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언의 광증이 가라앉은 이상 규연이 편전에 더 머물 이유는 없었다. 아수라장이 된 곳에서 성빈의 인사를 받을 수도 없었다.
살짝 얼어 있던 규연은 정신을 다잡고 성빈을 통명전으로 불러들였다.
“옥체가 미령하시다 하여 여간 염려한 것이 아닙니다, 마마. 이리 나으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마주 앉은 성빈은 진심으로 걱정했다는 듯이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규연을 바라봤다.
“성빈이 그리 마음을 써 주어 이리 일어났나 보군. 걱정해 주어서 고맙네.”
“망극하옵니다, 마마.”
규연은 성빈을 똑같이 온화하게 상대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곳곳을 살폈다.
전체적으로 선이 고왔는데, 긴 눈매와 붉은 입술이 유달리 눈에 들어왔다. 눈에 띄는 화려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이판의 여식이라고? 이름은 무엇이지?”
“예, 마마. 서혜라 하옵니다.”
서혜. 규연은 조용히 이름을 곱씹었다.
“입궁하는 날 내 직접 살폈어야 하는데 일이 이리되어 버렸군.”
“마음 쓰지 마십시오, 마마. 이리 무사히 나으신 것만으로 소첩은 충분합니다.”
제법 처세에 능한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규연 앞에서 크게 긴장하는 기색도 없었고, 본인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명확히 아는 듯했다.
그래서 경계하게 됐다.
잔뜩 언 채로 궁에 들어온 소녀도 아니었고, 왕의 마음을 얻어 군림하겠다는 마음으로 똘똘 뭉쳐 방자하게 구는 어리석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광증을…….’
게다가 광증을 진정시켰다. 이 부분이 규연을 가장 심란하게 했다.
지금껏 규연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언의 광증을 달랜 사람이 없었다. 그저 곁에서 그의 화를 받아 내며 부디 기운이 꺾이기를 소망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서혜는 분명 언을 진정시켰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던 모습이 자꾸만 규연의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전하의 광증을 달랬더군. 고생 많았네. 처음 보았으니 놀랬을 터인데. 겁도 났을 테고.”
“전하를 모시는 것이 소첩의 일이니, 겁이 나고 놀라도 달래 드려야지요.”
서혜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껏 중전마마께서 홀로 전하의 광증을 받아 내셨다 들었습니다. 소첩은 이리 겪고 보니 오히려 마마께서 얼마나 마음 쓰셨을지 느껴져 되레 속이 상했습니다. 저 일을 어찌 혼자만 감당하셨사옵니까.”
그러더니 이내 무척이나 안쓰러워하는 낯빛이 되어 규연을 걱정했다.
“앞으로는 소첩이 돕겠습니다, 마마. 소첩이 그 짐을 함께 나눌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서혜는 눈을 빛내며 규연을 돕겠노라 말했다. 얼핏 듣기에는 충실히 중전을 보좌하겠다는 후궁의 각오였으나, 규연은 궁으로 들어온 여인의 언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큼 순수하지 않았다.
‘짐을 나눈다라…….’
규연 앞에서 한껏 몸을 숙이며 전하고 있는 바는 하나였다.
조금씩 언의 곁을 차지하겠다는 것. 조금씩 언에게로 스며들겠다는 것. 규연은 갖지 못한 자리를 꿰차겠다는 것.
“염려할 리가 있겠는가.”
규연의 한마디에 서혜의 입꼬리가 살짝 흔들렸다.
네가 무엇을 하려 하든 쉽지 않으리라는 뜻을 바로 알아들은 눈치였다.
규연은 안에서 불어닥치는 소용돌이를 아주 능숙하게 가린 채로, 그저 평온하게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꼭 꿈 같던 밤에서 깨어나고 마주한 현실이 벌써부터 험난했다.
* * *
“성빈을 만나셨다 들었습니다.”
“네. 보았습니다.”
“어찌 보시는지요? 이판이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던 여식입니다. 똘똘하다고 말이에요.”
서혜를 보낸 다음은 영의정이었다.
규연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건지, 금방 찾아온 영의정은 질녀의 건강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고 곧바로 서혜 이야기를 꺼냈다.
“예. 영민한 여인이더군요.”
규연은 짧게 대답했다. 영의정이 어떤 이유로 측근의 여식을 궁 안으로 들였는지, 왜 굳이 규연 앞에서 또 이름을 거론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더욱 서혜 이야기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규연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말에 대해 대화하기 싫었고, 무엇보다도 둘이 반드시 나눠야 할 다른 말이 있었다.
“성빈의 이야기보다 더 급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숙부님?”
규연의 한마디에 영의정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보통 미약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내리 이레를 앓았겠지요.”
“마마께서 드시라고 넣은 약이 아니니까요.”
“그게 더 문제입니다. 어떻게 전하께 그런…….”
“양귀비에 취해 계신 분입니다. 어지간한 약은 듣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별 수 있겠습니까. 그리 강한 것을 준비해야죠.”
어찌나 뻔뻔한지, 헛웃음도 나지 않았다.
“이 나라의 주상 전하십니다. 만일 옥체에 탈이라도…….”
“나지 않을 정도로 준비했고, 일어나지도 않았으니 이런 쓸데없는 대화는 그만하는 것이 좋지 않을는지요, 마마.”
영의정은 단호하게 규연의 말을 잘라 냈다.
“순진한 이야기는 그만두십시오, 마마. 밤을 모셨다고 들었습니다.”
뱀 같은 눈매가 규연을 서늘하게 응시했다. 마주할 때마다 소름이 돋는 눈빛이었다.
“드디어 주상의 품에 안기셔 놓고, 소신만 이리 악한 자로 만드시면 참으로 섭하지 않겠습니까.”
“…….”
“약이 그리 싫으셨으면 끝까지 밀어 내셨어야지요.”
비릿한 미소가 영의정의 입가에 번졌다.
당의 아래 가려져 있던 규연의 손이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불가피한 상황이라 한들, 죽어라 밀어 내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밀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규연은 약 기운을 빌어 언의 품에 안겼고, 그와 밤을 보냈다. 영의정이 원한 대로, 그가 바랐던 대로, 그의 충실한 말이 된 셈이었다.
“길한 날을 잡아 벌인 일이니 분명 용종을 품으실 수 있을 겁니다.”
영의정은 다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는 이내 잔을 내려놓고 다시 규연을 바라봤다.
“품으셔야 할 겁니다, 마마. 반드시요.”
“…….”
“마마께서도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허락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요.”
또 한 번 내려진 명백한 경고에 규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
“늙으면 점점 여유가 생긴다던데, 소신은 아닌가 봅니다. 해가 넘어갈수록 조바심이 생깁니다, 마마. 서둘러 주십시오.”
규연은 그녀를 향한 영의정의 미소가 꼭 날이 잘 벼려진 긴 검 같았다.
새파란 날의 검이 목에 닿기 직전이었다.
규연은 분명, 그 서늘함을 느낄 수 있었다.
* * *
“전하께서 오늘 밤에 따로 찾아간 곳은 없으시다 하였습니다.”
“하면 대조전에 계시겠구나. 그리로 가자.”
“지금 당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당장.”
당장 언을 찾아가겠다는 말에 정 상궁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깊은 밤이었다. 언이 다른 여인에게 찾아가지 않았대도, 이 시간에 찾아간다 하여 규연을 만나 줄 리 없었다.
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규연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장 언을 찾아가겠다며 침전을 벗어나려 하는 상전이 낯설었다.
“마마. 밤이 너무 깊었습니다. 날이 밝으면 찾아가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날이 밝으면 밝는 대로 찾지 못할 게다. 지금 가는 편이 나아.”
“하지만…….”
“자네가 왜 말리려는지 알아. 그래도 일단 찾아는 가야 내 속이 풀릴 듯해 그러네.”
규연은 정 상궁이 왜 발을 묶어 두려 하는지 알았다. 규연이 상처 입는 게 싫어 그녀를 말리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속이 너무 답답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무사히 깨어나 다행이라며 수도 없이 말이 쏟아지는데, 정작 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언의 무관심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고, 오히려 당연하게까지 느끼며 궁에서 살아왔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함께 밤을 보낸 뒤였다. 약에 취해 어쩔 수 없었다 한들, 살을 맞댄 뒤였다.
그런데 언은 그의 시야에서 철저히 규연을 지워 냈다. 이전보다 심했다. 혹시 규연이 정신을 잃고 환상을 본 건 아닌지, 뜨거운 숨만 가득했던 밤이 사실은 규연의 망상이 아닌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무작정이라도 찾아가 묻고 싶었다.
아득했던 그 밤에 당신은 괜찮았냐고, 그 밤이 지나고 궁에 돌아와서는 또 어떠했냐고.
그 밤이 규연의 환상이 아니라, 실재했던 밤이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가시지요, 마마. 길을 잡겠습니다.”
정 상궁은 곧바로 채비한 뒤, 규연을 모시고 대조전으로 향했다.
언이 규연의 침전을 통명전으로 정한 탓에 언에게 찾아가려면 다소 시간이 걸렸다.
“중전마마!”
걸음을 재촉해 언의 침전 앞에 서니 밖을 지키던 상선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규연 앞에 섰다.
“이리 깊은 밤에 어찌 언질도 주지 않고 행차하셨나이까.”
“전하를 긴히 뵈어야 해서 이리 왔네. 전하께서는?”
혹시 자고 있는지,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인지 알고자 던진 물음이었다. 언에게 찾아올 때면 늘 묻던, 답하기 쉬운 질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을 들은 상선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 보였다.
궁에서 몇십 년을 보내며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조차 하지 않는 이가 꽤 당황한 낌새를 보이니 규연의 분위기 역시 심각해졌다.
“혹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아니옵니다, 마마. 그런 것이 아니오라…….”
상선이 살짝 말을 흐린 순간, 침전 너머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전하께서 성빈 자가를 들이셨습니다.”
규연은 그제야 왜 상선이 쉬이 말을 전하지 못했는지 이해했다.
그는 언의 일이라면 부리나케 달려오는 규연을 늘 안타까워했고, 꽤 마음을 쓰는 편이었다.
살얼음판 같은 궁에서 버티고 버텨 상선의 자리까지 오른 자였다. 언이 서혜를 침전 안으로 불렀다는 게 규연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모르지 않았다.
기생 수십을 불러들여 놀이판을 벌이는 게 겉으로 보기에는 더 심란하고 시끄러울지 몰라도, 갖는 의미와 파급력을 따지면 서혜의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다른 여인의 하룻밤은 규연을 흔들 수 없었다. 그러나 서혜는 달랐다.
서혜는 규연을 흔들 수 있었다.
“……성빈이 전하를 잘 모시는 것 같아 다행이군. 내가 왔었다는 사실은 전하께 고하지 말게.”
규연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기색으로 차분히 말을 남긴 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녀의 침전으로 돌아갔다.
“마마!”
그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규연은 한숨을 삼키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꿈 같던 밤은 이제 영원의 규연만의 꿈으로 남게 되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