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 *
〈대제학의 여식이라고?〉
〈예. 홀로 살아남은 듯합니다.〉
서혜는 언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아직도 선연히 기억했다.
영의정의 모함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난 날, 서혜는 가까스로 화를 피해 숲으로 숨어들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서혜를 언 아래에 있는 사내 하나가 발견해 그에게로 데려왔다.
〈그리 경계하지 말거라. 너를 죽일 생각도, 허튼짓을 하려는 마음도 없다. 고단할 테니 오늘은 이만 쉬거라.〉
〈뵌 적 있습니다. 아버지를 찾아오셨을 때 뵈었습니다, 전하.〉
잠행 중인 언을 알아보니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날 찾아오신 것도, 저를 지금 이렇게 데려오신 것도, 영상의 반대편에 계신다는 방증이겠지요.〉
〈…….〉
〈제발, 제발 죽여 주십시오. 영의정 그자를 제발……. 갈기갈기 찢겨 죽이시고, 다시 육시를 해 주십시오. 제발……. 제발 이리 간청드립니다.〉
아비는 고문당하다 목이 베였고, 옥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저항하던 어미는 칼에 베였다. 오라비 둘과 언니 역시 관군의 검에 바스러졌다.
전부 영의정 때문이었다. 영의정이 아비를 축출하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지독한 분노가 서혜를 활활 태웠다. 영의정을 죽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소인을 도구로 쓰셔야 한다면 얼마든지 도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 쓰셔도 되니 제발, 정말 제발 그자를 죽여 주십시오.〉
언은 울며 간청하는 서혜를 말없이 지켜봤다. 그러다 물었다.
〈만일 내가 기회를 주면, 진심으로 죽일 수 있겠느냐.〉
〈목숨을 바쳐서라도 해낼 것입니다.〉
그게 언과 서혜의 첫 계약이었다.
언은 서혜에게 영의정을 죽일 기회를 주고, 서혜는 그 일에 일조하겠다는 계약.
* * *
〈후궁 첩지가 네게 내려질 게다. 영상 대감께서 무척 힘을 쓰셨어.〉
〈…….〉
〈이 집구석에서 괜한 눈칫밥을 먹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낫다. 매일 너를 재취 자리로 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나는 그 꼴을 못 봐.〉
서혜는 이제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 이판을 빤히 바라봤다.
숲속에서 울던 소녀는 언이 키우는 세작으로 훌륭하게 자라났다. 그녀는 영의정의 최측근인 이판이 밖에서 데려온 양녀가 되어 그 집안으로 들어갔다.
언은 이판이 평생을 못 잊고 있다는 기생을 찾아내 서혜의 신분을 지어냈다.
그 기생은 이미 명을 다한 뒤였는데, 서혜를 그 기생이 낳은 딸로 꾸며서 이판을 꾀어냈다.
그토록 잊지 못하고 평생을 그리워하고 있다는데 그 여인이 직접 낳은 딸인지 아닌지조차 못 알아볼 리 없지 않겠냐며 염려했으나, 이판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멍청했다.
그는 엉엉 울며 서혜를 끌어안더니, 당장 제집으로 데려가 호적에 올렸다. 정부인이 노발대발하고 온 집안이 난리가 났지만 이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혹여나 기생의 딸이라는 말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도 철저히 시켰다. 서혜는 그렇게 이판의 둘째 딸이 됐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의 중전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지 않더냐. 사실 그보다도 전하께서 아예 찾지 않으시니 그게 가장 큰 문제지. 아직도 초야를 치르지 않았으니.〉
〈…….〉
〈영상 대감은 중전을 대신할 수 있는 여인을 찾고 있는 게다. 해서 내가 너를 계속 이야기했지. 네가 얼마나 영민하고 고운지 아니 말이야.〉
〈…….〉
〈중전이 될 수 있다, 서혜야. 조선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단 말이다. 그러니 들어가서 반드시 전하의 마음을 얻거라. 색을 멀리하시는 분이 아니시니 어렵지 않을 게야.〉
이판은 한껏 신이 나 떠들었다. 서혜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저 우스웠다. 후궁을 들이기로 한 것도, 그중에 서혜가 간택된 것도, 결국 언이 그린 그림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건만.
그저 신이 난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났다.
〈해낼 수 있지?〉
〈예, 아버지. 물론이죠. 기대하세요. 반드시 국구의 자리에 오르게 해 드릴 테니까요.〉
이판은 씩 웃으며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고, 서혜는 그런 가짜 아비의 장단에 맞춰 싱긋 웃었다.
웃겼다. 눈앞에 있는 서혜가 진짜 딸이 아님을 의심조차 못 하는 것도, 서혜의 머릿속에는 영의정과 이판이 갈기갈기 찢기는 상상만 가득한 줄 모르고 딸이라며 헤벌쭉 웃는 모습을 보는 것도.
정말 마냥 웃겼다.
* * *
서혜가 후궁이 되어 입궁하는 건 그녀가 이판의 여식이 된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언의 총애가 향하는 건 계획에 없었다. 분명 처음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입궁하기 직전, 언의 그림이 달라졌다.
〈중전마마를 밀어내기 위함이십니까?〉
〈그래.〉
〈통할까요? 지금껏 그리 버티셨는데요.〉
〈모르지. 하나 분명 이전과 같지 않을 게다. 다른 여인들과 달리 너는 존재만으로 중전이라는 자리에 위협이 되니까. 거기에 내 마음이 더해지면 확실히 이전과는 반응이 같을 수 없을 터.〉
언은 반드시 규연의 마음을 접게 해야 한다고 했고, 서혜는 반신반의하며 그의 계획에 따랐다.
그런데 언이 말했던 대로, 규연이 생각보다 훨씬 거세게 흔들렸다.
서혜가 얄밉게 연기를 하고 있어서 더 그런지는 몰라도, 규연은 언이 서혜에게 마음을 비칠 때마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지금껏 버틴 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닌가. 지금껏 그렇게 버텼기에 한계가 온 건가.’
규연은 지금껏 서혜가 살면서 봐 온 여인 중 가장 아름다웠다. 누구든 금세 홀려 버릴 듯이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목소리 역시 청아하고 또렷했다.
그런 여인이 세기의 폭군이라고 불리는 언에게만 매달리는 게 신기했다.
〈연회에서 제법 연기를 잘하더구나. 놀랐다.〉
〈신첩이야 그리 훈련받은 자이니까요. 하나 전하께서는 조금 더 주의하셔야 할 듯합니다.〉
후궁이 들어왔으니 축제를 열자며 연회를 열었던 날, 서혜는 얼굴을 굳히며 언에게 말을 건넸다.
〈마마의 술잔을 뺏으신 것 말입니다. 마마의 옥체에 아직 미약의 기운이 남아 있어 술에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니십니까?〉
그날 언이 규연의 술잔을 빼앗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깨어났다고는 하나 원체 강한 미약이었던지라 몸에 그 기운이 남아 있을 시기였다. 술을 마셨다가는 다시 또 몸이 엉망이 될 터였다.
그래서 막았다. 규연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호전되고 있는 상태가 다시 엉망이 되지 않게.
〈마마께서는 알아차리지 못하실지 모르나, 그 뒤에는 영상과 다른 구렁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숨겨진 의도를 읽어 낼 수 있는 자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래. 네 말이 옳구나. 내가 경솔했다.〉
언은 최대한 억누르고 있다 했지만, 서혜가 보기에는 그가 품은 마음이 종종 틈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위험했다. 만약 영의정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다면, 긴 시간 공을 들인 작전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모두가 믿어야 합니다, 전하. 영상이든 누구든, 의구심을 갖게 해서는 안 돼요. 능숙하게 해내셔야 합니다. 정말 중전마마께는 전혀 마음이 없는 것처럼, 정말 은애하는 여인이 생긴 것처럼 행동하셔야 해요.〉
〈…….〉
〈마마께 해 드리고 싶은데 하지 못한 것을 제게 하십시오, 전하. 그리하시면 다 속을 겁니다.〉
서혜가 방법을 일러 주자 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 그러마.〉
서혜의 방법은 적중했다. 언이 서혜에게 하는 행동은 모두 규연에게 해 주었거나 해 주고 싶은 것들이었다. 건네준 꽃도, 다정한 면모도, 전부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몸을 섞는 척 꾸며 내는 건 서혜로서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이미 흔들리고 있는 여인을 이 정도로 뒤흔들 필요는 없었다.
“이유가 궁금해 아직도 그리 쳐다보는 게냐.”
“예, 전하.”
아직 병풍 뒤에 남아 있던 서혜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하도 못나게 굴었으니 조금은 잊을 줄 알았다. 아직도 내게서 미련을 놓지 못하게 만든 그 시간을 조금은 잊었을 줄 알았어.”
“…….”
“한데 어제 보니 하나도 잊지 않았더구나. 하나도.”
언은 너무나도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중전이 나를 미워했으면 좋겠다. 그리움이니 애상이니 하는 감정은 전부 남지 않고, 그냥 몹쓸 사내에게 걸려 욕을 봤다고 한없이 경멸하면서 나를 잊었으면 좋겠어.”
“…….”
“그래야 훗날 아프지 않을 테니까. 흉이 지지 않을 테니까.”
“…….”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를 향한 마음을 접게 해야 해. 무엇을 해도 밀리지 않으니, 이런 수라도 써야 하지 않겠느냐.”
모든 사연을 아는 서혜로서는 무어라 덧붙일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무엇도 언을 위로할 수 없을 테고, 또 무엇도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을 터이니, 그저 침묵을 지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여인이다. 나 같은 놈이 무엇이라고…….”
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두 눈을 감았다.
서혜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조용히 언과 규연의 앞날을 생각해 보았다.
만일 이렇게나 밀어내려 애쓰고 있는데 규연이 밀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저 여인이 끝내 언을 잊지 못하고 이 이야기의 끝을 맞이하게 되면, 그럼 그때는 무엇이 남는 걸까.
언이 바라는 대로 규연이 밀려나고, 규연의 마음에 언을 향한 미움과 원망이 가득 차게 된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그렇게 살아가다 훗날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럼 그 순간 저 여인이 마주할 감정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바보같이 미련한 건 전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어찌 이 길을 걸으십니까.’
서혜는 언이 걷게 된 이 길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갑작스레 불어닥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대가가 언에게도, 규연에게도, 참 지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