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 * *
“마마! 정신이 드십니까!”
정 상궁이 울듯이 말하며 규연의 손을 꽉 잡았다.
규연은 몰려오는 두통에 한껏 인상을 찌푸리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정 상궁의 목소리가 들리고, 다른 궁녀들이 안도하며 숨을 돌리는 게 느껴지고, 침전의 금침에 누워 있다는 것도 알겠는데, 이상하게 멍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애쓰고 나서야 마지막 기억을 되짚을 수 있었다.
영의정이 깔아 둔 판 위에서 미약이 든 술을 마시고, 달아오른 몸을 어찌할 줄 모르다가 결국 언이 규연에게 입을 맞췄던 순간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이레를 누워 계셨습니다, 마마.”
“뭐? 윽…….”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마마. 어의가 말하길 몸의 기력이 엉망이 되시어 함부로 움직이시면 아니 된다 했습니다.”
하루도 아니고 이레나 누워 있었다는 말에 몸을 벌떡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허리를 세우니 지독한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
몸의 감각이 깨어나니 입을 맞춘 뒤 이어졌던 시간의 조각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전, 하.〉
언은 꼭 규연의 숨을 모조리 훔쳐 갈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맞췄다. 갈급한 입맞춤에 숨이 차 그가 멀어진 뒤에도 말이 뚝뚝 끊어졌다.
밀려드는 열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어깨를 살짝 밀어 내 보았지만, 언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다시 규연의 입술을 머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너머로 뜨거운 숨이 오가며 단단히 매였던 옷고름은 속절없이 풀어졌다.
순식간에 옷가지가 바닥 위로 널브러지고, 규연의 두 팔이 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 팔을 풀면 목숨이라도 잃는 것처럼, 규연은 언에게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온몸에 언의 형태가 새겨지는 것만 같았다.
닿으면 닿을수록 머릿속이 지워졌다. 언을 부르던 말도 점점 형태를 잃고 신음으로 흩어지고, 나중에는 그마저도 사라져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헐떡거리는 숨소리만 가득했다.
규연이 목소리를 잃어 가는 동안, 언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귓가에 들려오던, 낮게 앓는 소리가 전부였다.
가까스로 가라앉은 열기에 규연이 정신을 잃을 때쯤 무어라 속삭였는데, 그때 규연의 시야가 어둠에 잠기며 기억이 사라졌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지난밤을 곱씹다 보니 귀 끝이 붉어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파리했던 안색에 갑자기 홍조가 오르니 정 상궁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규연의 안위를 살폈다.
“괜찮아. 그보다 나는 궁으로 어떻게 돌아왔지?”
언의 품에서 흔들리다 까무룩 정신을 놓은 뒤로 아무 기억이 없었다.
어찌 궁까지 돌아왔는지, 누가 이곳으로 규연을 데려다 놨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동이 트기 직전에 아란이 모셔 왔습니다.”
아란은 영의정이 붙여 둔 규연의 호위 무사였다. 여인이었기에 궁 안에서 일할 수 없었으나 영의정이 궐의 담 너머로 규연을 불러내거나 은밀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규연의 곁을 지켰다.
“전하께서는?”
“전하께서도 무사히 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럼 혹 이레 동안…….”
말끝이 흐려졌으나 정 상궁이 알아듣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제 상전이 무엇을 물으려는 것인지 바로 알아챘다.
“송구하옵게도…….”
그래서 정 상궁 역시 쉬이 답하지 못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시선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규연은 혹시 쓰러져 있던 이레간 언이 그녀를 찾지 않았냐고 묻는 것이겠지만, 언은 이레 동안 단 한 번도 규연을 찾아보지 않았다.
중전이 갑자기 쓰러져 꼬박 일주일을 일어나지 않았건만, 언은 지어미에게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도 보내지 않으셨더냐.”
“……예, 마마. 송구합니다.”
살을 섞은 밤이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또 한 번 ‘그 눈’을 본 뒤 맞이한 밤이기도 했다.
그런데 언이 사람 하나 보내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하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아주 잠시 부풀어 올랐던 마음 역시 땅 아래로 처박혔다.
어쩌면 언이 진심으로 규연을 걱정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잊혔던 비참함은 곱절이 되어 규연을 덮쳤다.
살짝 번졌던 홍조가 자취를 감추고, 살아나는 듯했던 생기 역시 씻은 듯이 사라졌다.
‘참으로 미련하구나.’
이제는 기대하지 않을 법도, 이제는 추락하지 않을 법도 하건만.
규연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도대체 몇 번째인지 차마 셀 수조차 없었다.
“마마. 한 가지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순식간에 시들어 버린 상전을 보며 한숨을 삼키던 정 상궁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무엇이지?”
“사흘 전에…….”
말을 전하려 하던 순간에 문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예상치 못한 소음이 정 상궁의 말을 뚝 끊어 냈다.
정 상궁은 곧바로 일어나 문밖을 살폈다.
얼마 가지 않아 소리가 잦아들더니 문이 열리고, 하얗게 질린 얼굴이 정 상궁보다 앞서 규연을 마주했다.
“중전마마. 깨어나시어 참으로 다행이옵니다.”
“김 내관.”
언을 모시는 내관이었다.
규연이 정말 일어나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규연이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 본연에 대해 반색하는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규연이 잘 알았다.
내관이 이렇게 질린 낯으로 중궁전을 찾는 이유는 하나였다.
“광증인가?”
“예, 마마. 송구하옵니다.”
광증이 도졌을 때 언에게 달려갈 수 있는 자가 돌아왔다는 것이 기쁠 뿐이었다.
김 내관은 차마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들지 못했다.
규연은 입 안 가득 퍼지는 씁쓸함을 느끼며 정 상궁을 바라봤다.
“옷을 가져오게. 침의를 입은 채로 달려갈 수는 없으니.”
“하나, 마마. 깨어나서도 절대 함부로 거동하시지 말라는…….”
“전하의 광증을 가라앉히는 것보다 중한 것이 어디 있더냐. 어서 가져오도록 해.”
살짝 움직일 때마다 현기증이 몰려오고, 약 기운이 남은 건지 아직도 속이 울렁거렸지만, 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언에게 달려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참 우스운 짓이라고 생각하건만, 꼭 본능처럼 몸이 먼저 움직였다.
* * *
다급하게 환복한 규연은 발길을 재촉해 편전으로 나아갔다.
아직 몸이 온전치 않아 걸음에 속도가 붙지 않는데도 있는 힘껏 움직여 최대한 빠르게 발을 옮겼다.
옷을 갈아입느라 쓴 시간이 있어 이미 다소 지체된 상황이었다. 늦장 부릴 틈이 없었다.
“앗!”
“마마!”
“괜찮아. 호들갑 떨 필요 없어.”
“무리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어의께서 몇 번이고 당부하셨어요. 옥체가 미령해지시면…….”
“괜찮다니까. 내가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규연이 휘청거리자 정 상궁이 어두운 낯빛으로 규연을 부축했다. 누가 봐도 무리하는 게 분명한지라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쓰러졌던 동안 눈길 한 번 안 주던 언을 향해 이토록 헌신하는 규연의 모습이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도 역력했다.
하지만 규연은 그런 마음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척,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중전마마!”
편전 앞으로 가니 상선이 화들짝 놀라며 규연에게 다가왔다.
“깨어나신 줄 몰랐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전하께서는? 광증이 도졌다고 들었는데.”
“예, 마마. 조금 전에 또…….”
상선은 일어나셨냐며 규연을 살피려 했지만, 지금 규연의 머릿속에는 언의 광증만 가득했다.
‘또’라는 글자만 규연의 귓가에 남았다. 조금 전에 또 광증이 시작됐다는 뜻으로 이해한 규연이 곧바로 상선을 지나쳐 문 앞으로 나아갔다.
광증이 도진 때면 언의 허락 없이도 늘 문을 열었던지라 앞을 지키던 궁인들이 곧바로 편전의 문을 열었다.
“전…….”
규연은 빠르게 나아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편전 안에 들어간 순간, ‘전하’라는 짧은 단어조차 완성하지 못할 만큼 규연이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
광증이 도졌을 때 익히 보았던 그림과 똑같았다.
언이 온갖 물건을 또 부숴버려 바닥에 오만 파편이 가득한 것도 같고, 익선관이 찌그러진 채 나동그라져 있는 것도 같고, 안을 지켜야 하는 내관과 궁녀 몇이 몸을 떨고 있는 것도 같았다.
딱 하나. 딱 하나만 달랐다.
“전하. 지금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십시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여인.
생전 처음 보는 여인 하나가 언의 앞에 앉아 그를 달래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마마. 소신이 바로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다급하게 따라온 상선이 송구하다며 허리를 숙이고, 그 뒤에 붙었던 정 상궁 역시 당황한 기색으로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바라봤다.
“이틀 전 봉호를 받으신 성빈 자가께서 먼저 당도하시어 전하의 광증을 달래셨습니다.”
언의 곁에 다른 여인이 있는 것쯤이야 한두 번 본 일이 아니니 어색하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에 생채기 하나도 쉬이 남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지도 모를 여인이 언의 광증을 달랬다는 사실이, 평소라면 눈을 벌겋게 뜬 채 숨만 몰아쉬고 있어야 할 언이 당장이라도 잠들 것처럼 평온히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이, 규연을 흔들었다.
“하여 조금 전부터 호전되었노라 말씀드리려 하였는데, 소신이 늦었습니다. 송구합니다, 마마.”
상선을 비롯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궁인들의 분위기를 읽은 순간, 규연은 정 상궁이 침전에서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깨달았다.
규연이 쓰러져 있던 동안 후궁이 입궐했다는 소식을 전하려던 것이 분명했다.
“중전마마!”
조금 멍해져 있을 때, 여인이 규연을 발견했다.
화들짝 놀란 여인은 곧바로 규연 앞에 다가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중전마마. 뒤늦게나마 마마께 이리 인사 올립니다. 소첩, 성빈이라 하옵니다.”
성빈이라는 봉호를 받았다며 인사 올린 여인은 다름 아닌 새 후궁이었다.
첩지를 받는다는 소식으로 그녀를 심란하게 했던, 영의정의 최측근인 이판의 여식.
언제고 규연 대신 영의정의 새 말이 될 수 있는 여인이 고운 미소를 머금고 규연을 바라봤다.