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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68)

15화

* * *

“꽤나 놀란 눈치입니다.”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규연과 마주 앉은 언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오실 줄 몰랐습니다.”

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아직도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오늘은 언과 규연의 합방일이었다. 그러나 언은 합방일마다 규연을 찾지 않았고, 요즘은 매일 찾는 서혜까지 있으니 더더욱 규연의 침전으로 들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지난번 기적처럼 침전으로 찾아온 날에도 양귀비 향에 잔뜩 취해 가슴에 비수만 꽂아 넣고 갔으니,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언이 규연에게 찾아왔다.

심지어 양귀비에 취하지도, 술에 취하지도 않은, 지극히 멀쩡한 상태였다.

‘혹시 성빈이 수를 쓴 겐가.’

아무리 생각해도 언이 그의 의지로 직접 찾아온 것 같지 않았다. 언을 바라보는 규연의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갔다.

“중전은 압니까? 중전이 머리를 굴릴 때 전부 티가 난다는 걸?”

언은 빠르게 술잔을 비우며 물었다.

“성빈이 내게 간청을 하더군요. 중전과의 합방일에는 자신을 찾지 말고 중전에게 가라며 울더이다.”

“…….”

“참 신기하지. 영상이 내게 찾아와 제발 중전과 밤을 보내시라 할 때는 그토록 짜증이 났는데, 성빈이 울며 청하니 그저 안타깝다는 생각만 들더군.”

“…….”

“절대 오시지 말고 통명전으로 가라며 하도 청하고 청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안쓰러울 정도로 우는데, 차마 그 모습을 계속 볼 수는 없어서.”

규연이 생각했던 대로, 언이 이곳을 찾은 배후에는 서혜가 있었다.

“깊이 생각을 좀 해 봤습니다. 성빈이 왜 그리 울고 매달리면서 중전에게 가라고 하는지 말이에요.”

언은 매서워진 눈으로 규연을 바라봤다.

“그러다 보니 걱정이 되지 뭡니까. 혹시 중전이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빈을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닐지.”

“전하. 그 무슨…….”

“어제 성빈에게 장신구를 보냈다지요? 나를 잘 모시니 그 공을 치하한답시고 보냈다 하던데.”

“예. 보냈습니다. 당연히 치하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냥 힘으로 찍어 누르고 싶었던 건 아닙니까? 중전은 중전이고, 성빈은 후궁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던 게 아니고?”

규연은 말을 잃고 언을 바라봤다. 서혜가 왜 언을 이곳으로 보냈는지 훤히 보였다. 그녀는 총애를 이유로 핍박받는 가녀린 후궁과 질투로 그런 후궁을 괴롭히는 못된 중전의 그림을 완성하려 했다.

언은 서혜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며 넘어가는 중이었고, 그 둘을 상대하게 된 규연만 헛웃음이 났다.

“성빈을 괴롭힐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 신첩이 그럴 성정이 아니라는 것도, 지금껏 전하께서 들이신 여러 여인에게 보복 한 번 한 적 없다는 것도, 누구보다 전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차오르는 감정을 갈무리한 규연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전하를 훌륭히 모시는 후궁을 치하하는 건, 중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신첩의 일이요.”

“…….”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어찌 힘자랑이 되겠습니까? 그저 신첩의 위치에서 제 일을 하는 것뿐인데요.”

흥분하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서혜를 괴롭힐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언을 보게 되니 울화가 차올라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하나만 물어봅시다.”

언이 둘 사이에 있던 주안상을 치워 내고, 규연을 바짝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놀란 규연의 눈이 요동치고 있을 때, 언의 손이 규연의 턱을 그러쥐었다. 여전히 거친 손길은 규연으로 하여금 언의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단 한 번도 성빈을 질투한 적 없습니까?”

이글거리는 눈과 한없이 공허한 눈이 맞닿았다. 규연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질투. 투기. 이런 감정이 규연에게 과연 허락된 감정이었을까.

서혜가 들어온 뒤로 규연을 휘감은 건 서혜를 향한 불같은 투기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허망함과 혐오였다.

버티고 버텨 지키고 있는 자리가 후궁 하나에 흔들릴지 모른다는 허망함,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사내를 놓지 못해 또 속앓이를 하는 자신을 보며 드는 한심함.

서혜가 머리를 굴리며 규연을 공격하는 상황에 분노한 적은 있어도, 서혜라는 여인을 질투하지는 않았다.

‘우습구나. 이런 질문을 받고 있다는 게.’

문득 이렇게 우악스러운 손길에 갇혀 서혜를 질투하냐는 물음을 듣고 있는 이 상황이 참 가관이라 느껴졌다.

언이 찾아왔다는 소리에 눈이 커지고, 그가 문을 넘고 들어와 규연과 마주 앉았을 때, 참 바보같이 가슴이 떨렸는데, 그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더욱 헛웃음이 났다.

혹시 모른다며 또 바보같이 설레었는데, 정작 나누고 있는 대화는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대답을 좀 해 보세요. 묻지 않습니까. 정말 성빈을 투기한 적이 없냐고.”

규연은 완전히 지쳐 버린 눈으로 언을 바라봤다.

“없습니다. 맹세코. 하나…….”

어느 때보다 단호했던 목소리가 여지를 남겼다.

“부러워는 했지요. 전하의 다정함이 사람을 얼마나 벅차게 하는지 아니까요.”

차라리 아예 몰랐으면 행복했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온전히 언을 미워하고, 그를 욕심 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규연은 언이 준 시간을 잊지 못했고, 여전히 그 안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입니다.”

한없이 부러워했다는 말에 언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항상 눈에 서려 있던 탁한 기운이 사라지고, 규연이 기억하는 ‘연성 대군’의 눈이 또 드러났다.

그러나 찰나였다. 언은 규연을 놓아주고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침전 밖으로 나갔다.

그새 눈가가 젖은 규연만 홀로 남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나를 찾으신다고?”

“예, 마마. 전하께서 중전마마를 모셔 오시라 명하셨습니다.”

날이 밝고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 언을 모시는 내관 하나가 규연을 찾아왔다.

언이 이렇게 직접 규연을 부르는 일은 흔하지 않았고, 심지어 서혜가 입궁한 뒤로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규연이 다소 당황하며 의아해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 바로 말이더냐?”

“예, 마마.”

규연은 곧바로 편전으로 향했다. 어제 언이 자리를 박차고 떠난 게 마지막이었던지라 편전에서 또 소란이 이는 게 아닌지 걱정됐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언의 명령인 동시에 주상의 명령이었다. 그저 따라야 했다.

“고하게.”

“그냥 드시지요, 마마. 오시면 바로 안으로 들이시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따로 고하지 않고 들어오라는 명령은 규연의 불안함을 더 깊어지게 만들었다.

규연은 평소보다 긴장한 채로 편전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그런데 편전이 텅 비어 있었다. 언이 앉아 있어야 하는 자리에 그가 없었다.

“전하. 중전 들었사옵니다.”

규연은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조금 더 큰 소리로 언을 찾았다.

그저 서 있기만 하는데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언답지 않은 부름도, 막상 찾아왔는데 비어 있는 이 공간도, 계속 규연을 불안하게 했다.

“전하!”

한 번 더 소리 내 불렀지만, 따라오는 답은 없었다. 편전 안을 지켜야 하는 내관과 궁녀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비어 있었다.

“전…….”

직접 찾아 나서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려 할 때, 병풍이 살짝 움직였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병풍을 노려보던 규연은 조심스럽게 그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앗, 전하!”

그리고 그 순간, 달뜬 숨이 섞인 채 언을 찾는 목소리가 규연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성빈이었다.

혹여나 새어 나갈까 급히 입을 막는 게 느껴지고, 숨을 참는 것도 느껴졌다. 병풍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저 뒤에서 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빤히 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병풍 앞에 멈춰 선 규연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휘감았다.

언이 다른 여인을 안는다는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러나 그저 전해 듣고, 그저 짐작할 뿐이었다. 지금처럼 규연이 직접 확인하게 한 적은 없었다.

지난밤 자리를 박차고 규연을 홀로 남긴 채 떠난 지아비가 그녀를 불러들인 편전에서 다른 여인을 안고 있다는 사실에 지독한 모멸감이 밀려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규연은 아득해진 정신을 다잡고 그대로 편전을 빠져나갔다. 어느 때보다도 빠른 걸음이었고, 어느 때보다도 감정이 묻어 있는 걸음이었다.

“마마 어찌 벌……. 중전마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상선이 다급하게 규연을 부를 정도였다.

규연이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병풍 뒤에 있던 언이 곁에 서 있던 흑에게 손짓했다.

“꺄악!”

“흐억, 억, 이거 놓으…….”

그러자 얼굴에 자루를 뒤집어쓴 채 몸을 섞는 중이었던 여인과 사내가 땀에 젖은 채로 질질 끌려갔다.

몸을 섞은 건 언과 서혜가 아니었다.

서혜와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창기와 반촌에서 일하는 남종 하나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전하.”

병풍 뒤에 함께 앉아 있던 서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궁에서 내내 보이던 곰살맞고 발랄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한없이 차분하고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오늘 받으신 상처는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서혜가 한마디 덧붙이자 언이 바닥에 두었던 곰방대를 다시 물며 연기를 뱉어 냈다.

“그리하라고 한 짓이 아니더냐.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포기할 여인이 아니니.”

언은 어느 때보다도 텅 빈 눈으로 천장 위로 퍼지는 연기를 바라봤다.

지금껏 언은 한 번도 서혜를 진심으로 마음에 품지도, 함께 밤을 보내지도 않았다.

영의정의 세력을 감시하기 위해 그의 측근에 심어 둔 세작, 그리고 규연이 언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 쓰고 있는 도구.

그게 바로 서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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