, 언은 그간 힘들게 다져온 각오와 다짐을 모두 던져 버리고 싶었다.
언이 그의 길을 선택한 뒤 마주했던, 가장 큰 위기였다.
‘아마 그대는 평생 모르겠지요.’
회상을 끝낸 언은 잠든 규연을 보며 속으로 서찰을 부쳤다.
‘그날 그 순간만큼은,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그대를 위한 지아비로 남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다는 것을.’
영원히 전해지지 못할, 영원히 규연에게 닿지 못할 연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