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 *
“마마. 옥안의 빛이 어두우십니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시는 게 어떤지요.”
“괜찮네.”
규연은 옅게 웃으며 정 상궁을 바라봤다. 정말 괜찮다며 안심시키려는 미소였지만, 효과는 없었다.
정 상궁은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규연을 바라봤다. 중궁전의 궁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규연은 요 며칠 내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가까스로 잠들어도 한 시진이 지나기 전에 깨어났다.
그러니 안색은 점점 더 파리해졌고, 몸에도 점점 힘이 빠졌다.
아픈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규연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감추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마…….”
정 상궁이 무언가 말하려 운을 뗐으나 이내 삼켰다. 규연도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며 더 묻지 않았다.
요즘의 규연은 그녀에게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싶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흘러오는 수많은 소리는 죄다 언과 서혜, 그리고 규연에 대해 떠들었다.
언이 서혜를 매일 밤 찾고 있다는 이야기, 옥으로 된 값비싼 장신구를 한 아름 안겨 주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정작 규연은 언에게 면박을 받고 연회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
중전에게서 왕의 마음이 아예 떠 버린 듯하다며 사방에서 수군거렸다.
규연은 그 말을 들었을 때 피식 웃고 말았다.
애초에 마음이 존재하긴 했던가. ‘떴다’는 말을 갖다 댈 정도의 마음이 규연에게 닿은 적이 있었던가.
곱씹을수록 참 우스웠다.
“마마. 하면 볕이라도 즐기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날이 가장 좋은 시기이지 않사옵니까. 오늘도 무척 청쾌합니다.”
규연이 생각에 잠겼을 때, 정 상궁이 밖으로 나가자며 규연을 설득했다.
“분명 기분이 나아지실 겁니다, 마마. 요즘 후원이 무척 예쁩니다.”
간절하게까지 느껴지는 청에 결국 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규연 역시 이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독한 수렁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과 멀어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 * *
“날이 정말 좋지요?”
“그래. 좋구나. 자네 말을 듣길 잘했어.”
정 상궁이 말한 대로 날이 무척 좋았다. 햇빛도 따사로웠고, 새파란 하늘 아래 흔들리고 있는 색색의 봄꽃 역시 아름다웠다.
아주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저 둘은…….”
그러나 상쾌함을 만끽한 시간은 찰나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규연의 눈에 여인 둘이 들어왔다.
“성빈과 박 귀인이 아닌가?”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서혜와 박 귀인이 말을 나누고 있었다. 박 귀인은 서혜와 함께 첩지를 받았던 세 후궁 중 하나였다.
규연은 둘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차피 후원으로 들어가려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주고받는지도 살펴야 했다.
친밀하게 말을 나누고 있는 줄 알았건만, 점점 거리가 좁혀질수록 보이는 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소리가 들릴 때까지 다가가 보니, 서혜가 박 귀인을 혼내고 있었다.
“날이 좋아 후원을 구경하려는 것인가 하였는데, 그게 아닌 듯하군.”
“중전마마.”
규연을 발견한 서혜와 박 귀인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지? 성빈이 화가 많이 난 듯한데.”
“이리 못난 모습을 보여 송구할 따름입니다, 마마.”
“괜찮으니 무슨 일이었는지나 말해 보게.”
서혜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박 귀인을 살짝 흘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박 귀인이 시녀상궁과 함께 입을 함부로 놀리고 있어 이를 훈계하던 중이었사옵니다, 마마.”
“아니옵니다, 마마! 자가께서 오해하신 겁니다. 소첩은 그런…….”
“내가 두 귀로 똑똑히 들은 게 있는데, 어느 안전이라고 또 거짓을 고하려는가!”
박 귀인이 억울함을 토로하자 서혜가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을 들었는지 말해 보게. 왜 입을 놀렸다 하는 겐가?.”
상황이 제법 심각한 듯해 규연이 이를 정리하고자 할 때, 모두가 일제히 규연의 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규연은 바로 몸을 돌려 뒤를 확인했다. 언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심각한 낯으로 다들 모여 있지?”
궁의 여인들이 모인 상황에서 언에게 말을 전해야 하는 건 규연의 몫이었다. 내명부의 수장이니 당연했다. 그런데 규연이 입을 떼기도 전에 서혜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송구합니다, 전하. 신첩이 차마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목소리를 내다 소란이 났습니다.”
“무엇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단 말이더냐.”
순식간이었다. 서혜가 규연의 목소리를 빼앗았다.
“박 귀인이 궁 밖에서 도는 낭설을 이 안에서 시녀상궁과 함께 떠들었습니다. 해서 이를 혼내려다 그만…….”
“낭설? 무슨 낭설이었기에 그러나?”
언이 묻자 서혜가 잠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이내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다는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전하께서 하늘의 저주를 받아 옥체의 왼쪽 옆구리에 끔찍한 흉터가 새겨져 있는데, 그곳에서 지독한 악취가 나는 피고름이 매일 쏟아져 궁이 시끄럽다는 헛소문이었습니다.”
규연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소문이었다. 다만 그 내용이 터무니없어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게 됐다. 정말 이런 말을 궁 안에서 했나 싶어 박 귀인을 쳐다보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성빈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닌가 보군.’
어쩌면 서혜가 박 귀인을 견제하기 위해 거짓을 꾸몄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짐작이 틀린 듯했다.
함부로 서혜부터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규연의 마음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한데 그런 낭설을 궁 안에서 말하는 것도 모자라 시녀상궁과 함께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습니다. 전하께 누가 되는 소문을, 그것도 전혀 사실이 아닌 내용을 말하며 웃는데 신첩이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말을 전하던 서혜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전하를 모신 여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거짓이지 않습니까. 중전마마께서도 아시겠지만 전하의 옥체에는……. 아…….”
박 귀인을 겨누고 있는 줄 알았던 화살이 규연에게로 날아와 박혔다.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규연에게로 향했다.
항상 차분함을 유지하는 규연이었지만, 이번만큼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했다.
서혜는 지금 낭설을 이야기하는 척, 규연이 언과 밤을 보내지 못한 왕비임을 한 번 더 짚어 내고 있었다.
언과 규연이 몸을 섞은 건 궁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궁 안에서는 한 번도 합방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이들 중 누구도 언과 규연이 함께 밤을 보낸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규연 역시 언을 안다고 밝힐 수 없었다. 중전이라는 여인이 약에 취해 언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이 밝혀져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송구합니다, 마마.”
서혜는 지독한 실수를 했다며 미안함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규연을 바라봤다.
‘진심이 아니야. 당연히.’
진심이 아니었다. 규연에게 작정하고 달려들고 있는 서혜가 미안함 따위를 느낄 리 없었다.
“되었으니 그만 일어나거라. 몸이 상하겠구나.”
목소리를 빼앗는 건 언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그가 직접 손을 내밀어 서혜를 일으켰다.
“내 너를 위해 오는 길에 꽃을 꺾어 왔다.”
언은 하얀 들꽃 다발을 서혜에게 안겨 주었다. 눈물을 콕콕 찍느라 울상이었던 서혜의 얼굴이 순식간에 꽃처럼 피어났다.
“참 예뻐서 꺾어 왔는데, 이렇게 너와 붙어 있으니 꽃이 죽는구나. 꽃은 하나도 보이지가 않아.”
목소리와 손길이 너무도 다정해 규연마저 도 홀린 듯이 언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서혜에게 건넨 한마디가 규연의 심장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또 꽃을 꺾어 오셨습니까?〉
〈낭자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또 손이 먼저 나갔습니다.〉
〈오실 때마다 이리 챙겨 오실……. 대감, 손이!〉
〈아, 괜찮아요. 가시에 살짝 긁혔는데, 이 정도는 상처도 아닙니다.〉
〈상처가 아니긴요! 손에 생채기가 이렇게 많이 났는데…….〉
〈그리 염려하지 마요. 정말 별것 아니니까.〉
언이 대군이던 시절, 수줍게 그의 마음을 드러내던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이 살아났다.
〈그보다 참 신기합니다.〉
〈무엇이요?〉
〈꽃만 보았을 때는 마냥 고와 낭자에게 보여 주겠다고 꺾어 왔는데, 막상 꺾어 낭자에게 안겨 주니 꽃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째서요?〉
〈낭자가 너무 고와서요. 장미의 색이 전부 죽어 버리네요.〉
규연에게 건넸던 말이었다. 진심으로 신기해하고, 감탄하며 건네 버려 규연의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던 말이기도 했다.
이제 다시는 평생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습이었는데, 다시는 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 확신했는데.
서혜를 바라보는 언에게서 ‘연성 대군’이 보였다. 규연이 궁에서 시들어 가면서도 언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된 과거의 사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중전.”
“……예, 전하.”
멍하니 굳어 있을 때, 언이 규연을 불렀다.
“박 귀인의 일은 중전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그러라고 있는 자리가 아닙니까, 그 자리는.”
맞는 말이었다. 중전이라는 자리는 본래 내명부를 다스리는 자리였으니. 하지만 서혜를 대할 때와는 눈에 띄게 달라진 목소리와 눈빛,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더해져 규연의 가슴을 후벼 팠다.
“알아서 처리하세요. 내 일절 신경 쓰지 않을 테니.”
언은 말을 마치자마자 서혜를 데리고 후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규연은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저 멍하니 서서 멀어지는 언과 서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분명 궁 안에 있는데, 이곳이 궁임을 너무나도 잘 아는데, 규연은 그녀가 발을 디디고 선 이곳이 꼭 벼랑 끝처럼 느껴졌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언이 딱 한 번만 더 밀어 버리면, 규연은 그대로 벼랑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