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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68)

14화

* * *

“필사본이더냐.”

“예, 마마.”

정 상궁이 두툼한 종이 뭉치를 규연에게로 내밀었다.

규연이 박 귀인에게 내렸던 벌 중 하나였다. ‘내훈’의 내용을 따라 쓰며 마음에 새기라는 뜻이었다. 함께 시시덕거렸던 시녀상궁은 그 자리를 빼앗고 품계를 낮췄다.

후원 앞에서 일어났던 일은 발 없는 말이 되어 온 궁에 퍼져 나갔다.

언이 서혜를 얼마나 다정하게 대했는지, 그녀에게 어떤 꽃을 안겨 주었는지, 박 귀인의 낯빛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규연이 그 자리에서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졌다.

말은 점점 꼬리가 붙고 덩치가 커지더니 이내 곧 ‘중전의 자리가 바뀔지 모른다’는 내용으로 변해 규연의 귀로 돌아왔다.

“정 상궁.”

“예, 마마.”

“성빈에게 선물을 보내려 하니 장신구를 몇 골라 놓거라.”

서혜에게 선물을 보내겠다 하니 정 상궁의 눈이 커졌다.

“전하를 잘 모시고 있으니 치하해야지. 본디 아래에 있는 자가 일을 잘하면 후하게 치하하는 것이 상전의 도리 아니던가.”

“물론입니다, 마마. 당장 채비하겠습니다.”

정 상궁은 규연의 말을 듣자마자 그 의도를 깨닫고 곧바로 비장한 얼굴이 되어 그리하겠노라 대답했다.

중전이 바뀌니 어쩌니 하는 말이 돈다 한들, 지금은 분명 규연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서혜는 규연의 발아래에 있었다. 규연은 이 위치를 분명하게 확인시키려 했다.

‘숙부는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어. 성빈이 용종을 품기 전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겠지. 그러니 그때까지는 이 자리를 최대한 이용해야 해.’

바람 앞의 촛불이라 한들, 아직 촛불이 꺼지지 않았다.

규연은 심지가 타오르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버틸 생각이었다. 이를 악물고 지켜 온 자리를 속절없이 무너지며 쉽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마마. 전하께서 오늘은 주강에 드셨다고 합니다.”

“그래? 정말이란 말이냐?”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정 상궁이 언의 소식을 전했다. 늘 빼먹기 일쑤이던 주강에 들었다는 소식에 규연이 깜짝 놀랐다.

“양귀비를 줄이고 계신 것일 수도 있겠구나. 아침엔 항상 취해 계셨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참으로 다행이야.”

언이 조금 나아졌다는 방증에 규연의 얼굴 위로 기쁨이 번졌다. 크게 안도하며 한숨 돌리는데, 정작 규연을 바라보는 정 상궁의 낯빛은 어두웠다.

“…….”

규연은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정 상궁은 언에게 그리도 당해 놓고 그가 조금 나아졌다는 이유로 미소 짓고 마는 상전을 한없이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내가 많이 답답하겠지.”

마음을 읽은 규연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 상궁의 답답한 마음이 백분 이해됐다. 사실 규연조차도 스스로가 참 우습고 한심하다고 생각했으니, 곁에서 보기에는 더하리라고 진작부터 여기고 있었다.

“답답하다니요. 소인이 어찌 감히 마마를 그리 여기겠나이까. 다만, 알고 싶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무엇을?”

“대체 전하의 무엇이 마마의 마음을 이리 크게 만들었는지요.”

규연은 정 상궁의 말을 곱씹으며 잠시 창 너머로 보이는 화계를 응시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홀로 남았을 때,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던 무렵이 있었네.”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고, 남은 가족은 아비뿐이었다. 그러나 한없이 다정하던 아버지마저 일찍 여의었다.

열다섯. 고작 열다섯에 세상에 홀로 남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도와주는 이도 하나 없어 그 어린 나이에 고래 등 같은 저택 살림을 홀로 이끌었다.

가족처럼 보살펴 주던 하인들이 많았다 한들, 홀로 남은 외로움과 슬픔이 지워지지는 못했다.

밤이 깊어 잠을 청할 때면, 부디 이대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고는 했다.

그렇게 얼어붙어 가던 때에 언을 만났다.

빨간 앵두를 손에 안겨 주고, 보고 싶어 이리 멋대로 담을 넘어 버렸다고 용서를 청하고, 저택으로 올 때마다 꽃을 구해 오는 사내가 규연 앞에 나타났다.

〈외로울 터인데요, 이 넓은 저택에 홀로 있으면.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나타난 언은 규연의 외로움을 처음으로 알아봤다. 마음 써 주는 하인들이 속이 상할까 걱정되어 외롭고 슬픈 마음을 꽁꽁 감추고 있었는데, 언은 그 가면 너머에 있는 규연을 쉽게 발견했다.

〈나는 그랬습니다. 낮에는 그래도 버틸 만한데, 밤에 홀로 남으면 온갖 생각이 몰려들어서. 형제들도 보고 싶고, 돌아가신 어마마마도 생각나고.〉

언 역시 홀로 궁가에 나와 살고 있었다. 넓은 저택에서 혼자 밤을 맞이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냥 나도 어마마마를 따라 떠나고 싶다. 형님처럼 세자도 아니고, 크게 이름을 남길 일도 없으니, 그냥 이대로 떠나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매일같이 했습니다. 굳이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달까.〉

눈이 휘둥그레진 채 언을 바라보던 순간이 아직도 선연했다. 당시의 규연이 매일 밤마다 하던 생각과 똑같았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표정을 보니 그대도 나와 비슷한가 보네요.〉

언은 규연의 상태를 금방 읽어 냈다. 규연은 소리 내 답하는 대신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언에게는 그게 더 확실한 대답이 됐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안 드십니까?〉

〈네. 지금은요. 한데 이렇게 온전히 지울 수 있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지우셨나요?〉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내일을 기대할 수 있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세상의 색이 다시 돌아오는지.

〈보고 싶고, 궁금한 사람이 생기면 되더군요.〉

바로 알아듣지 못한 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은 겨울인데, 봄꽃에 둘러싸인 모습을 보고 싶어 봄을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여름에 유달리 시원한 계곡에 데려가고 싶다는 마음에 봄을 넘어 여름까지 기다리게 되고요.〉

〈…….〉

〈그러다 보면 가을에 단풍놀이도 한번 가야겠다 싶어 기다리고자 하는 시간이 길어져요. 그렇게 멀리 보고 나서 돌아오면 ‘아, 내일 당장 달려가야 하니 아침이 빨리 왔으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은 겨울밤의 달을 바라보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규연은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가만히 감상하다가 문득 궁금해져 그에게 물었다.

〈대군 대감께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면 참 좋은 사람일 것 같은데, 그게 누구인지 여쭈어도 되나요?〉

규연이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모습에 언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푸스스 웃었다. 규연만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낭자요.〉

〈……예?〉

〈요즘은 낭자를 얼른 만나러 오고 싶어서 아침이 기대됩니다. 궁가로 돌아가고 나면, 다시 날이 밝기 전까지는 낭자를 볼 수 없으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규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유달리 달이 밝았던 터라 어둠에도 홍조가 가려지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지워 냈습니다. 낭자 덕분에요.〉

그때가 처음이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누군가 이 소리를 듣게 되지 않을지 걱정한 순간은.

〈부디 낭자의 외로움을 지우는 일에 내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

〈낭자의 내일이 기대되는 이유에 내가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언은 따뜻하게 웃으며 규연과 눈을 맞췄다. 그 모습이 너무 근사해서 홀린 듯이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의 귀도 규연의 얼굴만큼이나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는 것을.

언의 청은 그날 밤부터 바로 이루어졌다.

규연 역시 그날 이후로 다시 내일을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언이 또 저택의 담을 넘기를 기대하고, 그가 꺾어 올 꽃을 기대하고, 그가 보낼 연서를 기대하고.

언은 너무도 쉽게 규연의 내일을 되살려 냈다.

“마마?”

규연이 회상에 잠겨 말을 잃자 정 상궁이 조심스럽게 규연을 불렀다.

침묵에 잠기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어느새 규연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아, 미안하네. 잠깐 옛날 생각이 나서.”

규연은 황급히 과거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정 상궁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

규연은 그제야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힘드셨던 때를 떠올리신 것이옵니까, 마마?”

아버지를 잃고 하루하루 지옥 같았던 때가 있었노라 말하고는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았으니, 정 상궁으로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규연은 눈물을 닦아 낸 뒤 고개를 저었다.

“너무 행복했던 때를 떠올려서 눈물이 났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걸 아니까.”

듣기에 더욱 가슴 아픈 말이었다. 정 상궁이 한없이 안쓰러워하는 눈으로 규연을 바라봤다.

“하루하루 지옥 같고, 하루하루 힘이 나지 않아서, 새 아침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곤 했어.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내가 이렇게 눈을 떴다는 사실이 한스러워서 몰래 울 정도로.”

“…….”

“한데 전하께서 내게 내일을 돌려주셨네. 다시 내일을 기대하게 만들어 주셨어.”

규연은 아직도 선연히 남아 있는 옛 순간을 떠올리며 슬프게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매달리나 보구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 나를 수렁에서 꺼내 주신 분이라서.”

“…….”

“그래서 나도 전하를 끌어올리고 싶은가 보다. 전하께서 나를 살리신 것처럼, 나도 전하를 살리고 싶어서.”

닦아 냈던 눈물이 다시 규연의 얼굴을 적셨다.

더 이상 흘려 낼 눈물이 없노라고 생각했건만, 뜨거운 눈물은 하염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결국 규연은 그녀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 정 상궁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그마저도 소리를 내진 못했다. 혹여나 이 울음소리가 문밖으로 흘러나갈까 봐. 그래서 규연을 더 비참하게 만들까 봐. 규연은 또 입을 틀어막은 채로 소리를 삼키며 아이처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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