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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68)

12화

* * *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이리 즐거운 연회를 열어 주시다니! 베푸시는 성총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래? 역시 호판밖에 없군. 호판밖에 없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호판이 과장된 몸짓으로 절하고, 이를 보는 언이 소리 내 웃었다.

그의 옆에 앉은 규연만 어두운 낯빛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은 새 후궁들이 들어왔다는 이유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궁의 식구가 늘었으니 환영해야 한다며 벌인 일이었다.

몇 달째 비가 오지 않아 가뭄에 땅이 타들어 가고 있고, 날로 심해지는 부정부패에 민심 역시 점점 더 흉흉해지고 있건만, 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향과 색에 집중하기 바빴다.

오늘의 일도 궐의 담을 넘는 순간, 엄청난 말을 자아낼 터였다.

안 그래도 왕으로서의 입지가 불안하건만, 틈만 나면 자리를 위태롭게 만드는 언을 보며 규연만 속이 타들어 갔다.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더 흥이 날 수 있게 바꾸어 보거라.”

언이 술잔을 비우며 명령하자 금세 음악이 바뀌었다.

규연은 새어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그런 언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눈동자를 살폈다.

영의정을 비롯한 수많은 간신들은 언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그를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대비는 여인과 술로 가득 찬 연회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조정에 얼마 남지 않은 충신 몇만 규연처럼 흙빛이 되어 허공을 바라봤다.

‘성빈은…….’

규연의 시선이 자연스레 서혜에게로 향했다.

서혜는 꼭 이 연회장에 언만 존재한다는 듯, 다른 곳에는 일절 눈길을 주지 않고 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언과 한 번 눈길이라도 스치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킨 게 부끄러운 양 얼른 시선을 피했는데,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라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게서는 저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생각에 잠겼던 규연이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다잡았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서혜와 자신을 비교하며 문제점을 찾으려 한 흐름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어젯밤의 잔상이 너무 강하게 남은 탓이었다. 문 너머로 들렸던 서혜의 웃음소리가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하…….’

규연은 차마 소리 내 뱉을 수 없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머릿속에는 언과 서혜가 가득하고, 눈앞에는 말도 안 되는 연회가 한껏 벌어지고 있으니 점점 정신을 다잡고 있기 힘들었다.

규연은 잠시 시선을 내려 그녀의 앞에 놓인 작은 주안상을 바라봤다.

술병이 눈에 들어오니 자연스레 그날 밤이 떠올랐다.

이제 규연만의 밤으로 남았으니 잊어야 한다고 어젯밤부터 그렇게나 되뇌었건만, 술병 하나 봤다고 또 생생히 되살아나는 지금이 마냥 한심했다.

잠깐 눈을 감았던 규연은 조용히 잔을 쥐었다. 차라리 취기라도 좀 올라야 지금 상황을 버티기 쉬울 듯했다.

“……전하?”

그런데 잔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언의 손이 규연을 막았다.

놀라 커진 동그란 눈이 언에게로 향했다.

“술이 모자라서. 중전의 잔을 좀 훔쳐야겠습니다.”

언은 규연의 잔을 가져가 제 입에 털어 넣었다.

갑자기 빈 술잔만 돌려받게 된 규연이 놀라 굳은 채로 눈을 깜빡거렸다.

언의 기행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이리 술을 가져가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시선을 두지 않은 척 눈을 돌리고들 있었지만, 언을 살피고 있던 여러 신하들 역시 다소 당황한 티가 났다.

“왜 그리 봅니까? 내 낯에 뭐가 묻기라도 했습니까?”

그러나 언은 무엇이 문제냐는 듯 오히려 되묻기만 했다. 규연은 그제야 정신을 다잡고 낯빛을 정리했다.

“아닙니다, 전하. 그렇지 않습니다.”

언은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규연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는 이제 볼일이 없다는 듯, 화려한 춤사위를 자랑하는 기생들을 보거나 알랑방귀를 뀌어 대는 몇몇 대신의 말을 들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규연은 또 한숨을 삼켰다. 당혹스러운 순간이 지나가니 다시금 마음이 답답해졌다.

언이 작정하고 연회를 열면 해가 떨어져 밤이 깊을 때까지 잔치가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쉬이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대로는…….’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맨정신으로 버티기에는 무리였다. 규연은 상궁이 다시 채운 술잔을 재차 손에 쥐었다.

“……전하.”

그런데 똑같은 일이 또 반복됐다. 이번에도 언이 규연의 술잔을 가져갔다.

“이상하게 중전의 술잔에 들어 있는 술이 맛있어서 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규연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얼굴로 언을 바라봤다.

한 번이면 모를까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차마 낯빛을 정리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이렇게 행동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심술을 부리는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이유가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물음표만 연신 쏟아졌다.

“전하. 혹 신첩에게 하실……. 앗!”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연유를 말해 달라 솔직하게 청하려는 순간, 규연의 술상 위에 자리했던 술병이 그녀의 치마 위로 쓰러졌다.

“마마!”

곁에 있던 궁녀가 화들짝 놀라며 병을 치웠지만, 이미 술이 잔뜩 흘러나와 규연의 치마를 엉망으로 만든 뒤였다.

“아이고, 이런.”

작은 소란이 일고 있을 때, 정작 원인이 된 언은 평온하기만 했다. 짧은 탄식도 전혀 탄식 같지 않았다.

규연은 요동치는 눈동자로 언을 바라봤다.

언이 술병을 툭 치는 바람에 치마 위로 술이 쏟아졌다. 실수인 척 ‘아이고’를 뱉어 냈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비단 규연뿐만 아니라 연회에 참석한 모든 이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고의가 느껴졌다.

언은 일부러 규연에게 술을 쏟았다.

“중전의 낯빛이 하도 어두워 무척 곤한가 했는데, 그 곤한 기운이 옆에 있는 내게도 옮겨 와 이런 실수를 했나 봅니다.”

“…….”

“다들 이리 신나서 허허 웃고 있는데, 중전만 죽상을 짓고 있지 않습니까. 꽤나 고단한 모양입니다?”

규연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언만 빤히 바라봤다. 그가 무엇을 하기 위해 이렇게 행동하는지, 규연을 어찌하려고 이러는지 몰라 함부로 대꾸할 수 없었다.

“이리 치마까지 젖었으니 그냥 들어가 쉬면 되겠습니다. 어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 불편하게 앉아 있겠습니까? 얼른 침전으로 돌아가세요, 중전.”

아. 하고 깨달으며 탄식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세상 밖으로 퍼지지는 못했다. 규연의 마음속에서만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언은 이 연회장에서 규연을 치우려 했다.

술잔을 빼앗고, 치마를 술로 적셔 가면서까지 규연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규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기를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그리 불편해하면서 계속 자리를 지키려는 겁니까?”

언이 기어코 쐐기를 박았다.

분위기가 심각해지니 악공들이 연주를 멈추고, 애써 모른 척 시선을 돌리고 있던 대신들 역시 언과 규연을 바라봤다.

‘왜 제가 나가기를 바라십니까? 제가 떠나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이제 그냥 제가 꼴도 보기 싫으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물어보며 따지고 싶었지만, 규연은 혀끝에 맴도는 말을 절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두려웠다. 규연이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정말 그녀가 꼴도 보기 싫어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들어가서 좀 쉬세요, 중전.”

규연이 굳은 채 움직이지 않으니 결국 언이 직접 축객령을 내렸다.

순식간에 연회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주상이 중전을 내쫓는 모양새가 되었으니 당연했다.

규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이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 갑자기 술잔을 빼앗기고, 치마가 젖고, 더 나아가 연회에서 나가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이 과정을 여러 대신과 대비, 그리고 서혜가 지켜보고 있었다.

규연은 안간힘을 쓰며 평온한 낯빛을 유지했다. 이미 넝마가 되어 버린 마음이 또 갈기갈기 찢기고, 울화로 안이 가득 차는데, 겉으로 보았을 때는 조금도 티가 나지 않았다.

언이 어떤 말을 하든, 어떤 모욕을 주든, 그저 내내 이 얼굴일 것처럼 차분하고 평온해 보였다.

“…….”

규연이 흔들림 없이 우아한 자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께서 신첩을 염려하시어 먼저 쉴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얼마나 망극한지 모르겠습니다.”

청아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가 언에게 말을 건넸다.

“전하께서 이리 마음 써 주셨으니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 쉬겠나이다.”

언이 규연을 걱정해 돌려보내는 게 아니라는 것쯤이야 누구보다도 규연이 잘 알았다.

하지만 규연은 언이 그녀를 위해 축객령을 내렸다는 듯이 행동하며 싱긋 미소 지었다.

궁은 이래야 하는 곳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공격을 받아치고, 아무리 숨이 막혀도 숨을 몰아쉬지 않고, 설령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 눈은 형형히 빛나야 하는 곳.

그래서 규연의 상태가 더 엉망이 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언의 기행과 모욕을 수습하는 일이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다가 진작 도가 텄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처럼 규연에게 심술을 부리는 게 더 나았다.

‘하지만…….’

하지만 언이 정말 서혜에게 진심이 되어 버리면, 그리고 그 모습을 규연이 보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처럼 버틸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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